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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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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참여냐 보이콧이냐

서울시 주민투표 앞두고 전면 무상급식 지지 세력 고민… 적극 투표 참여는 최상의 결과, 보이콧은 현실적 최선
등록 2011-06-29 18:25 수정 2020-05-03 04:26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서울친환경무상급식본부 관계자들과 서울시의회 야당 의원들이 지난 6월22일 서울시의회에서 보수단체들이 주도한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서명부의 오류 검증 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한상균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서울친환경무상급식본부 관계자들과 서울시의회 야당 의원들이 지난 6월22일 서울시의회에서 보수단체들이 주도한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서명부의 오류 검증 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한상균

“고려할 변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말 어렵다.”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의 배옥병 상임대표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총력전으로 맞불을 놓을지, 맞대결을 피하며 상대방의 고사(枯死)를 기다릴지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피아의 ‘전투 역량’을 정확히 가늠하기 쉽지 않은 탓이었다. 민주노동당의 한 관계자도 그랬다. “누구는 지난해 교육감 선거를 얘기하면서, ‘핫’하게 붙으면 승산이 충분하다는데 모르겠다. 부결시키든 무산시키든 확률이 0.1%라도 높은 쪽으로 가는 게 정치적 부담을 줄이는 길 아니겠나.”

보수 진영에 유리한 휴가철 평일 투표

초·중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을 주도해온 야 5당과 시민사회에 비상이 걸렸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보수 진영이 주도한 서울지역 학교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가 예상을 뒤집고 발의 요건을 채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기껏해야 20만~30만 명의 서명을 받는 데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보수 진영의 조직력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이 상황을 낙관했던 건 지난 2004년 시민단체들이 학교급식조례안을 청구할 당시 서명인 20만 명을 가까스로 채웠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민주당 서울시당의 한 관계자도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 맞은 격”이라고 했다.

야 5당과 시민단체들은 일단 ‘복지 포퓰리즘 추방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제출한 주민투표 서명부에서 불법 여부를 가려내는 ‘주민투표 검증 열람인단’을 꾸릴 계획이다. 강희용 서울시의원(민주당)은 “대리·중복 서명과 지위를 이용한 강압이 동원됐다는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며 “철저한 검증을 통해 투표 발의의 부당성과 불법성을 집중적으로 알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들도 투표 발의가 정당했다는 주민투표심의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는 데 동의한다. 발의 요건 유권자(41만8005명)의 2배에 가까운 청구권자 규모(80만1263명)로 미뤄, 무효 서명을 아무리 많이 걸러내더라도 발의 자체를 무효화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무상급식 찬성 진영 앞엔 두 개의 선택지가 놓인 셈인데, 하나는 전면 무상급식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조직해 주민투표를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신임투표이자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정치적 국민투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참여 거부 캠페인을 통해 주민투표 자체를 무력화하는 보이콧 전술이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각각의 성공 확률뿐 아니라, 성공했을 때의 정치적 효과와 실패할 때 감수해야 할 손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고난도의 방정식이다.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적극적 투표 참여를 통해 전면 무상급식을 관철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주민투표를 ‘기획 조정’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거취를 고민해야 할 만큼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되고, 보편적 복지 정책을 향해 포퓰리즘이란 비난 공세를 펼쳐온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기세도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보편적 복지를 내년 총선과 대선의 정책 승부수로 띄우려는 진보 진영엔 최상의 결과다.

문제는 이런 정공법은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30∼40대 직장인들이 주력인 전면 무상급식 찬성 세력의 특성상 휴가철 평일에 진행되는 투표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 반면, 50대 이상 장노년층과 자영업자가 주축인 무상급식 반대 세력은 상대적으로 조직투표에 능숙하다. 따라서 투표율이 저조할 경우 결과는 무상급식 반대 세력에게 유리하게 나올 공산이 크다. 진보개혁 진영으로선 적극적으로 투표참여 운동을 벌였다가 패배한다면 대규모 전력 손실이 불가피한 셈이다. 4·27 재보선을 통해 확보한 정국 주도권이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에 넘어가게 되는 것은 물론, ‘보편복지=포퓰리즘’ 비난 공세가 총선과 대선을 앞둔 국면에서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투표 외면해 오 시장 자폭하게 두자”

이런 점에서 투표 보이콧은 현실적인 선택이다. 무엇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다. 서울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참여해야 투표가 효력을 갖게 되는데, 만약 어느 한쪽이 조직적으로 참여를 거부할 경우 유효 하한선을 넘기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2009년 8월 제주지사 소환투표에서도 투표일 직전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8%가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했지만, 관이 주도해 보이콧 운동을 벌인 탓에 실제 투표율은 11%에 머물렀다.

성공할 경우 정치적 과실도 적지 않다. 주민투표를 무산시킬 수 있다면 전면 무상급식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다.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등 다른 보편적 복지정책을 밀어붙일 정치적 동력을 확보하게 되는 건 물론이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주민참여 확대를 명분으로 주민투표제 도입에 앞장서온 시민사회가 참여 거부를 통해 투표를 무산시키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개혁 진영이 선거 때마다 펼쳐온 투표독려 운동과 모순된다. 보수 진영도 얼마든지 투표 보이콧을 통해 진보 진영이 발의한 주민투표를 무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선례가 주민투표제를 현실적으로 무력화하는 길을 터줄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은 전면 무상급식 찬성 진영이 단일한 입장 도출에 실패해 일부는 투표에 참여하고, 일부는 보이콧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투표 유효선인 3분의 1을 가까스로 넘긴 상태에서,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의견이 찬성 의견을 압도하는 결과가 나오게 될 공산이 크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선 어떤 투표 전술을 취할 것인지, 진영 내부의 의견 통일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시민단체들도 단일한 전술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문제는 합의의 시점이다. 배옥병 상임대표는 “6월27일 시민사회와 야 5당이 함께하는 주민투표 대책기구 출범을 계기로 활발한 토론을 벌이겠지만, 당장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다”며 “지금으로선 투표 청구 서명부의 오류를 잡아내고, 투표의 부당성을 부각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핵심 인사들이 말을 아끼고 있지만, 무상급식 진영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보이콧 쪽으로 기운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서울 풀뿌리 시민단체 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이번 주민투표는 시민들이 요구하지 않은 정치 행위를 오세훈 시장이 임의로 벌이는 것”이라며 “투표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불법행위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민주당 서울시당 운영위원인 최재천 전 의원은 지금 상황을 ‘탈영한 초급장교의 수류탄 인질극’에 비유했다.

“오세훈 소위의 손에는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이 들려 있다. 오 소위 자신도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던지질 못한다. 수류탄은 시간이 지나면 터지게 돼 있다.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제 풀에 지쳐 자폭하게 해야지, 수습하겠다고 섣불리 달려드는 건 위험하다. 전면 보이콧이 범진보 진영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반쪽 주도 주민투표에 대한 논의 있어야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시민사회가 중대한 시험대에 오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의 손우정 연구위원은 “오 시장의 배후 조종 여부나, 불법·탈법 행위의 규모와 무관하게 보수세력이 주민투표를 조직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라며 “이번 사안을 계기로 우리가 주도하지 않은 주민투표에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치열하고 진지한 논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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