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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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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희생자들 우롱하는 대법원

인혁당 등 조작사건에 대한 국가배상금을 1·2심보다 대폭 깎아…

재심 거쳐 무죄받았는데 다시 민사재판 재심 청구해야 하는 피해자들
등록 2011-02-24 11:21 수정 2020-05-03 04:26

재고합, 재노, 재도….
법원의 형사사건 가운데 판결이 이미 확정됐지만 다시 따져볼 이유가 있어 거듭 심리하게 되는 사건엔 ‘재’(再)가 붙는다. 지방법원은 대개 ‘재고합’, 고등법원은 ‘재노’, 대법원은 ‘재도’란 말로 재심 사건을 분류한다. 법원의 기존 판결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심리를 거친 뒤 다른 결론의 선고를 내릴 가능성이 높기에,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기까지는 엄격한 심리를 거친다. 선배 판사들의 기존 판결을 뒤집는 일이기 때문이다.

빼앗기고 짓밟힌 삶, 누가 보상하나
2000년대 후반부터 재고합·재노 사건이 심심찮게 법원 재판 일정에 등장하고 있다. 대개 ‘과거사’ 사건이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인혁당, , 아람회 등 유명한 사건들이 재심 과정을 거쳐 수십 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름 없는 개인이 고초를 겪은 사건은 더 많다. 유신 시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은 이부터 일본에 갔다왔다는 이유만으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계 간첩으로 몰려 고문받은 이, 고기를 잡다가 납북된 뒤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외려 간첩으로 몰린 이까지 다양하다.

» 2009년 6월 납북 귀환 어부 서창덕씨가 그를 간첩으로 무고한 주민들과의 화해 자리에서 울고 있다. 한겨레 이종찬

» 2009년 6월 납북 귀환 어부 서창덕씨가 그를 간첩으로 무고한 주민들과의 화해 자리에서 울고 있다. 한겨레 이종찬

재판 일정에서 ‘재’가 들어간 사건명을 보면 담당 취재진은 일단 긴장한다. 법정에 들어가면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에 엘리베이터식으로 급하강 충격을 주는 고문, 성기에 전기를 흘려보내는 고문까지 끔찍한 얘기가 판사 입에서 쏟아진다. 마지막 그 입에서 “무죄”라는 낱말이 나오면, 입을 꼭 다물고 피고인석에서 조용히 있던 머리 하얀 이들이 ‘끄억끄억’ 울기 시작한다. 소회를 묻는 인터뷰가 시작되고, 기자들도 운다. 어떤 기자는 눈물 맺힌 게 쑥스러운지 고개를 못 들고, 어떤 기자는 판결문을 받아적는 노트에 우두둑 눈물을 떨어뜨린다. ‘인터뷰 잘해야지’ 하고 참는데 그게 쉽지 않다.

10~20분의 짧은 인터뷰에서 만나는 삶은 더더욱 상상 불가다. 이중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이수근씨의 간첩 행위를 도왔다는 이유로 20년 넘게 징역을 살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씨의 처조카 배경옥(73)씨.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간첩죄로 형을 살았다는 사실을 비관하다 자살했다. 그의 여동생은 이 사건으로 이혼했으며, 육군 중위이던 남동생은 전역 조처를 당했다. 민청학련 사건을 취재하러 왔다 간첩으로 몰려 역시 징역을 산 일본 기자 다치가와 마사키(66). 사건의 충격으로 아내는 정신병을 얻었고,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세 살배기 아들은 물에 빠져 숨졌다. 병을 앓던 다치가와의 아버지는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다 재심 선고도 보지 못한 채 숨졌다. “아직도 동네 사람들은 날 간첩으로 안다”며 “이제 자식들에게 당당히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늙은 어부, “사건 뒤로 친척들도 모두 나를 피해 고향 한 번 못 가봤는데 이번 명절엔 갈 수 있게 됐다”는 노인도 있다.

이렇게 빼앗기고 짓밟힌 삶을 누구로부터 보상받을까? 미천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당시 “수사기관에서는 (무죄라고 얘기해봐야) 안 되겠구나 싶어” 기소된 뒤 “판사님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 드디어 법정에서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을 한 것”이라고 털어놓았으나 유죄를 선고한 판사는 고위 법관이 됐고, 유명한 변호사가 됐다. 국회의원이 된 당시 공안검사,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법원 간부를 하고 있는 당시 사건 담당 배석판사도 있다. 하여 잊었을지도 모른다. 간첩 배경옥, 간첩 다치가와 마사키, 간첩 서창덕(납북 어부), 사형수 조용수( 사장)….

 

대법원, 이자 계산 기간 대폭 축소

재심 무죄판결 뒤에도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피해자들이 대다수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말고는, 보상받고 위로받을 도리가 없다. 물론 쉽지 않다. 검찰은 형사 재심과 달리, 민사소송의 경우 예외 없이 항소하고 상고해왔다. 무죄가 많아지며 근래에는 형사 재심 역시 항소·상고로 맞서지만, 민사 소송건에 대한 불복은 당초 검찰의 방침이기도 하다. 명예를 회복해줄 수는 있어도 돈은 내줄 수 없다는 태도다.

