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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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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징벌당한 ‘징벌적 등록금제’


출구 없는 학점 경쟁에 내몰린 카이스트 학생의 네 번째 자살…
서남표 총장은 뒤늦게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비판 목소리 높아가
등록 2011-04-15 10:41 수정 2020-05-03 04:26

“부검 계획 없어요.” 경찰은 잘라 말했다. 지난 1월8일 밤 11시30분 대전 유성구의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정에서 조아무개(19) 학생이 오토바이에 몸을 기댄 채 숨져 있었다. ‘카이스트 학생의 교내 자살’ ‘전문계고 출신 로봇 영재’라는 활자가 언론 지면을 장식했다. 심지어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는 억측까지 나돌았다. 영재들의 요람, 국내 최고의 이공계 대학. 굳건하던 ‘소문의 벽’이 무너진 카이스트는 뜻밖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학교는 들끓고 있었다.

“집중이 안 돼 공부할 수 없다”

‘불씨’는 있었다. 조씨의 기숙사 룸메이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성적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형이 성적 때문에 휴학을 하려 했는데 시험 기간이 가까워서 안 되자, 병원에서 맹장수술을 받으면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룸메이트 박아무개씨가 전한 사연은 이렇다. “방에서도 로봇 모델 갖다놓고 많이 만들었어요.” 성적은 떨어지고, 좋아하는 로봇은 만들고 싶고…. 조씨는 입학 1년 만에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로봇을 영영 손에서 놓고 말았다. 서남표(75) 총장은 국외 출장을 이유로 조씨의 빈소를 찾지 않았다.
‘불씨’는 또 있었다. 조씨의 죽음 뒤 한동안 시끄럽던 카이스트는 다시 예전처럼 평온을 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두 달여가 지난 3월20일 경기 수원에서 김아무개(19)씨가 투신했다. 과학고를 졸업한 그는 휴학계를 낸 지 닷새 만에 아파트 옥상으로 치달았다. 성적도 괜찮았던 것으로 알려진 그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33) 박사는 자신의 트위터에 “그렇게 웃으며 본인을 아랍 왕자라 했던 넌 또 왜… 지금은 행복하길 바란다”는 글을 올려 그를 추모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아무개씨의 빈소가 차려진 인천의 한병원 장례식장에서 박씨의 가족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아무개씨의 빈소가 차려진 인천의 한병원 장례식장에서 박씨의 가족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김씨의 죽음이 더는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지 않을 즈음, 세 번째 죽음이 전해졌다. 서울 잠원동에서 역시 투신한 장아무개(25)씨. 2009년 카이스트에 통합된 한국정보통신대 출신이었다. 4년 전부터 조울증 치료를 받았다는 것, ‘정통 카이스트생’이 아니라 일종의 편입생이라는 것 등이 ‘죽음의 의미’를 너무도 빨리 덮어버렸다.

그러나 ‘불씨’는 덮이지 않았다. 끝내 또다시 일이 터졌다. 지난 4월7일 인천에서 과학영재고 출신 박아무개(19)씨가 아파트 21층에서 뛰어내렸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휴학계를 내러 김동수 학과장(수리과학과)과 교내 스트레스클리닉의 한오수 교수(서울아산병원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은 바로 다음날 벌어진 일이라 충격은 더더욱 컸다. 한오수 교수는 “박씨가 의욕이 없고 집중이 안 돼 공부를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부산 과학영재고 2학년 때부터 이런 증상이 있어 정신과 치료도 받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함께 온 어머니에게 필요하면 입원 치료를 권했다”며 상담 내용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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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차등 수업료제’ 폐지

이 모든 불행의 ‘불씨’로 지목된 것이 ‘차등 수업료제’ 또는 ‘징벌적 등록금제’다. 일정 성적 이하의 학생에게 수백만원에 이르는 수업료를 부과하는 반강제적 학업 독려책이다. 지난해까지 학생들은 평균학점이 3.3 미만이면 기성회비 150여만원을, 3.0 미만일 땐 0.01학점당 6만원씩 계산된 수업료를 납부해야 했다. 올해 들어서는 일부 완화됐지만 뼈대는 그대로다. 학생들은 서 총장이 취임 이듬해인 2007년 도입한 이 ‘채찍’에 서서히 멍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돈이 아니라 실패자·낙오자라는 딱지를 학생들이 못 견딘 겁니다. ‘얼마짜리’가 돼버리는 거죠. 70%가량은 돈을 안 내니 나머지 학생들은 자괴감에 시달릴 수밖에요.” 한 대학원생의 말이다.

