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소 앞 벽에 하얀 종이가 붙었다. “안녕히 가세요.” “편히 가세요.” 추모객들이 빼곡하게 글을 적었다. 지난 12월7일 저녁, 벽보 앞에 선 초등학교 1학년 류성민군도 인사를 남겼다. 소년은 죽은 사람에 대해, 무엇보다 죽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또박또박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로 적었다. “사고 없이 잘 다녀오세요.”
첫걸음에 달려온 ‘사우디의 제자’
아이의 인사에 비해 어른의 인사는 재미가 없다. 명복을 빈다는 뜻으로 화환을 보냈는데, 자리가 없어 꽃은 말고 이름표만 떼서 빈소 벽마다 붙여놓았다. 정치인·언론인·문화인·종교인·운동가·기업인과 그 단체 이름 100여 개가 빈소에 가득하다. 임재경 초대 부사장, 김명걸 전 사장, 신홍범 전 논설위원, 권근술 전 사장, 최학래 전 사장, 성유보 전 편집국장 등 창간 주역들이 매일처럼 빈소를 지켰다. 4일장의 마지막 밤인 7일 자정까지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 특1호실에는 2452명의 조문객이 방명록에 제 이름을 적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국 식당을 운영하는 손순호(53)씨의 이름이 방명록 제일 첫 자리에 있다. 5일 새벽 3시, 부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장 먼저 달려왔다. “선생의 책에는 허튼 글자가 단 하나도 없어요. 헙수룩한 글을 쓰면 곧바로 죽어나가는 시대였으니,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을 들이대면서 압박했던 거죠. 선생의 이론보다 그 기개, 진정한 기자의 혼에 매료됐어요.”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사람마다 저 혼자 간직한 감격의 기억이 있다. 이름을 남기지 않고 몸만 다녀간 이까지 더하면 물경 5천여 명이 리영희 선생의 마지막 길에 인사를 드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 수가 성에 차지 않는다. 날짜가 바뀌어 8일 새벽 1시, 상갓집에는 서너 무리만 남았다. 고은 시인,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김세균 서울대 교수, 강내희 중앙대 교수, 여균동 영화감독, 시민운동가 임수경, 편집인 곽병찬 등도 한 무리를 이뤄 늦은 술을 마셨다. “386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선생님한테 모조리 세례받은 놈들이…, 밤새 북적거려도 모자랄 놈들이….”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누군가 그 말을 말렸다.
죽은 리영희 선생보다 4살 적어 올해 77살인 고은은 “소설 쓰는 윤정모가 농사를 지어 나하고 리영희한테 쌀 한 가마니씩 보내줬는데, ‘나는 괜찮으니 리영희한테나 보내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우스개 섞어 들려줬다. 그러더니 노래를 부른다. “조용히, 나지막하게 부를게.” 늙은 시인은 얼굴의 주름을 겹겹이 짓누르며 을 불렀다. “나아르을 버어리이고호 가아시는 님으흐은 시입리이도오 모옷 가아서어 바알벼엉 나안다아….” 시인은 검은 안경을 벗어 옷섶으로 눈가를 닦았다. 건너편 테이블에선 이름 모를 반백의 문상객이 혼자 술잔을 거듭 비웠다.
리영희 선생을 대표하는 저작은 다. 등에서 외신부·정치부 기자로 일한 선생은 신문에 미처 쓰지 못한 국제 정세 관련 평론을 여러 잡지에 수시로 실었다. 그 글을 모아 1974년 출간된 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탈냉전 흐름을 분석하고, 한반도에 잔존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박정희의 종신 집권 프로젝트였던 ‘유신 체제’가 시퍼런 칼을 갈아 양심세력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고 주리를 틀어버리던 시절, 리영희는 반공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그로 말미암아 인식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젖힌 이들이 1970년대 중·후반과 80년대를 거치며 이른바 ‘재야 운동권’으로 성장했다. ‘사상의 은사’라는 칭송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칭송에 걸맞은 문상이 아쉽다는 탄식이 서너 무리의 술자리에서 번지는 동안 새벽이 왔다.
