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현대사 기술(記述)의 주도권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역사 내전’이다. 신호탄을 쏘아올린 쪽은 보수 신문들이었다. 가 1월10일 ‘한국사, 필수과목으로 하자’는 신년 기획을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정부·여당과 보수 신문들이 주거니 받거니 이슈를 키워나갔다. 필수과목 지정 캠페인은 기존 교과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이에 호응해 학계의 보수 인사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지난 5월20일 ‘한국현대사학회’ 출범이다.
조중동, 현대사학회 다룬 기사의 65.8%한국현대사 연구의 학문적 폐쇄성과 이념적 편향성을 극복하겠다며 닻을 올린 현대사학회에 대해 역사학계의 시선은 썩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이념 성향과 전공 영역을 넓혔다고 자처하지만, 참여자들은 여전히 현대사를 전공하지 않은 우파 성향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탓이다. 보수 신문과 합작해 기존 연구 성과를 좌편향으로 몰아붙이는 것에도 불쾌한 기색이다. 일부에선 총선과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 역사 논쟁을 제기하는 것을 두고 정치적 의도를 의심한다.
현대사학회를 대하는 냉소적 시선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100명 남짓한 소규모 학회의 출범에 보여준 관심치고는 보수 신문의 반응이 이례적으로 뜨거웠다. 학회 출범 열흘 전인 5월10일 는 1면과 특집면에 학회 탄생을 알리는 기사를 내보냈고, 다음날인 11일에는 사설과 문화면 인터뷰를 통해 “대한민국의 참 역사상을 보여주라”며 학회에 거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도 5월11일부터 대대적인 학회 띄우기에 나섰다. 현대사학회 출범을 다룬 사설과 기획 기사, 인터뷰와 함께 현대사 연구자들의 ‘자학사관’과 좌파적 경향성을 문제 삼는 칼럼과 기사를 잇따라 내보냈다. 이 신문은 학회가 출범한 20일부터는 ‘한국 현대사 바로 세우자’는 주제로 4회 연속 시리즈물을 내보내며 역사학계의 ‘사관 편향’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보수 신문의 전폭적 지원은 5월10∼24일 조·중·동 3개 보수 신문이 현대사학회를 다룬 기사와 사설·칼럼 수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신문들은 이 기간에 25건( 14건, 7건, 4건)의 기사·칼럼을 내보냈는데, 10개 중앙일간지가 다룬 기사·칼럼(38건)의 65.8%에 해당하는 수치다. 문제는 글의 내용 모두 학회에 대한 일방적 찬사와 홍보, 기존 현대사 연구에 대한 일방적인 깎아내리기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각각 3건과 1건의 기사를 실은 가 학회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함께 다룬 것과 대조적이다.
학회에 대한 대표적 비판 가운데 하나는 2006년 를 출간해 ‘친일·독재 미화’ 논란에 휘말렸던 뉴라이트 성향 ‘교과서포럼’의 확대판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회 쪽은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학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한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과 한 전화 통화에서 “학회원 가운데 교과서포럼에 참여한 분은 7~8명으로 전체 회원 150명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며, 학회 창립을 주도한 분들은 교과서포럼과 관계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 와 에 공개된 72명의 고문·창립준비위원·발기인 명단을 분석한 결과, 교과서포럼에 고문·운영위원·필진으로 참여한 인사가 16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교과서포럼의 구성원(28명) 가운데 작고한 고 김일영 교수,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등 사회단체 인사 등을 제외하면 핵심 인사 대부분이 현대사학회로 고스란히 옮겨온 셈이다. 교과서포럼과 현대사학회 두 곳에 함께 적을 둔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학회 출범과 관련해 와 한 인터뷰에서 “(교과서포럼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잘된 책이었는데, 신문 몇 군데에 좋지 않은 서평이 나오고 북한 까지 매도하는 논평을 내더니 책이 죽어버렸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박근혜 위한 박정희 띄우기 곧 가시화”학회 창립을 주도한 쪽이 교과서포럼과 무관하다는 해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언론에 학회 설립을 주도한 ‘3인방’으로 소개된 강규형·김용직(성신여대)·이명희(공주대) 교수는 학계의 대표적인 뉴라이트 인사로 꼽힌다. 이 가운데 강 교수는 교과서포럼 운영위원으로 활동했고, 김 교수는 교과서포럼이 펴낸 의 집필자다. 이 교수 역시 뉴라이트 교육단체인 자유교육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또 다른 주도 인사인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강규형·김용직 교수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대통령·한나라당 추천위원으로 참여해 각별한 연을 맺어온 사이다. 진실화해위에서 이들과 함께 일했던 역사학계의 한 인사는 “학계나 국책연구기관에 진보 성향 인사가 다수 포진해 있는 것에 비판적이었고, 보수 학자들이 세력을 모아 좌파에 대항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네트워크 조직에 열심이었던 분들”이라고 전했다.
이념적 외연 확장을 위해 진보·개혁 성향 학자들을 무리하게 끼워넣은 점도 뒷말을 낳고 있다. 발기인에 이름이 오른 김무용 고려대 강사와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언론에 명단이 나간 뒤 이름 삭제를 요청해둔 상태다(상자 기사 참조). 학회 구성과 취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거나, 본인 확인을 거치지 않고 이름을 넣어 문제가 생긴 경우다. 김용직 교수는 “충분한 준비가 갖춰지지 못한 상태에서 서두르다 보니 연락이 닿지 않거나 충분히 의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이름이 오른 경우가 있다”며 오류를 인정했다.
현대사 연구자들을 비롯해 진보학계는 한국사 필수과목 채택 요구에서 현대사학회 출범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의 배후에 정치적 의도가 깃든 것은 아닌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보수 신문과 정치권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춰 신속하게 학회를 띄운 데는 단순한 학문적 목적 이외의 노림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보수 세력의 재집권 전망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보수가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는 현대사 해석을 고리로 이념 논쟁을 촉발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학계가 앞장서고 보수 신문과 정치권이 이들의 주장을 확대재생산하며 ‘보수의 총집결’을 노리는 시나리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년 대선 국면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여권의 유력 주자로 부상할 것에 대비한 선제적 이슈화 전략이란 분석도 있다. 한 소장 역사학자는 “박 전 대표가 부상하면 자연스럽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 현안으로 등장하지 않겠느냐”며 “학술연구로 포장된 우파 학자들의 박정희 띄우기가 곧 가시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선 현대사학회와 역사학자들의 대립을 사회과학계와 역사학계의 충돌로 보는 시각이 있다. 역사를 비판적 성찰 대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과 분석·비교를 통한 평가 대상으로 보는 사회과학자들의 학문적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 현대사학회에 참여한 학자들의 다수는 정치학·경제학·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다.
5년 전 뉴라이트 등장과 유사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은 현대사학회의 ‘도발’에도 공식 대응을 삼가고 있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상황 인식이 엿보인다. 하지만 보수 신문과 현대사학회 쪽 움직임을 보면 2006년 ‘교과서 파동’에 이은 또 한 차례의 역사 내전은 불가피해 보인다. 현대사를 둘러싼 지금의 갈등 양상이 역사 논쟁을 계기로 뉴라이트가 전면에 등장했던 5년 전과 유사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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