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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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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아이를 자라게 한다

등록 2000-08-16 00:00 수정 2020-05-02 04:21

풍요의 시대, 정체성 잃는 아이들… 가정교육과 체험 학교를 통해 ‘부족함’을 선물하라

거름을 주려면 뿌리 먼곳에 주라. 어느 선각자의 잠언도 철학자의 명언도 아니다. 농사짓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뿌리 가진 식물을 키우는 요령이다. 뿌리 가까운 곳에 너무 많이 거름을 주면 손쉽게 영양분을 얻어낸 벼는 가뭄과 홍수에 쉽게 쓰러진다.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뿌리를 뻗던 벼라면 태풍과 비바람이 몰아쳐도 제몸을 지탱할 힘을 갖게 마련이다.

우리의 사회와 가정은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제몸을 지탱할 힘을 기르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일까.

풍요의 새장 속에 갇힌 새

“엄마는 철마다 옷도 최고급으로 골라 사주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준다. 대신 다른 것은 신경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요구한다. 나는 꼭 새장에 갇힌 것 같다. 내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을 내 힘으로 해보고 싶다.”

지난 7월 방학과 함께 가출한 고1 여학생 현아(가명·16)가 집에 남긴 편지의 일부분이다. 현아의 가족과 상담했던 한국청소년상담원 이호준 상담사는 이 경우를 두고 “걸을 수 있는 아이를 억지로 보행기에 태워 정체감을 잃게 만든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설명한다. “남들은 돈이 없어 공부도 못하는 마당에 부족한 것없이 다 해주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부모의 의식에 가장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담원에 기록된 또다른 경우를 보자.

중학교 때부터 전교 1등을 줄곧 놓치지 않았던 고1 남학생 준태(가명·16)는 어느 날부터인가 시험강박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준태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미치겠다. 불안하다보니 실수도 잦아지고 집중력도 자꾸 떨어진다”고 고통을 호소해 왔다. 알고보니 준태의 부모는 학과 두 과목과 바이올린 등 과목당 300만원씩 하는 고액과외를 줄곧 시켜왔다. 너무 넘치게 주는 바람에 되레 교육에 역효과를 일으킨 경우이다.

두 사례는 극단적인 경우에 속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라나는 아이를 둔 가정에서 이런 불행한 사태를 막을 안전판을 지닌 집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너나 할 것없이 제 아이를 최고로 키우려는 세상이다. 돈있는 집은 돈으로, 돈없는 집은 돈을 만들어서라도 아이에게만큼은 부족할 것없이 해주려고 안간힘이다. 방학만 되면 기승을 부리는 조기유학 열풍도 이처럼 ‘넘치게 주는’ 풍토와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다.

이런 속에서,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이지만, 아이들에게 ‘결핍’을 가르치려는 부모와 교사들도 적지 않다. 이번엔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자.

서울 신당동에 살고 있는 영재(10·흥인초등학교 4년)는 요즘 점심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집 근처 유락사회복지관 어린이도서관으로 달려간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출근’하는 셈이다. 영재는 책을 좋아하지만 엄마는 책을 사주지 않는다. 한달 용돈이 1천원인 영재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책을 보기 위해선 몇백원씩 하는 도서대여점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 궁여지책으로 찾아나선 게 어느덧 생활이 됐다. 영재네 집은 스물일곱평쯤 되는 전세 아파트다. 평범한 살림규모다. 엄마와 함께 쓰는 영재의 공부방에는 흔한 로봇 장난감 하나 없다. 하지만 영재는 자기집이 부자라고 여긴다. 냉장고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컴퓨터도 있기 때문이다.

텃밭을 일구며 여름방학을 보낸다

영재네가 용돈에 대해 비타협적이라면, 안산시 고잔동에 사는 주윤(10·초등 4년)·주형(9·초등 3년)이네는 타협적이다. 아빠와 엄마는 집안일을 하는 대가로 용돈을 준다. 주윤·주형 자매의 용돈벌이는 신발장 정리, 방청소와 책상정리, 식탁에 수저놓기, 꽃나무 물주기 등이다. 지난해까지도 주윤이와 주형이는 “왜 다른 집 아이들은 자기방 청소 안 하고, 수저 안 놓고도 용돈을 받는데 우리만 일을 해야 하냐”고 불평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친구들이 1만원짜리 지폐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부럽지 않단다. 집안일에도 취미를 붙였다. 언니 주윤이는 “용돈도 벌고 재미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영재의 엄마 김재희(41)씨와 주윤·주형이 부모 김용환(42)·유정미(38)씨 부부는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은 ‘부족함’이라는 것. 아이들이 양육되고 교육되지 않고, ‘비육(肥育)’되는 현실에 문제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비육은 아이들이 많이 먹어 살찌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집에 안 쓰는 학용품이 넘치는데 또 새로 나온 학용품을 사주는 것, 아이에게 규모 이상의 용돈을 주고 학원교육 과외교습을 무리하게 시키는 것, 명절이면 사달라는 대로 비싼 장난감을 사주고 휴가철이면 일년 동안 못 놀아준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앞다투어 위락시설 행락시설을 찾아 떠나는 것, 이런 것들이 이들 부모가 생각하는 비육의 모습이다. 영재 엄마의 교육철학은 궁극적으로 “어떤 난처한 상황 속에서라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주윤·주형이 부모는 “세상에 공짜가 없고, 지금 남부럽지 않게 누리는 생활은 엄마, 아빠 노동의 산물이라는 걸 아이들이 느끼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여름에 부쩍 늘어난 각종 체험학교 중에도 ‘부족함’의 미덕을 가르치는 곳이 적지 않다. 각종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환경캠프, 농사캠프 등도 같은 맥락이다. 저마다 다른 주제를 앞세우고 있지만, 각종 체험들은 아이들에게 지나침보다는 부족함을 느끼게 해 스스로 땀흘려 채워나가는 법을 익히게 하자는 쪽으로 목적이 모아진다.

