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의 한 빌딩 화장실. 때때로 누군가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가늘지만 기다란 울음이다. 잠시 뒤면 화장실 문이 열리고 눈이 빨개진 청소 아주머니가 걸어나온다. 김기은(62)씨다. 새벽 5시부터 이 빌딩의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그는 울고 싶을 때면 화장실을 찾는다. 우는 이유는 하나다. 딸 생각이 나서다.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남는다
딸은 2005년 10월1일 살해당했다. 범인은 딸이 6년 동안 사귀어온 남자친구였다. 딸이 스물아홉, 남자가 서른 둘이었다. 딸은 대학 졸업 뒤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됐다. 남자는 좀처럼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결혼 준비는 어려웠다. 남자가 먼저 이별을 통보했다. 3주 뒤, 남자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던 김씨에게 딸은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부엌 창문 너머로 앰뷸런스 두 대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 김씨는 거기에 자신의 딸이 타고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밤 9시가 넘어도 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술을 한잔하고 깊이 잠에 들었다. 밤 9시30분, 김씨는 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딸 이름을 대며 “○○씨 어머니 되시냐”고 물었다. 남편을 바꾸라고 했다. 자는 중이라고 하니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10시가 넘어 다시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아무 설명 없이 지금 바로 주민등록증을 갖고 오라고 했다. 김씨는 남편을 깨워 파출소로 달려갔다.
파출소에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경찰은 그저 “사고가 좀 났다”고만 했다. 파출소에서 신원 확인을 한 뒤 다시 옆 동네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이후 다시 도봉경찰서로 자리를 옮겼다. 갑자기 형사가 부부를 앉혀놓고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죄인 취급을 받자 화가 난 남편이 “뭐하는 거냐”며 항의했다. 형사는 “따님이 죽어서 그런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조서를 다 쓴 뒤에 경찰은 부부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이미 새벽이었다. 부부는 경찰서 앞에서 무너지는 다리를 서로 부축하며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렸다.
남자는 딸을 죽인 뒤 자살했다. 하나뿐인 딸을 잃은 김씨는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다. 집에 있는 성모상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려고도 했다. 남자의 빈소에 찾아가 그 가족에게라도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 쪽은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김씨는 1년이 넘도록 일도 못하고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나간 성당에서 살인피해자 가족모임인 ‘해밀’의 존재를 알게 됐다. 처음으로 모임에 참석한 날, 김씨는 사람들 앞에서 펑펑 울었다. 속이 풀릴 때까지 딸 이야기를 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자신을 추슬렀다. 그러고 나니 남자의 부모가 떠올랐다. 아들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숨어 울 터다. 가해자를 죽이는 것의 허망함에 생각이 닿았다.
딸이 죽은 지 2년 만에 다시 청소일을 시작했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 잠시 그리움을 내려둘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울컥 울음이 올라오면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눈물이 났다. 딸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도 돌아서며 울었다. 딸이 좋아하던 아구찜과 꽃게탕을 먹을 때도 운다. 그래도 마음으로 범인에 대한 증오를 버리고 나니 분노 때문에 괴롭지는 않다. 이제는 남편과 함께 해밀 모임에 참석한다.
피해자 가족모임을 통한 치유
지난 6월21일, 일을 마친 김씨는 연둣빛 정장으로 갈아입고 서울 조계사를 찾았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인권을 위한 살인피해자 가족모임’(Murder Victim’s Families for Human Rights)과 함께 공개 대담을 여는 날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김씨는 자꾸만 준비해온 원고를 만지작거렸다. 모서리가 너덜거릴 때쯤 무대 위로 올라갔다. 돋보기를 쓴 뒤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을 둘러봤다. 한국과 미국의 살인피해자 가족이 함께 대중 앞에서 사형 반대를 이야기하는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씨와 함께 대담을 나눈 이들은 미국에서 온 살인피해자 가족인 버드 웰시(71)와 로버트 컬리(55)였다. 웰시는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 테러로 당시 23살이던 외동딸 줄리를 잃었다. 컬리의 10살짜리 아들 제프리는 1997년 매사추세츠에서 청년 2명에게 납치돼 살해됐다. 당시 청년들은 제프리를 성폭행하려다 반항하자 살해해 강물에 던졌다.
세 사람이 담담하게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강연장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사회를 맡은 공지영 작가도 연방 눈시울을 붉혔다. 웰시는 “딸이 죽은 뒤 너무 화가 나서 붙잡힌 두 명의 테러범에게 사형이 내려지길 바랐다”고 고백했다. 컬리는 사형제를 폐지한 매사추세츠 주정부를 상대로 사형제 부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김기은씨도 분노와 증오에 몸부림쳤다. 그랬던 세 사람이 ‘우리의 이름으로 죽이지 말라’는 주제로 대중 앞에 섰다.
