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는 스스로 금연할 것을 다짐하며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금연도시에 이 다짐을 알리고 평생 금연할 것을 서약합니다. 서약자 ○○○(서명).’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동시에 가장 자랑스러운 서약서가 있다면, 바로 이 금연서약서다. 그런데 이 서약서에는 생경한 단어가 등장한다. 보건복지부도, 한국금연운동협의회도 아닌 ‘금연도시’다. 최근 금연도시를 선포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많아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금연도시는 인터넷 공간에 존재하는 온라인 커뮤니티(www.nonsmokingcity.org)다.
금연은 하나의 트렌드다. 길을 가다가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면 “아직도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어?”라고 할 정도로 금연에 대한 인식은 꽤 높아졌다. 하나의 산업이 됐고, 금연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면 그때부터 담뱃값보다 더 많은 돈을 금연에 쓰게 된다. 금연 관련 커뮤니티 중 대다수는 알고 보면 금연보조제 광고 사이트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하지 말자’를 외치는 금연은 커뮤니티로서의 결속력을 갖기 힘들다. 그런데 금연도시는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부터 담배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기운이 감돈다. 단정하고 깔끔하달까.
초등생부터 70대까지, 3만3천 명의 ‘시민들’금연도시는 2002년 ‘금연도시’라는 이름의 금연 보조 프로그램을 개발한 장길석씨의 손에서 시작됐다.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이들이 게시판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만들어졌고, 2004년 자체 도메인을 갖고 사이트로 독립했다. 독립하면서 프로그램 개발자이자 초대 시장인 장씨가 금연도시의 운영권을 시민들에게 이양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호영(아이디 돈에버기법)씨가 시장을 맡아오고 있다. 금연도시 시민은 3만3천 명이다. 시민의 폭은 초등학생부터 70대까지, 학생부터 교수까지 넓다.
금연도시 초창기 멤버로 이번달로 담배를 끊은 지 8년하고도 8개월, 그리고 2주가 지난 정호영씨는 금연도시를 이끌어가는 든든한 기둥이다. 금연도시가 금연자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었던 건 정씨를 비롯한 운영진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다. “금연도시의 가장 중요한 축은 금연을 결심한 이들과 그들의 가족이에요. 가족은 금연의 계기이자 원동력이고 금연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거든요. 저희는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고, 실제 지금 활동하는 회원 중 많은 이들이 가족과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정씨의 가족은 금연도시 활동에 누구보다 열심이다. 금연을 결심한 회원에게 주는 금연서약서를 제작하는 것도 정씨의 아내와 딸이다.
올해로 금연 8년째를 맞은 이민하(아이디 병우아빠)씨와 지난해 9월 금연을 시작한 김병준(아이디 수호천사)씨 가족도 금연도시의 든든한 후원자다.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모임에도 함께 나올 정도다. 김병준씨는 “금연 전에는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피웠다”며 “그동안 수도 없이 금연에 실패했는데 금연도시 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금연을 이어나가고 있어서 가족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병우아빠’라는 아이디를 쓰는 이민하씨는 “아들이나 딸 이름을 아이디에 넣은 회원이 많다”며 “자녀 이름으로 활동하면 쉽게 담배에 손댈 수 없다”고 설명한다.
철저한 신분사회, 6개월이면 나도 왕!금연도시의 또 다른 이름은 ‘인터넷청정도시’다. 온 가족이 보는 사이트를 표방하기 때문에 비속어나 은어, 악플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한다. 상업적 광고 역시 이곳에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서로를 향한 공격이나 비아냥이 난무하는 여타 사이트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게시판에 들어가면 2000년대 초기 인터넷 분위기가 느껴진다. 8년 동안 흔들림 없이 금연도시만의 규칙을 지켜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미션 임파서블’인 금연이 이곳에서는 ‘미션 파서블’이 되는 이유는 뭘까? 25년 흡연 생활을 청산하고 8년9개월째 금연하고 있는 용영선(아이디 선비)씨는 “격려와 용기를 듬뿍 넣은 댓글탕”이라고 답한다. 담배를 끊게 만드는 궁극의 힘은 금연보조제가 아니라 의지라는 뜻이다. 금연도시 게시판에 ‘금연을 시작했는데 금단현상 때문에 힘들다’는 글이 올라오면 그 아래 ‘힘내세요!’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세요’ 같은 무한 격려의 댓글이 15개 넘게 달린다. 김병준씨는 “금연을 시작하면 상실감과 박탈감, 허탈감이 밀려오면서 외로워진다”며 “그럴 때 여기에서 비슷한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마다 금연도시에 들어와 고민을 나누면 담배 생각이 사라진다.
금연도시만의 독특한 문화도 금연을 하는 데 힘이 된다. 금연도시는 철저한 신분사회다. 금연을 막 시작하면 ‘천민’이다. 그렇게 하루를 참아내면 ‘평민’이 되고, 사흘을 참으면 ‘병사’가 된다. 일주일이 지나면 ‘기사’, 열흘이 지나면 ‘기사장’, 14일이 지나면 ‘장군’이 된다. 그렇게 신분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금연 6개월이 되면 ‘왕’이 되고, 1년이 되면 ‘대왕’이 된다. 금연도시의 최고 계급은 ‘신’으로, 금연을 10년 동안 견딘 이에게만 주어진다. 금연도시에 아직 신은 없다. 금연도시가 8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금연 5년을 이어온 ‘황제’는 60명이다. ‘금연 계급 놀이’는 유치해 보이지만 꽤 과학적이다. 신분이 올라가는 시기는 금연에 위기가 오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들은 “금연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고비를 넘겨 신분이 올라갈 때마다 성취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가족이 받쳐주고, 다른 시민들과 고민을 나누고, 신분이 상승된다고 해도 ‘한 까치 귀신’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이곳에서는 금연의 가장 큰 적을 “딱 한 개비만”이라고 유혹하는 ‘한 까치 귀신’이라고 부른다. 2년 넘게 금연을 이어오다 술을 마시고 술김에 담배를 입에 댔다가 금연에 실패하는 이가 부지기수다. 시민들은 이럴 때 흡연 사실을 게시판에 고백하고 자신의 신분을 천민으로 ‘리셋’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렵게 지켜온 자신과의 약속이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한 까치 귀신’에 홀리지 않기 위해 이곳 시민들은 서로에게 ‘즐금’(즐거운 금연)과 ‘평금’(평생 금연)을 빌어준다.
‘금도폐인’이라는 금단현상금연도시의 부작용도 있다. ‘금도폐인’ 증상이다. 담배는 끊었지만 금연도시에 중독됐다는 이가 꽤 자주 목격된다. “담배 생각이 날 때마다 이곳 게시판을 들락거리고, 또 좋은 분들을 많이 알게 되면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게 이들의 진술이다. 그렇지만 꼭 부작용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예전에 담배를 피우는 데 허비한 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요. 예전에는 인상을 쓰고 담배를 피우며 스트레스를 풀었다면 이곳에서는 서로 좋은 얘기를 해주고 웃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금연 결심이 난무하는 연말과 연초가 되면 금연도시는 늘 새로온 시민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이들 중 금연에 성공하는 사람은 10%도 되지 않는다. 금연에서는 ‘선배’인 이곳 시민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금연도시에서 댓글탕 한번 드셔보세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 금연할 수 있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와 금연서약서를 받고 더 끈끈해지면 금연 성공률 100%입니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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