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가에 느티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그 앞으로 푸른 벼가 흔들린다. 20여 년 전, 논 주인들은 나무 심는 걸 반대했다. 그늘이 지면 벼가 자라지 못할 거라고 걱정했다. 젊은 사람들은 당장의 수확보다 앞날의 경관을 의도했다. 그들이 심어놓은 마을 입구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방문객들은 치즈마을 체험을 기다린다. 지난 20여 년 동안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방문객들은 알지 못한다. ‘느티마을’이 ‘치즈마을’로 이름을 바꾼 이유도 알지 못한다. 잠시 뒤, 그들을 태우러 경운기가 올 것이다.
‘마을복지기금’ 아이와 노인을 위해3시간여 체험 방문 끝에 방문객들은 풀이 죽을 수도 있다. 전북 임실군 임실읍 금성리의 외양은 평범하다. 드넓은 초지, 한가로운 젖소, 쾌적한 취락, 낭만적 풍광 등은 치즈마을에 드물다. 비슷한 것이 없진 않지만, 스위스풍의 부유한 낙농마을을 상상한다면 반드시 실망할 것이다. “구경할 만한 건 별로 없다고 미리 말해둬요.” 지난해부터 치즈마을 운영위원장을 맡은 송기봉(58)씨가 멋쩍게 웃었다. 운영위원장은 2년마다 한 번씩 주민 투표로 뽑는다. 송씨는 4대 운영위원장이다.
전북 임실 치즈마을은 치즈 체험 관광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난해에만 3만여 명이 마을을 다녀갔다. 한국 토종 치즈가 있다는 사실이 임실 치즈마을 때문에 알려졌다. 마을 식당에서 치즈돈가스를 먹고, 경운기를 타고 치즈 체험장으로 옮겨 모차렐라 치즈를 직접 만드는 것이 ‘기본 체험’이다. 송아지에게 우유를 주고 목장 초지에서 썰매를 타거나, 산양 젖을 짜고 산양유로 비누를 만드는 등 ‘선택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고 해서 치즈마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치즈마을의 홍보 문안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마을’이다. 치즈마을의 진정한 가치는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있다.
임실 치즈마을 83가구 223명 주민은 2010년을 역사적인 해로 기억할 것이다. 올해 초 ‘마을복지기금’을 처음으로 집행했다. 2008년과 2009년에 걸친 마을 공동 사업 결과, 2억4천여만원의 잉여금을 얻었다. 그 가운데 고정자산 1억1천만여원을 제한 1억3천만여원을 ‘마을 전체를 위해’ 지출하기로 주민들이 합의했다. 고등학생 이하 30여 명에 이르는 마을 아이들의 방과후 프로그램·단체견학·간식제공 등을 위한 아동복지기금, 장차 대학에 진학할 수험생의 등록금 보조를 위한 장학기금, 마을 인구의 30%에 달하는 노인에게 하루 두 끼 이상 제공하기 위한 노인복지기금 등으로 쓰고 있다.
잉여금 가운데 500만원은 ‘지역사회 기부금’으로 쓸 예정인데, “우리보다 더 가난한 마을을 지원하는 데 쓰라고 임실군청에 기부할 계획”이라고 송씨가 설명했다. 최근 부도난 마을 유가공 공장의 손실을 메워주기 위해 3천만원을 책정한 것도 눈에 띈다. “마을 전체를 위해 일하다 개인 사업에 손실이 생겼으니, 그 일부라도 마을의 잉여금에서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마을 초대 운영위원장 이진하(54)씨가 말했다.
임실 치즈마을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마을 스스로 보살피는 복지 시스템을 사상 처음으로 구현했다. 그들의 복지는 어린이·노인은 물론 도산한 마을 주민과 이웃 마을 주민까지 아우른다. 국가의 복지가 후퇴해도 치즈마을의 복지는 전진하고 있다.
‘복지제도’ 이전에 ‘소득분배’가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치즈 체험관까지 방문객을 실어나르는 경운기가 있다. 소 달구지는 어떨까. 소를 모는 일이 쉽지 않잖아. 트랙터는 어때. 그럼 농사는 어떻게 짓겠어. 여러 논의 끝에 마을 주민들은 경운기를 택했다. 이제 10여 대의 경운기를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들이 몬다.
방문객들은 치즈 체험관에서 치즈 얹은 빵을 먹는다. 뒤쪽 주방에서 환갑이 넘은 할머니들이 음식을 준비한다. 다른 할머니들은 마을 곳곳의 쓰레기와 잡초를 치운다. 마을 운영위원회는 이 노인들에게 하루 1만~4만원의 일당을 지급한다. 도시의 지자체가 진행하는 ‘노인자활근로’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것이 있다. 치즈마을 노인들은 ‘스스로 의논해’ 차례를 정해 일한다. 돌아가며 일하는 마을 노인들은 항상 웃고 있다.
