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팔순을 맞는 극단 ‘젠신자’가 조선 병합 100주년에 걸맞은 대형 사고(?)를 쳤다. 1931년 창립된 젠신자는 태평양전쟁 패전 직후부터 문화 혜택이 전무한 노동자·농민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연극 공연을 감행해온, 살아 있는 전설의 극단이다. 이러한 젠신자가 지난 3월23~28일 도쿄도 기치조지의 젠신자 전용극장(500석)에서 일을 벌였다. 일본 극우파인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이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식민지배의 실상을 백주대낮에 무대에 올린 것이다.
야나기다의 ‘흥분’, 도시마의 ‘충격’
원작은 (When My Name Was Keoko- A Nobel of Korea in World War II ). 창씨개명을 비롯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당시의 일상이 조선인 오누이의 눈을 통해 그려진 이 책은 한국계 미국인 베스트셀러 작가 린다 수 박의 대표작이다. 유엔의 ‘제인 애덤스 상’을 받을 정도의 이 수작이 일본에서도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재미 일본인 작가 야나기다 유키코의 ‘흥분’ 덕이다.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야나기다는 이번 공연 첫날 힘을 실어주려고 미국에서 날아왔다. “이 책이 반일 구호 일색이었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있나 싶어 제쳐놓았을지 모르지만, 왠지 끌려 단번에 읽어나갈 정도로 식민지 조선의 묘사가 생생했고, 무엇보다 주인공 승희를 응원하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006년 출간된 책의 감동을 연극으로 승화시킨 주역은 단연 젠신자의 베테랑 연출가 도시마 에이메(77)다. “갓 시작한 한글교실을 마치고 귀갓길에 서점에 들러 이 책을 손에 넣은 뒤 얼마나 떨었는지. 감동을 나누려고 한글교실 사람들에게 권하니까 글쎄, 모두 ‘충격적’이라는 거야. 거의 30~40대인데도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배운 적이 없으니….” 잠시 숨을 가다듬은 도시마의 말이 이어진다. “역사를 알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것이 당연해진 일본의 젊은 세대를 위해서라도 꼭 연극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결국 4년여의 준비 끝에, 그것도 한일합방 100년이라는 역사적 시점에 맞춰, 제대로 된 역사관의 연극을 한번 올려보자는 의지가 실현된 셈이다. 도시마는 태평양전쟁 당시 홋카이도로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과 한 양심적인 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미우라 아야코 원작 (2003), 조선인을 위한 인권변호사였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그린 (2006)에 이어 이번 까지, 이른바 ‘한-일 역사 연극 3부작’을 이뤄낸 셈이다. 특히 이번 연극을 위해 한국 민속자료를 모으고, 경기 수원·경남 함양 일대의 가옥과 서울의 ‘손기정 박물관’을 돌아보는 열성을 보였다. 또한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반도 아동용 (전 8권)과 (전 6권)를 독파했다.
“내가 받은 국민교육과 같은 내용이더라. 권수를 더해갈수록 일본 교육칙어의 정신을 주입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아이들에게 어떻게 황민화 교육을 했는지…. 난 그 교활함에 피가 거꾸로 솟는 걸 느꼈다.”
한쪽에선 ‘한일합방 100년 전시전’공연 기간 중에 젠신자는 관객에게 ‘바른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극장 한 벽면에 ‘한일합방 100년 전시전’도 기획했다. 식민지의 고통을 주제로 한 전시회 내용은 고스란히 팸플릿에도 담겨, 현재 일본의 역사 교과서보다 더 ‘현대사 교과서’답다. 그는 왜 한-일 역사에 관련된 테마에 몰두하는 걸까?
“그야 물론 일본의 평화헌법 9조 때문이다. 평화의 시작은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니까. 식민지배를 받은 당시 조선인의 고통을 모두 담아내는 데는 턱없이 부족해도 한발 한발 다가가는 심정이다. 이건 우리 극단의 사명이기도 하고.”
도쿄(일본)=글·사진 황자혜 통신원 jahye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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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