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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로 새긴 평화의 조감도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고문·분신 겪은 서승 교수 정년퇴임…

동아시아 평화·인권 위한 실천적 모색은 끝나지 않아
등록 2011-03-31 16:37 수정 2020-05-03 04:26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부분에서 눈길이 멈췄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인권·평화운동가인 서승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해 한국과 일본에서 출간된 정년기념문집 에 실린 그의 인사말 가운데 한 대목이다.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평범한 할아버지가 됐을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겸양의 표현이다.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도, 그의 삶은 신산하고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싸우면서 공부하고 사람을 모으고 일을 벌이는 서승의 본질은 변함없었을 테니까.

서승 일본 도쿄 리쓰메이칸대학 교수.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서승 일본 도쿄 리쓰메이칸대학 교수.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기구한 운명이 만든 ‘예수의 얼굴’

서승 교수가 언급한 ‘기구한 운명’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을 마친 서 교수는 ‘나’를 찾아 1968년 한국에 온다. “우리말도 역사도 문화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누구인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도쿄와 서울에서 공부하던 기간은 1961년 쿠데타 이후 1963년부터 8년을 집권한 박정희의 3선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치열하던 때였다. 서 교수는 1971년 4월18일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그가 어떤 ‘시나리오’에 엮여 있는지 깨닫고 죽음을 선택한다. 열흘 뒤인 4월27일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박정희의 상대 후보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집권세력을 긴장시킬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가던 김대중이었다. 서 교수는 분신으로 야당 후보에게 용공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던 시도에 맞섰다. 서 교수와 동생 서준식씨는 이듬해 발표된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의 주동자가 된다.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보안사의 연행과 고문, 그리고 감금 상태에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몸에 경유를 붓고 불을 댕기는 과정은 1990년 출소 이후 펴낸 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글로 옮기는 것조차 참혹할 정도다. 그 사고 직후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지인들이 “예수의 얼굴, 5·18 민중항쟁과 찢겨진 우리 민족의 모습”(함세웅 신부), “열전과 냉전으로 불타는 한반도의 상징, 반목과 증오 그리고 불신으로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이라고 표현한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낙관한다. 그리고 낙천적이다.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었기에 “(출옥 이후) 동서남북 종횡으로 떠돌아다니며 세상을 입체적이고 역사적으로 볼 수 있게 됐”고 “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수난이 응집된, 감옥이나 출옥 후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은 물에 담근 미역처럼 부풀어올라 잃어버린 19년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넓은 네트워크를 만드는 밑천이 됐다”고 자평한다.

세계의 관심받던 양심수, 세계로 시야를 넓히다

지난 3월26일 서울 남산 옛 안기부 청사(현 서울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정년퇴임식 겸 출판기념회에 앞서 서 교수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났다.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을 감옥에서 보낸 회한과 원망이 없는지 다시 물었다.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법학부 교수가 된 것도, 이후 평화와 인권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그 분야의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도, 재일동포라기보다는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도 옥중 19년 덕분이다.”

서 교수는 편안한 표정으로 “1970∼80년대는 한국 전체가 큰 감옥이었다. 난 작은 감옥에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비전향 장기수를 포함해 여러 운동의 중심적 분들과의 만남은 이후 연구와 사회적 활동의 밑천이 됐다”고 덧붙였다.

서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사형(1심)과 무기징역(2심 뒤 상고 기각으로 대법원 확정)을 선고받는다. 1973년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한다. 모진 고문과 이에 맞선 분신,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 그리고 오랜 수감 생활은 “재일조선인 사회와 조국의 모순에 분개하는 정의감과 사명감, 권력에 맞서는 기개가 있던” 20대 젊은이를 세계가 관심을 갖는 인권의 상징으로 키워놓았다. 국제사회가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그가 언제든 기구한 운명의 끈을 놓아버렸더라면, ‘자신의 참혹했던 경험을 개인적 비극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확산시키는 동력으로 승화시킨 의지의 소유자’라는 평가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1991년 출옥 직후 적극적인 석방운동을 벌인 전세계 기관·단체에서 강연을 요청받았다. 일본과 미국·유럽·남미 등지에서 그는 몸과 말로 삶을 증언했다. 또 국제인권운동에 눈을 떴다. 진보적 학풍으로 유명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버클리)에서는 객원연구원으로 머물면서 한국의 고문을 반대하는 운동단체(Stop Torture in Korea)를 만들어 활동했다.

1994년 정치범들의 수난 현장을 둘러본 대만 방문은 그의 관심과 시선을 일본과 한국 테두리 바깥으로 넓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만에서 시작한 동아시아 식민지배와 국가폭력의 현장을 찾는 여행은 일본 오키나와, 제주, 중국 옌볜으로 이어졌다. 이 여정은 지난 2월 일본에서 출간됐고 오는 6월 창비에서 펴낼 에 오롯이 담겼다.

