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제2, 제3의 천신일도 나오나

‘MB의 절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구속영장…

검찰은 ‘청부수사 기관’ 오명 벗고 또 다른 권력층 비리에 칼 겨눌까
등록 2010-12-09 15:24 수정 2020-05-03 04:26

지난 10월18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장. 박우순 민주당 의원이 김준규 검찰총장에게 “천신일씨가 피의자냐”고 물었다. 통상 법무·검찰의 수뇌는 국회의 대정부 질문이나 국정감사에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답하지만, 김 총장은 의외로 “그렇다”고 순순히 시인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천 회장을 “소환 (통보)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50년 ‘절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을 검찰이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데는 이렇게 검찰 수장의 입을 빌려야 했다.

청탁 대가 45억원 증거 확보

검찰에 소환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지난 12월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협력업체인 임천공업 대표에게 청탁을 받고 도움을 주는 대가로 43억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다. 연합

검찰에 소환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지난 12월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협력업체인 임천공업 대표에게 청탁을 받고 도움을 주는 대가로 43억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다. 연합

‘천신일 사건’의 연원은 정치권에서 나온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연임 로비 의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우조선해양의 남 사장이 연임 과정에서 정권 실세에 줄을 댔고 그중의 한 명이 천 회장이라는 의혹이었다. 1979년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대우조선해양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 남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3월, 3년 임기의 사장에 취임했다. 대우조선은 공적자금이 투입돼 산업은행이 대주주 역할을 하고 사장 임명권은 사실상 정부가 쥐고 있던 ‘주인 없는’ 회사였다. 남 사장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뒤 이전 정부 때 선임된 기관장의 상당수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2009년 2월 연임에 성공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3개월 뒤인 5월 이 사건의 내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일단 판을 벌여놓았으나 핵심을 치고 들어가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정기인사로 수사팀 구성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7월 검찰은 천 회장의 세 자녀가 임천공업 계열사의 비상장 주식 26억원어치를 갖고 있는 사실을 포착했다. 임천공업은 남 사장의 연임 로비 비자금 창구로 지목됐던 대우조선해양의 협력업체 중 하나였다. 1년 동안의 내사 끝에 수사 단서 하나가 어렵사리 잡힌 셈이었다. 이어 검찰은 지난 8월10일 경남 거제시에 있는 임천공업과 이수우 대표 등 임직원들의 집 등 10여 곳을 압수수색했다. 남 사장 연임 로비 의혹과 관련해 범위를 좁혀 정밀 타격에 나선 것이었다.

검찰은 수사를 통해 이 대표가 회삿돈 356억원을 횡령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 돈의 행방을 좇았다. 자금 추적 결과 대우조선 쪽으로 건너간 돈은 없는 반면, 천 회장에게 지속적으로 거액이 건너간 사실이 확인됐다. 15년 전부터 교류해오며 천 회장을 알게 된 이 대표는 경영자문료 명목으로 천 회장에게 현금을 건네고 천 회장이 투자 명목으로 샀다는 임천공업 계열사 주식대금 26억원도 다시 돌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천 회장이 서울 북악산 중턱에 짓고 있는 돌박물관에는 12억원어치의 철근을 기부하는 등 이 대표는 천 회장에게 45억원어치의 현금과 현물을 건넸다. 자수성가형 기업가로 의리가 있고 입이 무겁다는 이 대표는 검찰이 자금 추적과 주변 조사를 통해 물증을 들이대자 이 돈의 대가성을 인정했다고 한다. “은행 대출 청탁, 산업은행의 임천공업 계열사에 대한 출자전환, 그리고 부산지방국세청에서 하던 임천공업 세무조사를 서울지방국세청으로 변경해 무마해달라는 로비 명목으로 천 회장에게 돈을 건넸다”는 진술이었다. 공무원이나 금융기관 임직원의 직무와 관련해 청탁 대가로 돈을 받으면 성립하는 알선수재 범죄였다. 검찰은 이 대표를 구속 기소하기 이전에 이미 천 회장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과 진술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연평도 포격으로 어수선한 틈 타 입국

그러나 천신일이 누구인가. 천 회장은 이 대통령과 고려대 61학번 동기로 50여 년 우정을 자랑하는 ‘절친’이다. 2007년 3월 고려대 교우회장에도 당선된 뒤 천 회장은 동문들의 지지를 한데 모으고 선거전략을 조언하는 등 이명박 정권의 창업공신 노릇을 했다. 2008년에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구명에 나선 점이 확인돼 구설에 오르고 기소까지 됐지만 이 대통령은 그해 여름 청남대에 천 회장을 불러 휴가를 같이 보내면서 두터운 신임을 보여주었다.