결국 대법원이 국가배상을 판결한 여러 사건의 원심 판결을 모두 파기했다. 지난 1월이다. 쟁점은 ‘위자료를 뒤늦게 지급하는 데 대한 지연손해금의 기산점(적용 시점)을 언제부터 잡을지’였다. 기존 판례는 ‘불법행위 때부터’였다. 고문과 가혹행위 등 잘못이 발생한 때부터 배상 판결이 이뤄진 때까지 연 5%의 이자를 계산해 총배상액이 산정돼왔다. 1·2심을 맡았던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에서 배상 금액은 그렇게 책정돼왔다.

대법원은 배상액이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스스로 “불법행위가 없었더라면 피해자가 그 손해를 입은 법익을 계속해서 온전히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채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공평의 관념에 비춰, 불법행위 때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해야 한다”고 ‘원칙’을 밝히고서도 ‘예외’를 둬야 한다고 했다. “(불법행위 발생 시점으로부터) 장시간이 경과해 현저한 과잉 배상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이유다. 지연손해금 기산 시점을 30∼40년 전 불법행위 발생 때가 아닌, 해당 손해배상 소송을 낸 뒤 변론이 종결된 때로 봐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이자가 없어지게 됐다. 조용수 전 사장의 유족 등 사건 관련 피해자 10명은 1·2심 판결 결과 100억원가량을 보상받을 수 있었으나, 3심 뒤 30억원으로 대폭 줄었다. 이자가 700억원 안팎에서 2천여만원으로 준 탓이 크다. 다른 사건 피해자들도 상황이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중대한 모순을 품고 있다. 고등법원 판결들은 대개 “불법행위 때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된다는 사정까지 고려해” 당초 위자료를 산정했다. 이자가 많을 것을 감안해 위자료 자체는 적게 잡았다는 말이다. 나 아람회 사건 피해자, 납북 어부 서창덕씨 등은 그런 논리와 그렇게 산정된 원심의 배상 금액을 수긍했다. 상고를 하지 않았다.

대법원도 알고 있다. 판결문에서 “불법행위 때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되는 걸 전제로 위자료를 산정해 결과적으로 합계액이 대폭 줄어들게 된 사정을 고려해볼 때 위자료 원금 액수 자체는 다소 적다고 볼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원고들이 (적은 위자료 액수 자체에 대해) 불복하지 않아 그 부분까지 파기(하고 새로 산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상급 법원은 하급 법원 판결에 대해 당사자가 불복한 부분만 다시 심리할 수 있다는 법 논리에 따른 것이다.

» 2005년 12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이 내려진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족이 울음을 터뜨렸다. 한겨레21 김정효

» 2005년 12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이 내려진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족이 울음을 터뜨렸다. 한겨레21 김정효

 

국가가 준 배상금이 ‘빚’이 된 이들

이렇게 액수가 깎이다 보니 국가로부터 이미 받은 배상금이 ‘빚’이 돼버린 이들까지 속출한다. 2심 단계에서 배상금을 ‘가집행’받은 이들이다. 법원은 ‘인혁당’ 피해자 등의 청구를 받아들여 3분의 2 정도의 금액을 가집행 형식으로 미리 지급받도록 했다. 피해자들은 이 돈으로 평생 도와준 은인에게 신세를 갚았다. 일부를 공익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이를 다시 국가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1·2심 손해배상 판결을 얻어낸 피해자들이, 아직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 다른 고문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를 돕고 고문 치유 모임 등을 하자며 돈을 모아 만든 재단들의 진로에도 지장이 생기게 됐다.

대법원 판결을 두고 법조계의 해석은 갈린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이미 장시간이 흘러 고문을 가한 이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권리를 구제하기 위해, 국가배상이 일종의 징벌적 의미를 지닌다는 측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위자료 산정 등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연손해금을 불법행위 때부터 기산하는 건 기본이라고 본다.

반면 한 변호사는 “법리적으로도 수긍이 가고, 국가가 그간 져왔던 부담을 생각할 때도 대법원이 합리적으로 정리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동안 일부 보수 매체에서는 “이자 문제로 국가의 배상 금액이 너무 커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내왔다.

“국가 부담이 크다고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를 축소할 게 아니라, 잘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고문을 한 보안사 수사관, 검찰 공무원 등 실제 잘못한 이들을 추적해 배상 금액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논리다. 국가배상법에는 공무원의 잘못으로 인한 위법행위로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하게 됐을 때 해당 공무원에게 그만큼을 환수할 수 있다는 구상권 규정이 있다. 하지만 국가는 ‘과거사’ 사건에서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

 

“죽기 전에 모든 소송을 마치고 싶다”

과거사 피해자들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사건 유족과 납북어부 서창덕씨가 먼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2월11일이다. 재심 청구는 더 늘어날 기세다. 형사사건에서 어렵게 재심을 청구해 항소·상고를 거쳐 무죄가 확정됐는데, 이번엔 민사에서도 재심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이자 시점 기산에 대한) 그 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는 것임에도 전원합의체가 아니라 전원의 3분의 2에 미달하는 대법관만으로 구성된 부에서 심판한 것은 민사소송법의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대법원 민사 재심 사건에는 ‘재다’가 붙었다. 대법원이 청구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를 결정하게 될지, 그래서 다른 결과를 받아낼 수 있을지,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들은 다시 법적 다툼을 이어가게 됐다.

오는 2월24일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의 유가족은 대법원 앞에서 재심 개시와 국가의 구상권 행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인생 복판을 누명으로 잃고, 말년에 재심과 재심을 거듭하며 ‘죽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서고 있다. 피해자들은 “죽기 전에 모든 소송을 마치고 싶다”고 말했다.

송경화 기자 한겨레 법조팀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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