8월3일 오후 경기도 화성 야마기시 공동체 마을. 87년에 만들어진 이래 꾸준히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 공동생활을 해온 이 마을 사람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닭을 치고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 들머리에 낯선 얼굴이 보인다.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러 온 이지영씨, 김혜경씨 가족이다. 뜨거운 햇볕에도 아랑곳 않고 아이들은 들판에서 메뚜기 잡느라 뒹굴며 놀고 있다.

전주에서 왔다는 이지영(33)씨는 내년에도 이곳으로 휴가를 올 계획이라고 한다. 두 아들에게 공동체 마을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 훌륭한 ‘휴가나기’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두세살쯤 되는 아이들이 음식을 흘리고 주물럭거리면서도 혼자 밥과 간식을 먹고, 제 또래 꼬마들도 어른들과 함께 제 몫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는 건 교육효과도 있어 일석이조라고 여긴다. 엄마는 가급적 아이에게 제 스스로 뿌린 만큼 거두는 자연의 섭리를 자주 느끼게 하고 싶어한다.

돈 안주는 엄마 때문에 ‘왕따’ 당하기도

“얼마 전 큰애 기범이가 유치원 친구들에게 받은 생일선물 보따리를 풀다가 내심 뜨끔했어요. 온통 비슷비슷하고 유행하는 장난감들로 꽉 차 있었어요.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아요. 무엇이든 쉽게 얻고 지천으로 널려 있다면, 아이가 장난감이든 먹을거리든 귀하다고 생각하겠어요.”

기범이 엄마는 기범이 아빠와 의논한 끝에, 아이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그것이 롤러브레이드든 로봇이든 최소한 일주일이나 보름가량은 시간을 둔 뒤에 사주기로 했다. 대신 아이는 그동안 부모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삐치지 않기, 동생 돌봐주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밥 남기지 않기 등이다. “제가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아이가 원하는 걸 안 해주기가 매우 힘들어요. 아이들이 물건 귀한 줄 모른다고 하지만 부모인 우리 역시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게 사실이잖아요. 부모가 아이에게 넘치지 않게 꼭 필요한 만큼만 해주는 데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부모의 마음가짐도 문제이지만 집에서만 될 일은 아니다. 아이들의 또래문화와 학교문화가 부모의 소신있는 교육을 발목잡는 경우도 많다.

서울 연희동에 사는 유선희(39)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미국에서 나서 2학년까지 다니다 서울로 온 딸이 반에서 ‘왕따’를 당하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고 유씨는 어이가 없어졌다. 지난 봄 어린이날을 앞두고 반 학부모 모임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아이들에게 팬시학용품이 골고루 든 가방을 선물하자는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김씨는 웬만한 아이들이 학용품이든 용돈이든 넘치게 쓰는 마당에 굳이 그런 선물을 할 필요가 있겠냐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런데 그뒤로 ‘자기만 고고한 척, 잘난 척’하는 엄마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 아이들이 경원시했다고 한다. 평소 터무니없이 비싼 준비물이나 교재문제로 학교에 몇 차례 의견을 전하기도 했던 유씨는 이미 ‘튀는’ 엄마로 찍혀 있던 터였다.

“요즘에 주머니에 1만원짜리 지폐를 넣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대요. 우리 딸은 세차하는 대가로 한달에 5천원씩 용돈을 받거든요. 학원비나 레슨비를 대주는 것도 감지덕지하던 딸아이가 언제부턴가 그 돈으로는 친구들하고 어울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어요. 부모는 자기가 필요한 걸 당연히 다 해주는 존재로 여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에요.”

유씨는 미국에서 살 때는 헌옷 얻어다 입히고, 쓰던 장난감 얻어 쓰고 하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느 틈에 그런 것도 딸아이에게는 스트레스란 걸 알게 됐다.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또래 정서에 비춰보면 자기가 너무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닐까 판단이 잘 안 된다고 말한다.

