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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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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순악, 일제에 짓밟힌 소나무 한 그루

1월2일 숨진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 약전…
“영구차 나갈 때 꽃 많이 달아라, 그리고 내가 겪은 일까지 잊지는 마라”
등록 2010-01-14 16:36 수정 2020-05-03 04:25

내 이름은 김순악. 1928년 음력 4월23일에 맏딸로 태어났다. 양력으로 하면 막 모내기 끝낸 6월이다. 10살 되던 해,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했다. 내 밑으로 남동생 둘이 태어난 뒤였다. 옛날에 태어난 가시내들은 다 그런 대접을 받았다. 어릴 때 내 이름은 김순옥. 그런데 “순옥은 안 된다”고 면사무소 직원이 말했다. 간난이, 언년이는 괜찮지만 ‘옥’(玉)자는 양반이 쓰는 귀한 이름이라 안 된다 했다. 아버지는 귀한 이름을 버렸다. 맏딸 이름을 ‘순악’으로 바꿔 적었다. 내 나이 10살에 구슬(玉) 대신 산(岳)의 운명을 새로 받았다.

2008년 여름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가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악 할머니의 모습. 김순악 할머니는 2000년 피해자 인정을 받은 뒤 수요 집회 등에 단골로 참석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2008년 여름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가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악 할머니의 모습. 김순악 할머니는 2000년 피해자 인정을 받은 뒤 수요 집회 등에 단골로 참석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내 별명은 ‘왈패’. 경북 경산 남천면의 사방천지가 내 놀이터였다. 새순이 돋는 봄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여름엔 마을 앞 개천에서 미역을 감았다. 겨울에도 무명 저고리와 바지만 입고 선머슴처럼 들판을 뛰어다녔다. 친구들이 나를 왈패라고 불렀다. 양반집 아이들은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 마을에는 한씨와 석씨가 많이 살았다. 그들은 양반이었다. 나는 양반집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땅뙈기 하나 없는 소작농이었다. 마을에서 우리 집이 제일 가난했다. 그래서 양반집 규수 대신 내가 끌려간 게 아닐까, 다 자란 뒤에 의심도 들었다.

부잣집에 시집가는 꿈

내 꿈은 부잣집에 시집가는 것. 아버지는 나만 보면 “우리 순옥이는 꼭 부잣집에 시집보내 배 곯는 일 없게 할 끼구만” 했다. 상추가 나비처럼 뾰족뾰족 땅을 뚫고 올라오던 16살의 봄날, ‘처녀 공출’ 때문에 마을이 뒤숭숭했다. 아버지는 순사한테 끌려가느니 공장에 취직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막 돋아난 어린 상추 잎을 된장에 찍어 아침밥을 먹는데, 동네 아저씨가 날 데리러 왔다. 나는 숙고사(명주로 만든 옷감) 겹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었다. 아버지하고는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대구의 실 푸는 공장에 취직한다는 동네 아저씨 말만 믿었다. 난생처음 기차를 탔다. 옥수수빵을 먹으며 경산역에서 대구역으로, 다시 용산역으로, 그리고 중국 하얼빈역으로 갔다. 하얼빈역에는 눈이 버선목까지 쌓여 있었다. 며칠 뒤에 다시 기차를 타고 치치하루역으로 갔다. 내몽골 접경지대였다. 낙타를 봤다. 나무로 지은 2층집도 봤다. 그리고 일본 군인들을 봤다.

내 이름은 김순악. 그런데 일본 군인들은 자꾸 다른 이름을 불렀다.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또는 마쓰다케라고 불렀다. 요 한 장을 깔면 방이 꽉 찼다. 방문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주먹밥 서너 개를 넣어줬다. 그걸 틈틈이 먹으며 하루 종일 일본 군인을 상대했다. 처음엔 두려웠다. 내 나이 열여섯이었다. 나중엔 몸이 아팠다. 일본 군인들은 옷을 벗지 않고 지퍼만 내렸다. 허리에 매달린 칼집이 내 뱃살을 찔렀다. 아프다고 하면 일본 군인들이 때리고 욕했다. 생리 때도 상대했다. 가제나 솜을 구해 아래를 닦았다.