부르는 것만으로 힘이 되었던 선생
동이 온전히 트기도 전에 영결식이 시작됐다. 8일 아침 7시, 병원 영결식장에 200여 명이 모였다. “다들 MB 시대에 떠나가시네요.”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조용히 기자에게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등이 이명박 대통령 치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던 무렵인 지난해 7월 인권연대 창립 10주년 강연에서 리영희 선생은 “이명박 통치 시대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고 평했다. 의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지난 8월 다시 인터뷰했는데 “검찰·경찰이 하는 것을 보면 파시즘 초기 단계를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리영희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가을이 되자 간경화가 악화돼 혼수상태에 빠졌고, 지난 5일 자정을 넘겨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 거둬들였다.
선생과 함께 를 창간한 신홍범 전 논설주간은 “(선생을 통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영결식에서 말했다. 초창기 논설위원을 지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고 같은 자리에서 말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선생이 사신 세월은 모질고 험난했으나, 당신이 외친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고 온몸으로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잇따라 나오는 감격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추도했다. 관을 옮겨 운구차에 싣는 동안 누군가 을 불렀다. 모두 따라 불렀다. 젊은 사람은 드물었고, 중년 또는 노년의 입으로 ‘임’을 불렀다.
이날 하루 종일,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 흘리는 때와 방식이 달랐다. 부인 윤영자씨는 영결식장을 빠져나오며 입을 막고 조용히 흐느꼈다. 장남 이건일씨는 화장장에서 눈밑을 닦았다. 광주 망월동에 도착했을 때, 임수경씨의 눈이 벌겋게 충혈됐고,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은 참담한 얼굴로 봉분을 바라보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장례식장 앞에서 담배만 피웠다. 지난해 이 무렵, 오 국장은 선생의 팔순 잔치를 마련했다. 원래는 행사를 크게 치르려 했는데 선생이 말렸다.
“사람이 스스로 족함을 알아야 한다. 그런 행사를 하면 끼는 사람도 있고 못 끼는 사람도 생기는데, 그런 번잡한 일로 패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선생의 말을 오 국장은 기억한다. 대신 몇몇이 모여 평양냉면을 먹었다. 그때만 해도 리영희 선생은 맥주나 막걸리를 조금씩 마셨다. 병이 깊어 술을 아예 못 마시게 됐어도 “자네들 술 마시는 걸 보고 싶다”며 손님들에게 술을 권했다. 선생은 시대를 말할 때 엄했으나, 술을 나눌 때 따뜻했다.
오전 9시40분, 운구차가 수원 연화장에 도착했다. 유아무개 할머니, 정아무개 할아버지, 김아무개 할아버지의 유골이 ‘화장 중’이라고 연화장의 전광판에 나와 있다. 죽음에는 저마다의 무게가 있으므로 유족은 저마다 울었다. 리영희 선생도 그들의 뒤를 이어 1천℃ 불꽃에 내맡겨졌다. 유리창 너머로 관이 들어가고 이내 커튼이 닫혔다. 화장장 사람들은 화장하는 모습을 일일이 보여주진 않았다. 영정 앞에 사과·배·곶감·밤·대추를 놓고 유족은 기다렸다. 손자와 손녀들은 초와 향을 피워놓은 앞에서 저희들끼리 놀았다. 아이들은 저희들의 방식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단신 처리 , 주사파 매도
그의 마지막 길을 는 단신으로 처리했다. 는 6일치 이정훈 논설위원의 칼럼에서 (리영희 선생이) “중국과 베트남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고, “‘주사파’가 활개 칠 수 있는 공간을 더 넓게 만들었”다며 “종북세력인 ‘리영희 키즈’는 도처에서 상황 반전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적었다. 1989년 북한을 방문한 임수경(43)씨는 1992년 봄, 청주 여자교도소에서 받아든 리영희 선생의 편지를 지금도 갖고 있다. “수경군, 무슨 일에서건 한 가지 고정된 방식을 집착하는 것은 교조이기도 하지. 교조는 인간정신의 미이라화를 뜻하지. 소련 공산주의와 동구라파의 현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북한의 획일주의 역시 정신적 미이라화의 일면이지 않겠나?”
