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요….”
나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가로젓던 여직원은 노트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검정색 뿔테 안경을 한 번 매만졌을 뿐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매물 정보가 담긴 노트를 빠르게 넘기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 돈으로 아파트는 어렵죠. 이쪽 지역은 아무리 작은 아파트라도 최하가 2억원 이상은 된다고 봐야 해요.”
“25년 된 아파트 전세, 2억원은 줘야”
2억원. 평생 그런 돈을 만져본 적이 없어서 2억원의 가치를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보증금 1억2천만원보다 많은 돈이라는 사실은 안다. 아직 갚지 못한 은행 빚도 2천만원이 넘게 남았다. 추가 대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2억원은 무리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서울 마포에서 1억~1억2천만원짜리 전세 아파트를 찾았다. 열패감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아파트를 향한 미련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마포 현대아파트인가요. 지은 지 좀 된 것 같던데, 거기도 어려울까요.”
“22평짜리가 있는데, 그것도 1억8천만원에서 2억원은 줘야 해요. 그런데 나와야 말이죠. 물건이 아예 없어요.”
지하철 5·6호선 공덕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마포 현대아파트는 올해로 지은 지 25년째 되는 낡은 아파트였다.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교통이 불편해 인기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아파트 전세 수요가 워낙 많다 보니 낮은 층에 있는 전세 매물도 씨가 말랐다. 마포 현대아파트보다 나아 보이는 중앙하이츠아파트나 태영아파트는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두 번째 방문한 ㄱ부동산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마포 주변에서 1억2천만원짜리 방 두 개 아파트 전세를 구한다는 말에 ㄱ부동산 주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1억2천만원이면 마포가 아니라 서울 어디에서도 아파트 전세는 어려울 거예요. 빌라도 1억5천만원은 줘야 들어갈 수 있는데요. 방 두 개짜리 신축 빌라는 1억8천만원이 넘는 곳도 많아요.”
‘1억2천만원짜리’ 가난한 30대 신혼부부를 위해 ㄱ부동산에서 권유한 것은 전세자금대출이었다. 대상 주택이 전용면적 25평형(85㎡) 이하일 경우, 연소득 3천만원 이하의 무주택 세대주라면 연 4.5% 이자로 최고 6천만원까지 국민주택기금 전세자금대출을 활용할 수 있다(2월8일 현재). ㄱ부동산 관계자는 “다들 이렇게 전세자금대출을 받고 산다”고 덧붙였다. 당장 대답할 수 없었다. 월급은 빤한데 또다시 빚을 낸다면 내 집 마련의 꿈도 그만큼 늦어진다. 빌라나 다세대주택이라도 적당한 물건이 나오면 연락을 달라는 말만 남기고 ㄱ부동산을 빠져나왔다. 2월8일 저녁, 마포의 겨울바람은 차가웠다.
‘전세난민’. 치솟은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서울 도심에서 외곽으로, 아파트에서 빌라로, 그래도 안 되면 집 크기까지 줄여가며 이곳저곳 떠돌아야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2월9일 부동산정보업체 닥터아파트 조사 결과를 보면, 수도권의 평당(3.3㎡) 평균 전세 가격은 2009년 3월 459만원에서 현재 536만원으로 평균 76만2천원이 올랐다. 2년 전 30평형(100㎡)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간 세입자가 재계약 시점인 지금 그 집에 좀더 살고 싶다면 평균 약 2300만원을 올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전셋값 상승폭이 가장 큰 서울 서초구의 경우 2009년 3월 평당 795만8천원에서 1037만4천원으로 241만6천원이 올랐다.
보증금 모자라면 반전세로 내몰려2년 만에 큰 폭으로 오른 전셋값을 치를 돈이 있다면 당신은 선택받은 사람에 속한다. 마음이 따뜻한 주인을 만나 보증금을 올려주지 않고도 2년을 더 살 수 있다면 당신은 당장 로또를 사도 좋다. 그렇지 않은 대다수 전세난민은 비워야 한다. 살고 있는 아파트와 더 좋은 집을 향한 욕심과, 어쩌면 자존심까지 모두 비워야 한다.
다음날인 2월9일 오전 좀더 효율적으로 집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 문의를 먼저 해보기로 했다. 서울 서초구·강남구와 함께 전셋값이 가장 많이 오른 송파구를 두드렸다. 인터넷 검색창에 ‘잠실+부동산’을 입력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잠실부동산 ㅂ공인’ 전화번호를 눌렀다.
“제가 가진 돈이 1억에서 1억2천만원 정도인데요, 잠실 지역에 들어갈 만한 전셋집이 있나요. 방 두 개짜리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1억2천만원이오? 그 돈으로 방 두 개짜리는 없어요.”
“아, 아파트가 그렇다는 건가요.”
“아파트가 아니라 다른 것도 방 두 개짜리는 못 구해요.”
잠실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도 괜찮다고 했다. ㅂ공인에서는 알아본 뒤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 ㅂ공인의 전화는 없었다. 따뜻하게 어설픈 희망을 안겨주기보다 냉정하게 정직한 편이 낫다.
ㅅ부동산에서는 잠실본동은 물론 석촌동과 삼전동, 송파동까지 시야를 넓힌다면 공동중개 시스템을 활용해 최대한 물건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조건만 맞으면 다른 부동산에 나온 물건이라도 소개해주겠다는 뜻이었다. 1시간 뒤 연락이 왔다. 다세대주택 가운데 1억1천만원짜리 하나와 1억5천만원짜리 두 개를 구해놓았다는 설명이었다. ㅅ부동산 주인을 만난 건 이날 오후였다.