치즈마을 운영위원회는 농협 역할도 한다. 주민이 키운 감자·양파 등을 사들여 마을 공동 매장에서 판매한다. 올해만 1500만원어치의 농산품을 수매했다. 주민에겐 안정적 수익을 제공하고, 판매는 마을 차원에서 책임진다. 2009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9억2천만여원 가운데 62.5%에 달하는 5억7400만여원이 이런 방식으로 치즈마을 주민에게 직접 지급됐다. 전체 83가구 가운데 54가구가 마을 사업에 참여해 소득을 올렸다.
치즈마을은 소득을 얻은 주민에게 ‘마을 세금’도 걷는다. 마을 식당 ‘산들미’를 운영하는 주민 박정님(56)씨가 치즈 삼겹살 1만원어치를 팔면, 그 5%인 500원은 마을 운영위원회에 낸다. 마을 회의가 이 식당에서 열리고 주민들은 꼬박꼬박 셈을 치르므로, 돈은 돌고 돈다. 치즈 체험관 주방에서 1시간 동안 일한 한부남(73) 할머니도 1만5천원의 노임 가운데 750원을 마을 운영위원회에 낸다. 바쁠 때는 체험 프로그램이 하루 세 번씩 진행되므로, 할머니는 ‘마을 세금’ 2천여원을 제한 4만원 정도의 일당을 번다.
“그 돈으로 괴기도 사먹고 술도 받아먹지요잉.” 주름이 펴지도록 활짝 웃는 한부남 할머니가 기꺼이 납부한 ‘마을 세금’은 할머니와 그 친구들이 마을회관에서 먹는 하루 두 끼 식사의 비용으로 쓰일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혼자 사는 노인을 위해 치즈마을은 ‘노인이라면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점심과 저녁을 제공한다. 치즈마을에선 어느 노인도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
복지 예산을 제한 나머지 마을 기금은 ‘마을 은행’ 역할을 한다. 주민 누구나 사업 아이템을 내놓으면, 기금운영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자금을 대출받는다. 수천만원의 자금은 이자 없이 원금만 10년에 걸쳐 나눠 갚는다. 마을 식당, 민박센터 등이 이런 방식으로 지어졌거나 지어질 예정이다. 이 모든 일을 일궈낸 치즈마을 사람들, 먼먼 별에서 온 외계인이 아닐까.
1990년대 이후 공동체를 꿈꾸며 시골로 들어간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 적지 않다. 그러나 치즈마을은 그런 ‘귀농 공동체’와 별 상관 없다. 마을 정착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다르지만, 223명 주민 가운데 200명 이상이 1990년대 이전부터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착민이다.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볼까,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고 마을 토박이 이진하씨가 말했다.
마을 앞 임실제일교회에 다니며 심상봉 목사를 따르는 한 무리의 젊은 주민들이 있었다. 1986년 7가구의 부부가 심 목사와 함께 농촌 공동체 공부를 했다. 그 가운데 세 식구가 1987년 ‘예가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치즈마을 초대위원장 이진하씨, 현재 위원장 송기봉씨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각자의 논밭을 모두 합쳐 함께 경작하고, 수입은 하나의 통장에 담아 공동 관리했다. 돈 쓸 일이 있으면 각자 알아서 인출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썼다. “정확히 공산주의 방식이었어요.” 이씨는 웃었다. ‘예가원’은 예수가족원의 줄임말이다. ‘예수가족’은 중국 토착 기독교인들의 모임이다. 혁명 직후, 종교를 탄압하던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보다 더 공산주의적으로 사는 ‘예수가족’ 교인들에게 충격을 받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예가원 공동체의 실험은 3년여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991년 마을의 13가구가 모여 ‘바른농사실천농민회’를 다시 만들었다. 친환경농업을 지향했다. 농산물을 도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전북살림’이라는 조직도 만들었다. 오늘날의 ‘한살림’처럼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려는 실험이었다. 역시 몇 년 뒤 실패로 돌아갔다. 1994년에는 다시 마을의 6가구가 모여 ‘예가족 영농조합’을 만들었다. 친환경 유기농 퇴비 사업을 벌였다. 땅을 살려야 농민이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가구당 8천만원씩의 빚을 남기고 1996년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는 거듭 실패했다”고 이진하씨는 말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너무나 앞서나갔다”고 송기봉씨는 말했다.