나는 짐승이었다. 일본 군인들이 나를 사람으로 알았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다다미 두 장짜리 방에 누워 살아남아야 한다 생각했다. 아버지 생각도 했다. 나중에 중국 허베이성 장가구라는 마을로 옮겼다. 산골 마을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주먹밥을 먹고 군인을 상대하다 지쳐 잠들었다. 평일엔 10~20명이 왔다. 주말엔 30~40명이 왔다. 아래가 헐고 고름이 찼다. 군인들은 삿쿠(콘돔)하고 센조(뒷물), 그리고 성병 검사만 챙겨줬다. 가라면 가고, 먹으라면 먹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담긴 사진은 거의 없다. 동두천에서 지내던 30대 시절 찍은 사진(왼쪽)과 서울에서 식모 생활을 하던 50대에 찍은 증명사진이 전부다(오른쪽).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담긴 사진은 거의 없다. 동두천에서 지내던 30대 시절 찍은 사진(왼쪽)과 서울에서 식모 생활을 하던 50대에 찍은 증명사진이 전부다(오른쪽).

나는 짐승이었다

나더러 “조선 갈보”라고 중국 사람들이 욕했다. 장가구 일본군 위안소에서 1년쯤 지났을 게다. 일본군이 패전했다고 마을 스피커에서 방송을 했다. 일본군은 조선 처녀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사라졌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를 마구 때렸다. 겁이 나서 무작정 화물열차에 올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역 광장에 태극기를 걸어둔 사람들이 있었다. 광복군이라 했다. 죽지 않으려면 지금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제 내 이름은 다시 김순악. 수수를 삶아 물에 갈아 먹으며 조선 땅에 도착했다. 18살이었다. 서울역 근처 식당에서 일했지만 돈을 주지는 않았다. 지게꾼이 “돈을 벌려면 몸뚱이 파는 데를 가야지” 했다. 내 발로 색싯집에 갔다. 돈 벌러 고향을 떠났으니 돈 벌어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다. 이미 버린 몸이니 거리낌은 없었다. 돈을 더 벌려고, 빨리 벌려고, 군산으로 갔다. 여수에도 갔다. 여수에서는 몸은 안 팔고 술만 팔아도 되는 요릿집에 갔다. 거기서 술을 배웠다. 긴 칼 차고 말 타는 순사가 나를 좋게 봤다. 나를 아껴주었다. 임신을 했다. 몸 풀 날이 머지않았는데 여순사건이 났다. 긴 칼 찬 순사는 고향인 경산에 돌아가라고 했다. 그때가 애아버지와는 마지막이었다.

내 가슴엔 서슬 푸른 한만 있다. “신랑도 없이 이리 배불러 우야노. 이넘의 가시나야.” 고향의 어머니는 내 등을 치셨다. 아버지는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딸 소식을 알아보려 사방에 수소문하고, 하루 걸러 골목길에 나가 하염없이 서 계셨다 했다. 아버지와 헤어진 지 7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들은 1950년 2월에 태어났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용케 난리는 피했지만 먹고살아야 했다. 1953년 휴전이 되자 동두천에 갔다. 장사를 했다. 색시 장사도 하고 양키 물건 장사도 하고 달러 장사도 했다.

서울, 군산, 여수, 그리고 동두천 ‘마마상’

