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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냐 두리반이냐

용역의 폭력적인 철거 시도에 떠는 서울 ‘명동 마리’와 ‘포이동 재건마을’… 해결이냐 참사냐 갈림길에 선 ‘제2의 용산들’
등록 2011-08-24 15:52 수정 2020-05-03 04:26
명동 마리에서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인근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의 예배가 열린다. 8월17일 열린 예배의 모습. 11가구의 세입자를 포함한 농성자들과 향린교회 교인들이 참석했다. 명동 마리에서는 수요예배 말고도 각종 공연 등 행사가 열리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선임기자

명동 마리에서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인근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의 예배가 열린다. 8월17일 열린 예배의 모습. 11가구의 세입자를 포함한 농성자들과 향린교회 교인들이 참석했다. 명동 마리에서는 수요예배 말고도 각종 공연 등 행사가 열리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선임기자

쌀이 떨어져간다. 20kg 8포대가 전부다. 11가구의 세입자를 포함한 40여 명만으로도 8월을 넘기기 빠듯하지만, 수백 명이 다녀가는 주말을 생각하면 한 주 견디기도 녹록지 않다. ‘명동 마리’, ‘카페 마리’라고도 불리는 곳. “명동해방전선”이라는 펼침막으로 존재를 알리는 서울 명동재개발 3구역이다. 지난 8월3일 새벽 용역들은 농성자만을 몰아낸 것이 아니었다. 쌀을 휘저어 바닥에 흩뿌렸다. “정말 치사했다.” 지난 8월17일 만난 이재성(46) 상가대책위 조직부장은 지난해까지 황소식당 사장님이었다. 이 부장은 새벽에 벌어진 용역들의 폭력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하고 무섭다. 배재훈 상가대책위 위원장과 농성자 1명이 병원에 입원하고, 20여 명이 통원치료를 요하는 부상을 입었다. 100여 명이 넘는 철거용역이 소화기와 파스를 뿌려대며 들이닥쳤던 그 새벽, 중구청의 중재로 시행사와 대책위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고 있어 농성자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구청장이 있는 자리에서 한 시행사 쪽이 밝힌 “철거는 당분간 없다”는 말이 명동 마리의 전 주인인 설순임(42)씨의 귀에 아직도 생생하다. 더 이상 철거와 관련된 어떤 약속도 신뢰하기 힘들다. “명동 마리를 (철거)용역 사무실로 쓰기 위해서”가 철거에 나선 용역회사가 밝힌 이유다.

“예전처럼만 살게 해달라”는 요구

용역을 앞세운 철거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 4월 6가구의 집기가 모두 철거됐다. 6월에는 지금의 명동 마리를 포함해 나머지 가게의 집기가 모두 용역의 손에 들려 사라졌다. 11가구의 농성자들이 막기에 불가항력이었다. “쓰나미 같았다”고 표현했다. 같은 시기 서울 홍익대 인근 식당 두리반이 철거를 거부하고 투쟁한 지 531일 만에 영업을 보장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명동3구역 상가세입자 대책위와 함께 명동해방전선이라는 기획단이 꾸려졌다.

그로부터 석 달 뒤, 11가구의 농성자 중 어느 누구도 몸이 성하지 못했다. 설씨도 조직부장 이씨도 지난 8월3일 용역의 폭행으로 몸을 다쳤지만 병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그나마 이들이 가장 젊고 건강한 편이다. 몸만이 아니다. 11가구의 곳간도 텅 비었다. 쌀 말고도 버티는 데 필요한 것은 너무 많다. 모기향, 알코올솜, 김치, 각종 밑반찬, 쥐약, 컵라면, 파리채, 돗자리···. 농성장 한켠에 계통 없이 적혀 있는 물품 현황이지만 당장 필요한 것들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그대로다. 모자랄 수밖에 없다. 함께하니 행복하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의 곤궁함은 어쩔 수 없다.

지난 8월12일 새벽 강남구청 직원과 철거용역 140여 명이 서울 강남 포이동 재건마을에 난입했다. 6월 화재 뒤 노인가구를 위해 만든 가건물은 그들의 손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8월17일 마을회관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위한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 너머로 폐허가 된 재건마을의 빈터가 보인다. 한겨레21 이종찬 선임기자

지난 8월12일 새벽 강남구청 직원과 철거용역 140여 명이 서울 강남 포이동 재건마을에 난입했다. 6월 화재 뒤 노인가구를 위해 만든 가건물은 그들의 손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8월17일 마을회관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위한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 너머로 폐허가 된 재건마을의 빈터가 보인다. 한겨레21 이종찬 선임기자