진짜 예수처럼 살자고 나섰지만, 이들을 움직이는 힘이 종교인 것은 아니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심 목사 스스로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교인인 것은 아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마을 주민 가운데 기독교인은 10%에 불과하다. 심 목사를 흠모했던 이진하씨도 “교회 나간 지 한참 됐다”며 웃는다. 그러나 이들이 ‘종교적 열정으로’ 살아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송기봉씨는 젊은 시절, 심 목사가 들려준 말을 기억하고 있다. “논두렁에 엎드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면 농촌을 떠나라.”
거듭되는 좌절에도 농촌을 떠날 수 없던 마을 청장년들은 2000년대 들어 중년 또는 노년이 됐다. 이들이 활로를 찾은 것은 ‘마을 체험’을 시작하면서부터다. 2003년 정부로부터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받았다. 문제는 체험의 알맹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특별한 산물도 자원도 없는 빈한한 농촌 마을이었다”고 송씨는 회고했다. 1991년부터 마을에 정착한 김상철(45)씨가 다시 변화를 몰고 왔다. 1995년부터 젖소 7마리를 키우던 김씨는 1999년 작은 유가공 공장을 만들어 요구르트와 치즈를 생산했다. 도시 생협 회원들에게 주로 팔았는데, 까다로운 도시인들은 “정말 유기농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에 착안한 김씨는 2005년 전국 최초의 ‘치즈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방문객이 늘자 마을이 공동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김씨는 기꺼이 운영 방식의 변화와 수입 분배에 동의했다. 김씨 역시 마을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며 심 목사를 따르던 청년이었다. 2007년부터 마을 이름을 ‘느티마을’에서 ‘치즈마을’로 바꿨다. 공동체·유기농·생협의 실험에 실패했지만, ‘치즈 체험’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되살리려는 더 거대한 실험이 시작됐다. 마을의 다른 낙농가들이 힘을 보탰고, 노인들의 경운기가 탐방객을 실어날랐고, 그들을 위한 한정식집·피자집이 생겼고, 산양젖 짜기와 초지 썰매를 타는 체험 프로그램이 새로 탄생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바탕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2003년 만들어진 마을 운영위원회는 2년마다 한 번씩 위원장을 선출한다. 사업·홍보·총무·재무이사 등 모두 14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가 이사회에 참여해 주요 사안을 결정한다. 주민 75명으로 이뤄진 총회는 최고 결정 기구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미성년자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주민이 마을 운영위원회 총회에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회의는 저녁 7시에 시작해 새벽 2~3시 무렵까지 이어진다. 안건에 따라 축산·체험·쌀작목 분과장들이 회의를 이끈다.
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인 것은 아니다. 30여 년에 걸친 자생적 공동체 운동이 이제 결실을 맺고 있지만, 바로 그 안에서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주민 개인의 창의성을 존중해 더 많은 ‘개별 사업’을 북돋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공동 사업으로 공동의 소득을 높이는 쪽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소수의 낙농가에게 초점을 둔 ‘치즈마을’이 아니라, 논밭에서 농사짓는 다수 주민을 위한 ‘새 농촌 패러다임’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개별 사업’ 육성이냐 공동 소득 향상이냐
초대 위원장 이진하씨는 “개인의 창의성을 북돋는 것이 가장 좋은 공동체”라고 말했다. 마을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인 이동훤(50)씨는 “능력 있는 사람이 돈을 벌어 조금 나눠주는 방식을 넘어 다 함께 일해 잘사는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양을 직접 키우며 독자적인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심요섭(43)씨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의욕적인 개인이 사라지면, 우리 마을도 금세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에너지 체험 카페를 준비하는 김정흡(44)씨는 “다양한 사업을 엮어내는 것으론 부족하고, 농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련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말을 끝까지 듣는 것이 위원장의 몫”이라고 생각해온 현직 위원장 송기봉씨는 그래서 근심이 적지 않다. 최근 석 달 동안 마을 이사회가 계속 공전하고 있다. 치열하게 논의해도 합의가 쉽지 않다. 30여 년에 걸친 마을 운동이 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렸지만, 동시에 가장 중대한 고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비감하고 있다. “상품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것이 우리 마을의 핵심입니다. 상품이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지요. 그렇지 못하면 마을 사람 모두 공멸할 겁니다.” 새로운 가치를 마련해야 생산·분배·복지가 가능하다고 믿는 치즈마을 사람들은 오는 10월까지 ‘마을 중·장기 발전계획’을 입안할 계획이다. 하루 200~500명에 이르는 체험객들은 치즈마을의 그런 아름다움까지는 아직 모른다. 아무렇지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농민들이 30여 년에 걸친 거대한 민주 공동체의 실험을 한 번 더 도약시키려는 장대한 드라마를 궁벽한 시골에서 펼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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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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