“요새 방송에서도 많이 봤겠지만 전세가 좀 귀한 편입니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빌라나 다세대주택 모두 마찬가지죠. 전셋값 상승세도 당분간 이어질 테니 크게 하자가 없으면 일단 계약을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오전에 물색해놓은 1억5천만원짜리 다세대주택 전세 가운데 하나는 그사이 이미 계약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ㅅ부동산 주인과 함께 처음 찾아간 곳은 석촌동의 방 두 개짜리 다세대주택이었다. 걸어서 5분이면 석촌호수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반면 주방 싱크대 일부가 불에 그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벽면 타일 일부도 깨진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14평에 미치지 못하는 전용면적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곧이어 살펴본 송파동 1억1천만원짜리 전셋집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과장을 섞지 않고 말한다면, 송파동 물건은 1억1천만원이 아니라 1100만원라 해도 살고 싶지 않을 만큼 우울했다. 싱크대는 <tv>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낡았고, 누런 벽지는 들떠 있었다. 신기하게도 집 안 모든 실내등의 덮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구만 앙상했다. 방은 두 개였는데, 문턱마다 칠이 지저분하게 벗겨져 있는 것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신 보증금 5천만원 이상만 걸면 나머지 금액은 월세로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보증금 5천에 월세 60만원,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바로 보증부 월세, 혹은 반전세였다.
검은 곰팡이 꽃 핀 집도 1억3천만원
치솟은 전셋값에 왼쪽 뺨을 얻어맞아야 하는 것이 전세난민의 서글픈 처지라면 반전세에 마저 한쪽 뺨을 내줘야 할지 모른다. 식구 수가 많아 규모를 줄이기 어렵고, 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동네를 떠날 수도 없어 반전세로 내몰리는 것이 상당수 전세난민의 초상이다. 반전세가 많아진 이유는 낮은 은행 금리 때문이다. 은행 이자가 낮으니 전세 보증금을 굴리는 것보다 월세를 받아 챙기는 편이 집주인에게 유리하다. 1억1천만원짜리 전셋집이 ‘5천에 60’ 반전세로 돌아설 수 있는 이유도 그랬을까. ㅅ부동산 주인에게 물었다.
“이 집 보증금이 원래 1억1천만원이었나요.”
“그건 저희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100% 올렸다고 보면 됩니다. 보증금을 올리거나 월세로 돌리고 싶으니까 원래 살던 세입자를 먼저 내보냈겠죠.”
전세 물량이 부족하기로는 종로구도 만만치 않았다. 1억2천만원으로 방 두 개 전세를 찾는다는 말에 수송동의 ㅈ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는 종로구 대신 용산구 서계동에 딱 하나 있다고 말했다. 종로나 광화문으로 가고 싶으면 1억4천만~1억5천만원은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거라도 보고 싶다며 매달렸다.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온다면 그 정도 수준이라고요.”
나름대로 발품을 팔았지만 이튿날인 2월10일 오전까지 2박3일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둘러본 전셋집은 모두 8개였다. 가장 저렴한 전셋집은 방 세 개짜리 서울 마포구 공덕동 다세대주택과 종로구 누하동 방 두 개짜리로, 보증금 1억원이었다. 공덕동 전셋집은 창문을 열면 곧바로 시장이라는 결정적 단점이 있었다. 누하동 집은 1층인데다 워낙 비좁아 이사할 집 후보에서 제외했다.
방 두 개를 갖춘 마포구 신수동의 신축 빌라와 종로구 누상동의 방 세 개짜리 빌라는 보증금이 각각 1억2천만, 1억3천만원이었다. 전용면적은 둘 다 13평 남짓이었다. 두 집 모두 실내 곳곳에서 검은색 곰팡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심한 결로의 흔적이었다. 종로구 전셋집을 소개해준 ㅌ부동산 대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정도 결로가 발생하는 곳이라면 지을 때부터 하자가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하지만 전셋집이 이렇게 없어요. 저희랑 공동으로 중개하는 부동산이 몇 곳 있는데, 집 좀 보러 가겠다면 평소와 달리 다들 오지 말래요. 그만큼 물건이 귀한 거죠.”
서울 하늘 아래 ‘1억2천만원짜리’가 둥지를 틀 수 있는 방 두 개짜리 전셋집이 과연 있을까? ㅌ부동산 대표의 설명이다. “금액을 2억원 이상으로 올리지 않는 이상 종로나 마포 지역에서 마음에 드는 전셋집 찾기란 어려울 거예요. 꼭 1억2천만원에 방 두 개를 구해야 한다면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중랑구나 노원구, 혹은 은평구 쪽으로 가실 생각을 하셔야 해요.”
변방의 변방으로 밀리는…
아파트에서 빌라나 다세대주택으로, 그리고 다시 도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이 전세난민의 법칙이라더니 내 처지가 딱 그랬다. 1억2천만원짜리 방 두 개 전셋집 구하기를 당분간 단념한 2월10일 오전, 송파구 ㅅ부동산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나아 보였던 석촌동의 1억5천만원짜리 다세대주택이 그사이 나갔다는 소식이었다.
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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