짧게는 9년, 가장 길게는 32년 동안 명동을 지킨 11가구가 십수 년 된 상가번영회에서 대책위로 이름을 바꾼 것은 지난 2009년. 각자 살길을 찾지 않고 대책위 활동을 벌인 탓에 생계도 막막해졌다. 농성장의 생필품마저 대기가 버겁다. 그래도 이탈자는 없었다. “우리는 다수결 이런 것 없어요. 한 분이라도 반대하면 무효,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요.” 2년 동안 이탈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이들은 명동해방전선의 구성원이다. 25층 금융센터가 밀어내려고 하는 이들은 사실 빈민이 아니다. 말하자면 중산층이다. 교회의 장로고 권사고 집사다. 절에서도 시주를 곧잘 하는 보살님이다. 낙원화랑, 옛날국수, 오징어식품, 부산오뎅, 황소식당, 이모낙지, 가야삼계탕, 링크노래방, 모퉁이식당, 한잔하자, 그리고 명동 마리까지 평균 10년 동안 이 자리에서 자식을 낳아 길렀고, 생활을 꾸렸다. 하지만 개발은 순식간에 이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이들이 재개발로 쫓겨나면서 제안받은 보상금은 4개월치 영업손실 보상액인 가구당 370만∼2천만원이 전부다. “예전처럼만 살게 해달라”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누군가는 대출을 받고, 또 누군가는 대출금 이자를 못 갚아 빚이 늘어만 간다. 이재성 조직부장은 “개개인의 곤란한 점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며 구체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꺼린다. 이 부장은 황소식당 사장님이었다. 딸은 공부를 곧잘 했다. 올해 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책위에서도 오랜만에 들은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딸은 지금 대학생이 아니다. 보험회사의 비정규직 고졸 사원이 됐다. 최소한 딸의 대학 입학 걱정은 하지 않던 아빠였다. 입학을 보류하고 가족의 생계비를 버는 딸을 볼 면목이 없다. 이 부장은 기자의 질문에 결국 눈시울을 붉힌다. “힘든 얘기는 더 묻지 마라. 옆에 계신 분들 보이기 죄송하다”며 자리를 뜬다.

개발이익의 1만분의 1이라도

그날 저녁 7시30분, 매주 열리는 수요예배가 시작됐다. “절에 다니신다고 했던 분은 하느님 대신에 부처님이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예전과 달리 숙연함이 더해졌다. 배재훈 대책위원장이 지난 8월4일 철거용역의 폭행으로 몸져누운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리보전하고 있다. 앞으로 한 달간은 명동 마리를 지키던 이전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이날 참석한 세입자는 7가구. 배 위원장은 부상으로 요양 중이고, 나머지 3가구는 비번을 받아 집에 갔다. 이틀에 한 번 2~3가구가 순번을 타서 집에 다녀온다.

“어제···, 용역회사 사장이 찾아왔습니다. 중재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중재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개발이익의 100분의 1, 아니 1만분의 1이라도 세입자를 고려하는 데 쓰이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명동 마리에서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인근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의 예배가 열린다. 8월17일 마리의 모습. 한겨레21 이종찬 선임기자

명동 마리에서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인근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의 예배가 열린다. 8월17일 마리의 모습. 한겨레21 이종찬 선임기자

조헌정 목사의 말로 세입자들은 여전히 철거 시도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시간의 예배가 끝난 뒤에도 그 긴장감은 여전히 명동 마리에 가득했다. 11가구 세입자를 위해 예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8월3일 용역의 철거 시도가 있은 뒤에도 명동 마리에서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행사가 있었다. 카페 한쪽에 걸려 있는 계획표를 보면 매주 수요일에 있는 예배 말고도 영화세미나, 성노동세미나, 재개발세미나 등 강연이 끊이지 않는다. 8월26일에는 낭독회, 27일 저녁 7시부터는 자립음악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명동 마리에 들어서면 농성자들이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예배를 마친 농성자들이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만화책을 펴는 사람도 보인다. 늦은 저녁밥을 먹기도 한다. 또 기타를 친다. 금세 명동 마리는 흥으로 가득 찬다.