“동아시아란 무엇인가, 식민지 그리고 냉전 분단체제에 지배당해왔던 동아시아의 민중이란 누구인가를 탐구해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전쟁과 침략, 국가테러리즘으로 점철된 ‘미·일 중심의 지역지배질서’를 ‘민중 중심의 지역질서’로 바꾸고 항구적인 평화를 실현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배자만 갖고 있던 ‘조감’

1998년 리쓰메이칸대학 법학부 교수로 임용될 즈음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테러리즘’을 주제로, 1997년 2·28 사건(국민당 정부의 강압적 통치에 대한 항쟁) 50주년의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제주 4·3 사건 50주년(1998), 오키나와(1998),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2000), 교토(2002), 여수(2002)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연다. 여러 지역의 냉전과 국가폭력의 피해자, 연구자, 활동가가 모여 증언을 하고 답사를 했으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과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잘 몰랐다. 냉전과 국가폭력을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엄은 한국과 대만에서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보상이 법제화로 이어지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이런 연대 활동은 2005년부터 불붙기 시작한 동아시아 공동의 야스쿠니 반대운동(‘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으로’ 캔들 행동)으로 이어졌다.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맨 오른쪽)가 2006년 8월13일 일본 도쿄에서 야스쿠니신사를 반대하는 한국·대만·일본의 시민 200여 명과 함께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맨 오른쪽)가 2006년 8월13일 일본 도쿄에서 야스쿠니신사를 반대하는 한국·대만·일본의 시민 200여 명과 함께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서승 교수는 “지배하는 자는 조감(Bird View)을 갖고 있는데 지배받는 동아시아 민중은 냉전의 벽과 국경으로 분단되어 뿔뿔이 흩어져 공통의 ‘말’을 잃은 채 미국과 일본의 일원적 지배권력에 대한 유효한 공동전선을 펴지 못한 채 분할 지배돼왔다”고 본다. 그의 인식과 실천이 다른 이들과 비슷하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대목이다.

지난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단체는 1910년 강제병합 100년을 의미 있는 해로 만들기 위해 분주했다. 일본의 진지한 사죄와 과거 청산 의지를 끌어내고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서 교수는 큰 틀에서 동의하면서도 100년의 상징성에 주목한 이런 움직임이 자칫 조약의 불법성 논의로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고종이 도장을 찍고 비준 과정을 거쳤더라도 그런 병합조약은 인정할 수 없다. 일본의 침략은 1875년 강화도 사건에서 시작했고 식민지배는 1905년 러일전쟁 때부터 이미 시작됐다. 홋카이도, 오키나와, 대만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지배라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국 병합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제국주의 시대의 법도 절차적 면에서 적법성이 있다면 합법적인가라는 논리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럴 경우 한국보다 15년 전에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적법’하게 일본 영토가 된 대만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주권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왕이나 황제 독재자가 자의적으로 결정한 조약의 유효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서 교수는 주장한다.

올해 한국 나이로는 예순일곱, 적잖은 나이지만 그의 열정은 정년퇴임 뒤에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의 시선은, 서구 제국의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가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는 점을 천명한 ‘더반 선언’(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반인종주의, 차별 철폐 세계회의’에서 채택) 10주년을 향해 있다. ‘동아시아판 더반 선언’에 해당하는 ‘동아시아 역사·인권·평화 선언’을 만들 계획이다. 2009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동아시아의 시민사회 및 학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수백 개에 달하는 항목을 검토하고 조정하는 중이다.

‘동아시아판 더반 선언’ 위해 매진 중

“식민지 지배는 더반 선언에서 확인됐듯이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다. 다른 민족과 국가를 지배하고 노예화하는 것은 대량학살과 마찬가지로 반인도적 범죄라는 맥락 속에 병합 문제를 봐야 일회성 성토로 끝나지 않는다. 서구 500년의 세계 지배, 일제의 140년 동아시아 지배를 짚으면서 사죄와 배상, 재발 방지라는 과거 청산이 성실하게 이뤄지는 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향한 전제임을 확인하고, 동북아의 협력과 공동체 방안에 관한 논의가 나올 때마다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문서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 계획이다.”

서 교수는 “이번 일본 대재앙으로 차질이 우려되지만 오는 9월 도쿄에서 ‘동아시아 선언’ 보고집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고민하는 그에게 여느 때보다 불안해진 한반도 정세에 대해 물었다.

“군사적 대결을 우려하던 가운데 결국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긴장이 지속되다 보면 우발적 충돌도 불행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긴장 자체가 시민에게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준다. 이런 긴장 상태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생각하면 두렵다. 북의 체제 변환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확대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처럼 대화를 통해 하루빨리 풀어야 한다.”

스스로는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자위하지만, 분단의 굴레에 청춘을 빼앗긴 ‘실천하는 지성’의 충고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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