딸이 죽은 뒤 웰시는 매일 술을 마셨다. 알코올중독에까지 이르게 됐을 때 비로소 가해자를 죽여야 한다는 증오와 분노는 자신을 치유하기는커녕 파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폭탄 테러 2주 뒤 한 방송사가 테러범의 집을 찾아가 그의 아버지를 촬영한 장면이 떠올랐다. 카메라를 피하려는 테러범의 아버지는 아주 잠시 동안 슬픈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길로 테러범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웰시에게 “딸 생각에 우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나는 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웰시는 “아들이 사형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얼마 뒤 테러범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가해자가 사형됐어도 내 마음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전세계를 돌며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로버트 컬리는 버드 웰시를 한 대학교에서 열린 사형제 관련 토론회에서 만났다. 당시만 해도 사형제 부활을 주장하던 컬리는 웰시의 이야기를 들은 뒤 변해갔다. 아들을 죽인 범인들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느라 법원을 오가는 사이 사형제 반대의 뜻은 더욱 굳어졌다. 비싼 돈을 주고 좋은 변호사를 고용하면 재판 결과가 달라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인간이 운용하는 한 ‘완벽한 제도’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까닭이다.
웰시는 한국의 살인피해자 가족모임을 만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한국의 살인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면서 놀랐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어려워하더라. 나는 내 딸 줄리가 살해당한 뒤 14년 동안 쉬지 않고 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세계에 줄리가 얼마나 훌륭한 딸이었는지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는 이걸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에서 살인피해자 가족으로서 ‘용서’를 먼저 이야기하기 시작한 사람은 고정원(67)씨다. 지난 7년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2003년 10월9일의 풍경이 수도 없이 반복 재생됐다. 여느 때처럼 부인은 새벽 6시에 출근하는 그를 배웅했다. 당시 그는 서울 강남의 한 빌딩에서 주차관리를 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환갑을 맞을 부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 작은 월급도 아끼고 아끼던 중이었다.
퇴근 뒤 동네 한약방 앞에서 부인과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부인은 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허둥지둥 뛰어 집에 왔다. 문은 잠겨 있었다. 담을 넘어 들어가 맞닥뜨린 집안의 풍경은 처참했다. 팔순 노모와 부인, 4대 독자 아들이 무참히 살해돼 있었다. 이듬해 7월에야 범인이 잡혔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고씨는 끝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성서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8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용서’를 택했다. 유영철의 사형을 막기 위해 법원에 탄원서를 낸 뒤엔 남아있는 가족은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극악한 범죄 앞에 “죽이지 말라”는 호소는 통하지 않았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에는 “얼마 받고 하느냐”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고씨는 “유영철에게 자식이 둘 있는데 그 아이들이 우리 외손자 또래다. 사형은 결국 불행한 가족을 더 많이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영철의 아이들을 돕고 싶었지만 연락처를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용서한다는 말을 들은 유영철은 괴로워했다. 유영철은 편지를 통해 “너무 고통스럽다. 서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고씨에겐 유영철도, 그 아이들도 측은하다.
하지만 숨진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사건이 나고 장례를 치른 뒤 두 딸과 함께 고씨는 온 집안의 핏자국을 제 손으로 닦아야 했다. 모두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현재까지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가족이 많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 8월부터 범죄피해자보호법이 개정돼 국가구조금 혜택 등이 확대되지만 이마저도 피해자가 범죄사실을 인지한 뒤 3년까지만 지급이 된다. 7년 전 사건의 피해자인 고씨는 시효가 지나 지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는 “가족들의 정신과 진료만이라도 지원해주기 바란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난해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고씨 역시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범죄 피해자 지원체계 필요버드 웰시는 “한국에서 범죄 피해자 지원체계가 구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해자조차 체포될 때 미란다 원칙 고지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듣는데, 피해자 가족은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한다”며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독립된 기구가 피해자 인권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우 신부는 “강력 범죄가 발생할 경우 가해자를 사형해야 한다는 여론은 높지만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다”며 “가족을 잃은 고통을 경험한 피해자들이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은씨는 가만가만히 말했다. “미국 피해 가족들을 만나고 또 용기를 얻었어요. 피해자 가족분들, 우리 같이 만나서 얘기해요. 서로 위로하며 당당해집시다.” 해밀은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살인피해자 가족모임 ‘해밀’ 참여 문의 02-953-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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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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