거물을 겨눈 검찰의 행보는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서울중앙지검은 9월15일 이 대표를 구속 기소하면서 약식 브리핑을 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간부는 본격 수사 착수의 단초가 된 이 대표와 천 회장의 주식거래에 대해 “범죄 혐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천 회장에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이 간부는 “천 회장 부분은 설명을 하면 의혹이 확 풀릴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이어 “천 회장을 조사한 바도 없고 앞으로 보겠다는 것도 깊게 들어갈 게 아니고… 아직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어서 조금 더 검증할 게 있다”고 말해 의례적인 수준으로만 언급했다.

검찰의 연막은 천 회장의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난 뒤에도 계속됐다. 9월 말 천 회장이 이 대표에게 금품을 받았다는 첫 보도가 나왔지만 서울중앙지검의 간부는 “대부분 소설”이라고 일축했다. “천 회장의 형사처벌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검찰 간부들의 얘기까지 언론에 보도됐을 때도 서울중앙지검의 공식 입장은 “이 대표 구속 기소 이후 아직까지 크게 진척된 내용은 없다. 천 회장 소환 조사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방침이 없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뒤 검찰이 만든 새로운 공보준칙에 ‘수사 내용 공개 금지’를 명문화했지만, 서울중앙지검의 이런 태도는 공개 금지 수준을 넘어 ‘역정보’ ‘거짓말’에 가까웠다. 특수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천 회장이 대통령 친구이다 보니 보강 증거를 마련해 혐의 입증을 더 확실하게 하려고 그런 것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큰일’을 치려고 암중모색하던 검찰에 언론의 적극적인 보도는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어려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 회장을 소환하려고 보니, 그는 이미 한국 땅에 없었다. 검찰이 임천공업을 압수수색하고 수사망을 좁혀오자 8월19일 일찌감치 미국으로 출국한 것이다. 천 회장 쪽은 “처리할 업무가 있고 허리디스크 치료차 나갔다”고 설명했고, 천 회장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했다. 검찰은 “10월 안에 사건을 마무리하겠다”며 귀국을 종용했지만 천 회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범죄인인도를 통한 강제송환 가능성이 거론됐으나 실제로는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범죄인인도는 양국에서 공통으로 처벌할 수 있는 ‘쌍방가벌성’ 범죄에 한해 이뤄지는데, 일반인이 공무원이나 은행 임직원의 업무와 관련한 청탁과 함께 돈을 받는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알선수재죄는 미국과 일본에는 없었다. 천 회장이 ‘버티기’로 일관하면 그를 데려올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권력층 비리 제보 줄 이을 것”

이런 상황에서 김준규 검찰총장의 “천신일은 피의자”라는 발언이 나왔다. 대통령의 ‘절친’인 천 회장이 수사 대상으로 ‘인증’된 셈이었고 수사팀에는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그로부터 10일 뒤 검찰은 천 회장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버티기’에 들어간 천 회장에 대한 압박용이었다.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천 회장을 꼭 처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천 회장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입국했고 12월1일 검찰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찰은 천 회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로 천 회장은 이제 ‘영어의 몸’이 될 위기에 처했다. 비록 개인 비리이기는 하지만, 수십억의 돈과 현물이 천 회장만을 보고 건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최측근을 구속함으로써 “검찰이 정권의 청부수사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혐의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변호사도 “MB 측근 ‘3인방’ 중 한 명인 천 회장이 쓰러지고 나면 관련 제보가 줄을 이을 것”이라며 이번 수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아직 2년이 더 남아 있다. 제2, 제3의 천신일이 나올 것인가. 검찰은 언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김태규 기자 한겨레 법조팀 dokbul@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