대학 쪽이 수수방관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1월 학교 쪽은 조씨 사건 뒤 서둘러 언론에 내용을 풀어놓았다. 당시 이승섭 학생처장은 “학생처를 중심으로 지난해 8월부터 1학년생을 위한 지원 방안을 준비해왔다”며 “잘하는 학생을 더 도와주는 것보다 많은 학생이 함께 잘하도록 도와주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새내기 지원단’이라 해서 학업과 상담을 아우르는 제도가 첫손에 꼽혔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제도를 참고한 것으로, 신입생에게 멘토를 붙여 학업을 돕고 기숙사에서도 책임교수와 선배들이 상시적인 고충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열흘 간격으로 잇따라 3명이 세상을 등지자, 애써 자신의 개혁정책을 변호하던 서남표 총장도 결국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서 총장은 네 번째 자살 소식이 전해진 7일 저녁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상황이 어찌나 다급했는지 홍보팀에서는 출입기자들에게 기자회견 소식을 불과 20분 전에 통보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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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총장은 이 자리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차등 수업료제’를 뼈대로 한 자신의 개혁정책을 상당 부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가을학기부터는 모든 학부생에게 4년간 수업료를 면제하고, 연차를 초과하는 학생들에 한해 수업료를 받겠다는 것이다. 또 과학고·영재고 출신 학생 위주에서 일반계고와 전문계고까지 입학생들이 다양해지면서 획일적인 교과과정을 더는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는 점도 인정했다. 신입생의 기초 필수과목인 물리·화학 등 5과목이 일반계고와 전문계고 학생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안겼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셈이다. 나아가 카이스트는 학부 교육 전반에 대한 ‘대수술’도 준비 중이다. 그 윤곽은 오는 5월께 나올 것이다. 이균민 교무처장은 “성적에 따라 수업료를 매기는 정책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했다”면서도 “처음 이 제도를 도입했을 때는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는 점을 애써 강조했다.

카이스트 제도 수술의 결과는?

좀처럼 ‘소용돌이 정국’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카이스트의 인터넷 게시판 ‘아라’(ARA)에는 서 총장의 학교 정책을 비판하는 글이 가득하다. 켜켜이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셈이다. 지난 4일부터 본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인 이아무개(10학번)씨가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이씨는 경기 부천의 한 일반계고에서 학생회장을 맡은 바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요.” 그는 지난 7일 동기생인 박씨의 자살 소식을 들은 뒤 밤새 고민에 부대끼느라 한잠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대자보를 내건 허아무개(09학번)씨도 용기 있게 자신의 뜻을 당당히 밝혔다. 그는 기자에게 “경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서로 여유가 없어 고민이 있더라도 나누지 못하는 삭막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게 문제”라며 “학점에 따라 모든 걸 평가받는 건 잘못됐다”고 말했다.

지금 카이스트는 ‘수술대’를 향하고 있다. 김진형 전산학과 교수는 총장의 독선이 드러낸 폐해가 너무 크다고 지적한다. “서 총장이 바꾼 제도들은 그 자체로 문제지만, 맘대로 제도를 밀어붙이는 과정이 너무나 황당했다. 기존에 있는 교수들을 바보 취급하면서 ‘부족하다’거나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하는데 40년 동안 카이스트가 명성을 지켜온 것은 서 총장 이전부터 재직한 교수와 학생들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생 진아무개씨는 “서 총장의 정책 가운데 긍정적인 것도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학부생한테 경쟁 원리를 바로 도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자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학생들이 학점을 잘 주는 강의로 몰리는 게 더 문제다. 이러면 자기가 잘할 수 있고 익숙한 것에만 갇히게 된다”고 짚었다.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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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총장의 다음 행보를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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