리영희 선생은 한 번도 마르크스주의, 마오주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거나 설파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을 지배하는 반공주의의 장막을 걷어내려 애썼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했다. 반공주의가 아닌 일체의 것을 종북주의로 몰아세우는 야만과 폭력에 맞섰던 리영희 선생을 반세기 전의 반공·반북주의 ‘교조’를 빌려 부관참시하는 세상이 다시 왔다. 논설을 참칭하는 가소로운 잡설을 방치하는 후배의 무능과 무기력이 오직 원통할 뿐이다. 선생은 1971년 ‘기자 풍토 종횡기’에서 기자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출입처에 나가면 대통령·장관·국회의원들과 동격으로 행세한다. 이렇게 되면 지배계층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논설위원이 되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 맡기기를’ 따위(의 논리)가 아무런 내적 저항감 없이 나온다.”
에 함께 입사한 동기 대부분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인 대통령의 그늘 아래서 정치인으로 변신했지만, 리영희 선생은 언론 밖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나 자신의 직업에 미쳐 지냈다”고 말했다. 다른 기자들이 요정에서 술 마시고 촌지를 챙길 때, 그는 미국·영국·프랑스 대사관을 돌며 외교문서를 파냈다. 영어·프랑스어·일어·중국어를 독학하고, 국제 정세를 종과 횡으로 엮는 특종과 평론을 쏟아냈다. 그를 투사로 만든 것은 시대였을 뿐, 그가 매진한 일은 오직 진실 보도였다.
마지막 소원, 아내와 앙코르와트 여행화장장 전광판 글자가 바뀌었다. ‘화장 중’이라 적힌 붉은 글씨가 ‘수골 중’으로 변했다. 오전 11시26분, 부인 윤영자씨는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장의 부축에 기댔다. 1987년 여름, 정태기 전 사장은 리영희 선생과 서울 어느 목욕탕에서 만났다. 맥주를 마시며 새 신문 창간을 의논했다. 1970∼80년대 해직기자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있던 참언론의 꿈은 이듬해 5월 창간으로 빛을 보았다. 인생은 희한하고 이상하다. 정 전 사장의 기억에서 그것은 어제 일과 같은데, 유리창 너머의 리영희 선생은 하얀 뼛가루가 되었다.
분골기가 ‘윙’ 소리를 냈다. 십수 초 만에 한 줌의 하얀 가루가 나왔다. 알루미늄 그릇에 담긴 가루는 깔때기를 거쳐 하얀 유골함에 담겼다. “이제 다 끝났어요.” 정태기 전 사장이 귓속말을 했다. “그래요, 다 끝났네요.” 부인 윤영자씨도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울었다. 2007년 대장암이 발견돼 수술까지 받은 몸으로 부인은 선생의 병간호를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난 리영희 선생은 “아내와 함께 앙코르와트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래요, 갑시다.” 부인 윤영자씨도 남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그런 말벗이 없다. 부인은 울음을 울 기력이 없었다. 부인은 아파 신음하듯이 울었다.