‘부족한 생활’을 훈련시켜라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아이들이 용돈을 버는 일은 당연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공연하게 ‘펀드 레이징’(자금조달)이라는 이름으로 가가호호 방문해 초코렛을 팔고, 자동차 세차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권장된다.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베이비시터, 캠핑 보조원으로 일하는 모습도 흔하다. 이들이 돈을 버는 목적은 주로 여행이나 전축, 컴퓨터 주변기기, 프로그램, 운동기구 등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다. 친구들과 떠나는 견학여행을 위해 기부금을 걷으러 다니는 아이들을 보는 일도 드물지 않다. 가정 분위기도 뒷받침 해주지만 지역의 각종 복지관이나 시민단체, 학교 등에서 일자리를 적극 주선하고 권장하는 지지기반이 마련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배경에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적응하는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 미국 백인중산층의 정서가 깔려 있기도 하다.

한국청소년상담원 김진숙 상담사는 “서너살 때부터 아이들이 떼쓰면 무엇이든 얻는다는 걸 경험하는 건 아이의 미래나 장래를 위해 심사숙고해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조건으로 우리 아이들은 너무 많은 걸 너무 쉽게 얻는다. 학원비든 컴퓨터든 부모가 무조건적으로 대주기만 하니까 하고 싶은 것을 즉각 할 수 없게 되면 가출해버리는 취약한 정서를 갖게 된다. 아이들이 자기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도록, 최소한 가정에서는 집안일이라도 시켜서 용돈을 벌게 해야 한다.”

유아기 때와 초등학생 시절 ‘부족함’을 체험하는 건, 그것이 영양결핍이나 애정결핍의 문제가 아닌 이상 풍요와 속도로만 치달리는 지금 시대에 어쩌면 가장 필요한 교육일지 모른다. 결핍교육 전도사를 자처하는 광주 충효초등학교 문관식 교사는 “못사는 체험에서 얻는 인성교육 효과는 현장경험에서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몇년 전부터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에서 시행해 왔는데 몇달만 하면 밥 남기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진다. 이런 기초교육은 중등학생보다는 초등학생, 초등학생에서도 저학년으로 갈수록 효과가 크다. 체계적인 연구가 되어 체험학습 정규과정으로 강화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문 교사는 의외로 젊은 부모들일수록 이런 교육방식을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답답해 한다.

한국보육교사회 이경녀(31) 사무국장도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유치원이나 놀이방에서 흔히 할 수 있는, 간식 안 남기기, 먹을 만큼만 덜어 먹기, 종이 뒷면에 그림 그리기, 크레용 말아 쓰기 같은 가장 기본적인 절약마저도 마뜩찮아 하는 부모들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아이들 훈련도 중요하지만 보육교사들은 부모를 이해시키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철학과 소신을 갖고 일을 하는 보육교사들이 많지만, 여전히 다수의 유치원에서는 아이와 부모에게 필요 이상의 물품을 구입하도록 하는 게 사실이다. 유치원복을 물려 입지 못하게 하거나, 색종이든 크레용이든 스케치북이든 필요 이상의 물품을 쓰도록 하는 경우 등이다. 학부모들로서는 속수무책이다.

가정·학교·지역사회가 보조 맞춰야

영재네와 주윤·주형이네는 선물로 들어온 장난감이나 학용품들을 틈나는 대로 지역의 사회복지시설 등에 보낸다. 이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라나면 지금처럼 부모의 뜻을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은 없다는 평범한 사실은 깊이 새기길 바란다고 입을 모은다. 주윤이 아버지 김용환씨는 “아이들이 누군가 넘치게 받으면 그만큼 모자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고 말했다.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가 보조를 맞추지 않는 한 아이들에게 ‘부족함’을 가르친다는 일은 예상외로 어려움이 많다. 가정과 학교에서 조금씩 번지는 결핍교육의 모습들은 저마다 얼굴은 달라도 바람은 하나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공동체 속에서 굳건히 뿌리내리길 바라는 마음. 조금 부족한 속에서 세상을 살아나갈 지혜와 뚝심을 기르도록 안내하는 것만큼 훌륭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한번 '부족해' 보자




'결핍교육' 전도사 광주 충효초등학교 문관식 교사가 권하는 실천사례




부족함 체험내용


부족함 실천방법



  • 밥 한끼 굶어보기
  • 학용품 1가지만 가져오기
  • 용돈없이 견딜 수 있는 날까지 견뎌보기
  • 차 타지 않고 목적지까지 걸어가 보기
  • 양말신지 않고 하루 견뎌보기
  • 배고파도 다음 식사 때까지 참아보기
  • 필수품을 얼마나 오래 사용하는지 알아보기
  • 신발 닳아 못 신을 때까지 신어보기

  • 아이들 스스로 자기가 해볼 실천과제를 정한다.
  • 가족과 친구들이 논의해 상벌규정을 만든다.
  • 주별,월별로 정한 뒤에는
  • 꼭 감상문을 남긴다
  • 다음날 실천내용과 소감을
  • 가족·친구들 앞에서 발표하고 토론한다
  • 주별,월별 지출계획표를 짜고
  • 나중에 결과를 비교해본다.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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