내 영어 이름은 ‘마마상’. 미군 부대에 몰래 들어가 군수품을 구했다. 미군들은 나를 ‘마마상’이라 불렀다. 담배, 술, 화장품, 커피, 비누, 초콜릿, 고기를 치마 속곳에 숨겨 나왔다. 돈이 생기면 고향으로 보냈다. 둘째아들이 그때 태어났다. 얼굴이 하얗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동네 양색시들이 예쁘다고 안아보고 난리였다. 그래도 또래들은 놀렸다. “잡종 온다. 튀기 온다”고 소리쳤다. 돌에 맞아 피를 질질 흘리며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가슴이 찢어졌다. 펄벅재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보냈다. 미국에 입양시켜준다 했다. 몇 달 뒤에 갔더니 아이가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꼭 끌어안고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대부분 팔순을 넘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대구 중구 서문로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실 벽에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대부분 팔순을 넘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대구 중구 서문로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실 벽에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나는 엄마였다. 누가 내 속을 알겠나. 두 아들은 남동생 호적에 넣었다. 친아버지가 없으니 동생이 아버지가 됐다. 큰아들은 공부를 잘했다. 칼 차고 말 타던 제 생부를 닮은 거라 생각했다. 대학에 보내자고 선생님이 말했지만,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다. 큰아들은 군에 바로 입대했다. 그런데 제대를 앞두고 베트남전 참전을 자원했다. 총 맞아 죽을까봐 밤마다 잠을 못 잤다. 무사히 돌아온 아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동사무소에 출근하는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내 눈에는 고관대작이 따로 없었다. 공무원 아들이 생겼으니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골목길에 식당을 얻었다. 행복했다. 그런데 아들이 데려온 며느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 맘에 안 들었다. 아들 내외가 단칸방에서 자느라, 나는 가게에서 한뎃잠을 잤다. 가게도 시름시름 장사가 안 됐다.

내 이름은 식모가 됐다.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15년 동안 했다. 대기업 총수의 아들네 집에서 일한 적도 있다. 나는 글자를 모른다. 전화가 와서 메모를 전해달라는데,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주인이 나가라고 했다. 둘째아들은 요리를 배워 식당을 차렸다. 결혼도 했다. 식당이 번창했다. 둘째네 집에 들어가 손자도 봐주고 식당일도 도왔다. 그런데 여유가 생긴 둘째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마시고 돌아오면 딴사람이 됐다. “와 나를 낳았노. 그때 죽이뿌지. 와 나를 받았노.” 미친 사람처럼 나한테 덤벼들었다. 벌어둔 돈을 술로 날렸다. 둘째는 며느리도 때렸다. “죄없는 것을 와 때리노. 제발 정신 좀 차리라.” 내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둘째아들이 잠들 때까지 지옥 같았다.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새벽에 조용히 집을 나왔다. 고향 경산으로 내려왔다.

내 이름을 고향에선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방세를 안 내도 좋다기에 고향 마을 빈방을 구했다. 밤이슬만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농사일을 거들어 끼니를 구했다. 내 마음은 갈고리처럼 자꾸 구부러졌다. 남편 만나 자식 키운 이야기도 싫고, 손자 자랑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 이야기가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별일 없어예?” 동네 이웃이 물어도 대답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와 무슨 일 있었으면 좋겠나? 뭐가 그리 궁금한데?” 가슴에서 불이 올라왔다. 시름을 달랠 길은 술과 담배밖에 없었다. 술 마시다 정신을 잃었다. 난방도 안 되는 차가운 방에 쓰러진 나를 이웃이 발견했다. 면사무소에 사정을 이야기해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됐다. 영구임대아파트를 받았다. 1997년이었다.

내가 ‘피해자’였다고 말해준 사람들

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사람들이 말해줬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처음엔 몰랐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훈 할머니’ 이야기가 자꾸 나왔다. 그 할머니도 내가 사는 아파트에 살았다. 사람들이 각별하게 아끼고 환영했다. 놀라웠다. 어느 날,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http://www.1945815.or.kr)에서 나를 찾아왔다. 모임 게시판에 제보가 들어왔다고 했다. 내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글이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서울에 있는 큰아들이 제 이름을 숨기고 올렸다. 나는 그때 밥 대신 술만 먹고 있었다. 몸이 바짝 야위었다. 일본 군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야윈 무릎이 떨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옛날 이야기를 전부 했다. 그래도 아들 이야기는 안 했다. 조카라고 했다. 아들한테 피해가 갈까봐 영 조심스러웠다.