선생은 1980년 5월,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5월 광주항쟁의 배후로 지목됐다. 고문을 받다 척추를 다쳤다. 사람들은 그가 ‘5·18 유공자’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지만, 선생은 망월동에 묻히고 싶다고 늘 말했다. 광주로 향하는 길가에서 남도의 초목은 푸른 옷을 다 벗어버렸다. 남도의 땅은 붉은 흙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남도의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후 4시, 전남도청을 지나 국립 5·18 민주묘지에 들어섰을 때, 서쪽 하늘에 해가 떴다. 하루 종일 숨었다가 기다렸다는 듯 구름을 헤집고 나타났다. 추모식이 시작되자 해가 다시 들어가고 사위가 온통 어두워졌다. 안개비가 내리더니 장대비로 바뀌고 이내 진눈깨비가 되었다. 번개는 보이지 않는데 천둥이 자꾸 우르릉댔다. 사람들은 슬픔 이전에 추위에 떨었다. 폭이 두 뼘, 너비가 다섯 뼘, 깊이가 세 뼘 되는 석관에 유골함을 앉히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밝아졌다. 묘역 뒤편 솔숲 위, 북쪽 하늘부터 구름이 걷혔다. 천지신명이 선생의 마지막 길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 뜻을 사람들은 제각각 짐작할 뿐이었다.
석관의 뚜껑이 닫히고 흙을 삽으로 떠 뿌렸다. 컴퓨터 엔지니어인 맏아들 건일씨, 의사인 둘째아들 건석씨, 주부인 딸 미정씨가 차례로 흙을 떴다. 리영희 선생은 해양대학에서 항해학을 전공했다. 자식들은 각각 전자공학, 의학, 생물학을 전공했다. 선생은 말년에도 자동차 운전을 즐겼다. 평생 방송을 싫어했지만 병상에서도 은 꼬박꼬박 챙겨봤다. “인간이 나오는 이야기는 싫고, 동물은 괜찮다”고 선생은 농담처럼 말했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막아서지 않았던들, 선생의 가족은 자연과학을 논하며 평온하게 살았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분들이 빈소를 찾아 아버지를 만난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가 집 안보다 집 밖에서 인기가 더 많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에게 아버지가 심어놓은 게 무엇일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시절을 산 것일까 며칠 동안 생각했다”고 딸 미정씨는 전날 저녁 7시, 이화여대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말했다. 말년의 리영희 선생은 “집사람과 가족에게 너무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안겨줬다”며 안타까워했다. 두 아들과 외동딸은 선생의 말년을 번갈아 지키며 부자·부녀간에 쌓인 서운함을 모두 털어냈다.
삿된 뜻 없던 지식과 양심의 독재자
자식들의 차례가 끝나서야 부인 윤영자씨가 삽을 잡았다. “여보, 당신이 원하는 광주에 묻었어요. 편하게 가세요.”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윤씨가 말했다. 부인 윤씨의 옥색 목도리가 삭풍에 흩날렸다. 봉분에 떼를 입히고 망월동 묘역을 빠져나오는 길에 윤씨의 얼굴은 조금 편해졌다. 아홉 번 끌려가고 1012일 동안 감옥에서 지냈고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 쫓겨나는 동안, 식구들은 전셋집을 옮겨다녔다. 노년에 이른 1994년에야 경기도 군포시 산본 수리산 기슭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하고 부부는 번갈아 병마와 싸웠다. 부인 윤씨는 당분간 연희동 아들·딸 집에서 머물 계획이다. 광주의 식당에 모여 뜨거운 두부 국물에 저녁을 먹으며, 윤씨는 추모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지성과 양심으로 지어 올린 철옹성에서 리영희 선생은 삿된 뜻이 없는 독재자였다. 이에 버금갈 후배가 없어 오랫동안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상의 은사에게 묻고 또 물으며 길을 구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누군가 시대의 전환을 막아서는 우상과 싸워야 할 테지만, 후배 언론인·지식인은 황망하여 제 앞가림도 힘들다. 그래서 소년은 아주 가시지 말고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했나 보다. 저녁 뉴스에서 기자들은 예산안이 날치기 통과됐다고 보도했다. 누구의 무엇이 잘못인지는 가려 말하지 않았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온통 어둠이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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