같은 날, 서울 강남구 개포4동 1266번지에도 비가 내렸다. ‘포이동 재건마을’(이하 재건마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이곳은 조용하게 들끓고 있었다. 형성뿐만 아니라 철거의 역사도 길다. 1981년부터 정부는 자활근로대, 동청사 지역 주민, 상이용사, 공용주차장 주민 등을 차례로 현재의 개포4동(당시 포이동) 시부지로 이주시켰다. 당시 하루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 버는 돈이 5천원, 1만원짜리 합판 40장을 사서 흙바닥 위에 지어 살기 시작한 게 지금의 재건마을이다. 1980년대 초 45가구로 시작된 이주는 1990년대 말 96가구에 이르렀다. 이번 화재를 입은 76가구 가운데 정부(구청)가 이주를 지시해서 옮긴 게 65가구에 달한다. 나머지 11가구 또한 재건마을 주민의 2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원자(66)씨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키웠다. “5년이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20년이 흘러버렸어요.” 지금의 개포동사무소 청사에 살다가 쫓기듯 이주한 것이 1989년이다. “그때 정부에서는 지금 자리로 가서 살면 된다고 그랬죠. 아무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쫓겨나 판잣집을 짓고 자리를 잡은 거지.”

“무조건 몰아내면 어찌 살아”

정씨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지난 8월12일 강남구청 60명, 철거용역 직원 80명이 들이닥쳐 가건물 7채를 파괴했다. 그 가건물은 지난 6월 마을에 화재가 난 뒤 집을 잃은 75가구(전체 96가구) 가운데 노인가구부터 입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나마 공부방으로 만든 1채는 용역의 철거를 면했다.

“31년 동안 살았어. 무조건 뜨라고 하면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

부서진 가건물 더미를 가리키며 자신이 30년 동안 살았던 집터라고 말하는 김용팔(57)씨는 자활근로대 1세대다. 자활근로대는 정부가 주택가를 돌며 고물을 주워 생활하는 사람들을 모아 만든 단체로, 정부는 당시 야산이던 강남에 40여 가구씩 분산해서 살게 했다. 재건마을은 그중 1곳이다.

1981월 11월21일. 그가 포이동(현 개포4동)에 자리를 잡은 날짜다. 그의 집은 불탔다. 재건마을 1조 5호였다. 김씨는 수해라면 지긋지긋하다. 원래 재건마을은 상습 수해지역이었다. 구청은 김씨처럼 화재를 입은 주민들에게 임대주택에 들어갈 것을 권했지만, 강남·송파·강동 등에 있는 주택들은 모두 반지하다. 75가구 가운데 임대주택으로 가겠다고 나선 3가구가 있었지만, 1가구만 임대주택에 당첨될 정도로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간다 해도 임대비용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변상금이다. 정부(구청)는 강제이주시킨 지 10년 만인 1990년부터 ‘불법점유자’라고 통보하면서 토지변상금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납부를 거부해서 가구당 7천만원 정도의 변상금이 고지된 상태다.

하지만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떠날 수 없는 그들의 삶터다. 정씨는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았다”며 “쌀이 떨어져도 불쑥 찾아가면 누구 하나 거절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35가구에 달하는 60대 이상 노인가구는 재건마을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70대 노인은 “지금 임대주택으로 간다고 해도 어차피 지하방에서 혼자 살 건데, 차라리 지금처럼 그냥 살게 해주면 안 되겠나. 이 사람들을 떠나서 세상으로 나가는 게 무섭다”며 기자를 붙잡는다. 화재가 난 뒤 마을 대책위에서 가장 먼저 지은 것이 노인가구의 공간과 아이들의 공부방이다. 정부에 의해 배제될 처지에 놓인 약자들은 약자를 보호한다. ‘포이동 재건마을 주거복구 1호 공부방. 평화캠프 포이동 인연공부방’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건물에 들어섰다. 공부방에는 방송인 김제동씨가 남긴 1천 권의 책과 피아노가 놓여 있다. 장판과 벽지 또한 근처의 이웃이 기증한 것이다. 그 방은 비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이들이 뒹굴고 있어야 할 곳이다. 강제철거 시도 뒤 여론을 의식한 강남구청은 지난 8월13일 △토지변상금과 관련한 압류를 하지 않을 것 △임시숙소 조성 △고물상 이전 △화재 잔재 이전 등에 대해 서울시와의 협의를 전제로 협의할 수 있음을 밝혔다.

명동과 포이동 앞에 놓인 갈림길

용산 참사냐, 두리반이냐. 이것은 명동 마리, 재건마을 앞에 놓인 갈림길이다. 세입자라는 이유만으로 생존 대책 없이 몰아내다 참사를 빚은 2009년 1월20일 용산 재개발지역은 지금도 구체적인 세입자 보호대책이 세워지지 않았다. 지난 6월 서울 홍익대 인근 칼국숫집 두리반은 식당 영업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기까지 531일이 걸렸다.

글 하어영 기자haha@hani.co.kr

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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