고 김순악 할머니의 장례식은 대구 지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돕고 있는 곽병원에서 치러졌다. 지난 1월3일, 동갑내기 친구로 지냈던 이용수 할머니(가운데)가 문상을 왔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고 김순악 할머니의 장례식은 대구 지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돕고 있는 곽병원에서 치러졌다. 지난 1월3일, 동갑내기 친구로 지냈던 이용수 할머니(가운데)가 문상을 왔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사람들이 나를 할머니라 부르며 알은체했다. 젊은 사람들이 꾸벅꾸벅 인사도 잘했다. 2000년 1월, 한국 정부가 나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지정했다. 그 증서를 액자에 걸어 13평 방에 걸었다. 나는 배상이 뭔지 사죄가 뭔지 모른다. 그래도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생겨 제일 좋았다. 모임이 있으면 경산에서 택시를 타고 대구까지 나갔다. 글자를 모르니 지하철도 못 타고 버스도 못 탄다. 할머니들 모임에 나가면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이용수 할머니라고 나하고 같은 처지의 동갑내기가 있다. “꽃다운 이팔소녀는 울어라도 보았으면, 철없는 사랑에 울기라도 했더라면.” 제목조차 기억에 없는 그 노래를 절반쯤 부르면 이용수 할머니가 뒤이어 불렀다. 나는 춤을 췄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너희 세대는 괜찮다”

나는 대장암 말기 환자였다. 살 만하니까 병이 들었다. 지난해 12월, 변비가 심해 대구 곽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할매, 대장이 꽉 막혀 있으니까 똥이 안 나온 기라예. 이제 수술하면 됩니대이.” 시민모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대장암이라고는 안 했다. “내가 마취하고 다시 깨어나겠나.”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5급 사무관으로 퇴직한 큰아들이 병원에 왔다. 유서를 썼다. 글자를 모르니 나는 말만 하고 사람들이 받아적었다. “영구차 나갈 때 꽃을 많이 달아라.” 머리 얹고 족두리 쓰고 시집가는 게 소원이었으니, 마지막 길이나마 꽃을 달고 싶었다. 수술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어나 걷지는 못하고 앉아서 기어다녔다. 지난 1월2일, 엉금엉금 화장실로 기어가다 나는 쓰러졌다. 그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내 방에는 즐겨 피우던 88라이트 담배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서가 남았다. 그것만 남기고 나는 그만 훌훌 털어버렸다.

나는 이제 소나무다. 영천 은해사 뒤에 소나무가 있는데, 그 밑에 내 뼛가루를 묻었다. 장례식 때 사람들이 많이 왔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왔다. 장관하고 국회의원이 화환도 보냈다. 5급 사무관까지 하다 퇴직한 큰아들 식구들이 왔다. 끝내 알코올중독으로 먼저 죽은 작은아들 대신 며느리가 왔다.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간 큰손자도 왔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너희 세대는 괜찮다. 할머니가 힘들게 사셨지만 할머니 잘못이 아니다. 할머니는 피해자다.” 큰아들이 큰손자한테 말하는 것을 나는 소나무 아래서 다 들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자꾸 울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사는 대구 상인동 비둘기 아파트에는 원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4명 살았다. 다 죽고 이제 2명 남았다. 동기로 지내던 나까지 죽었다고 노인네가 많이 운다.

나는 다 봤다. 처녀들 끌고 가는 조선인도 보고, 다다미방에 들어오던 일본 군인도 봤다. 일본군 쫓아가던 중국 팔로군을 보고, 베이징역 앞 광복군을 봤다. 평양에 들어온 소련군도 보고, 동두천에 있는 미군도 봤다. 나는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아들, 며느리, 손자한테 피해 줄까 언제나 걱정했다. 그래서 사람들 모이는 데는 잘 가지도 않고 말도 잘 안 했다. 늘그막에 친구들이 생겼지만, 몸이 아프니까 좋은 시절도 잠깐뿐이었다.

사죄·배상 못 받고 다들 떠나고 있다

내 이름은 김순악.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아, 내 이름은 잊지 마라. 내가 죽었다고 내가 겪은 일까지 다 잊어버리지는 마라. 100년 전, 일본 침략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나 같은 조선 처녀들이 20만여 명이다. 대부분 죽어버렸다. 한국 정부에 신고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234명이지만, 2010년 1월 88명만 살아 있다. 사죄하고 배상하는 일을 꼭 지켜보려고 질긴 목숨 아직도 지키고 있다.

대구=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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