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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정신 외면한 ‘용산 재판부’


불확실한 발화 원인·특정되지 않은 공소사실에도 불구 중형 선고한 것은 무죄추정 원칙과 어긋나
등록 2009-11-04 13:52 수정 2020-05-03 04:25

“이건 재판이 아니야!”
‘용산 참사’ 선고 공판이 진행되던 지난 10월28일 오후 2시30분 서울중앙지법 311호 중법정, 판결문 낭독을 듣고 있던 김주환 전국철거민연합 신계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이 피고인석에서 일어섰다. 이충연 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김형태 변호사도 동시에 몸을 일으켜 법정을 빠져나가려 했다. 법정 방호원들은 날랜 몸짓으로 이들의 돌발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용산 참사’로 기소된 이충연(36·구속) 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장 등 농성자 9명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린 10월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유죄판결이 나오자 고 이상림씨의 부인이자 이 위원장의 어머니인 전재숙씨가 오열하며 나오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용산 참사’로 기소된 이충연(36·구속) 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장 등 농성자 9명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린 10월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유죄판결이 나오자 고 이상림씨의 부인이자 이 위원장의 어머니인 전재숙씨가 오열하며 나오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피해자도 철거민, 가해자도 철거민?

“재판을 거부하면 나가도 좋습니다.”

재판장의 목소리에 방호원들은 힘을 풀었다. 구속 피고인 대기석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등 뒤로 방청석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황록색 수의를 입고 법정 밖으로 걸어나간 이충연·김주환 피고인의 뒤에 재판부가 앉아 있는 ‘법대’가 있었다. 형사합의27부 한양석 부장판사와 이진혁·정하경 배석판사가 검은색 법복을 입고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 형사가 협상을 주선했지만, 피고인들은 오히려 경찰력의 철수라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어 협상을 거부했으며, 유리구슬과 골프공을 새총을 이용해 경찰들에게 쏘았으며…” 판결문 특유의 장문은 이어졌다. “법질서를 유린”하고 “화재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계획적으로 재판 진행을 방해”했다는 중형 선고 이유가 낭독되더니, 이충연·김주환 피고인에게 징역 6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됐다.

공판이 끝난 오후 2시50분께 이충연 위원장의 어머니 전재숙(68)씨는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복도에 주저앉았다. “이게 재판이라고? 수사기록 3천 쪽 안 내놓는 재판이 어떻게 재판이야? 제 아비를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전씨는 오열했다. 그의 남편이자 이충연 위원장의 아버지인 고 이상림씨는 용산 참사 당시 망루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는 공판 뒤 “검찰의 모든 기소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재판부가 스스로 사법정의를 포기한 것”이라며 “오늘 대한민국의 사법정의는 죽었다”고 공식 논평을 내놓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철저히 외면했다. 변호인단은 △특정되지 않은 검찰 공소사실 △다른 이유에 의한 발화 가능성 △경찰 공무집행의 불법성 등을 조목조목 따졌지만, 재판부는 검찰이 기소 당시 낸 수사결과 발표를 되풀이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재판 뒤 기자들에게 “형사법의 대원칙인 ‘무죄 추정의 원칙’을 깰 수 있는 증거는 없었으며, 일반적인 형사재판이었다면 무죄가 나왔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격앙된 목소리였다.

국과수도 특정 못한 방화 원인… 재판부는 신?

변호인단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법언을 공판마다 되새겼다. 국가 형벌권이라는 위험한 칼날은 언제든 시민의 자유를 겨눌 수 있다는 경험적 진실은 근대 입법의 아버지들을 괴롭힌 숙제였다. 그 결과, “열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자를 벌하지 말라”는 고대법의 정신은 근대 형사법에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열매를 낳았다.

용산 참사 공판 과정에서 ‘화염병에 의한 발화’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제출되지 않았다. 발화 장면을 직접 찍은 채증 자료는 없었으며, 불이 붙은 화염병이 던져지는 장면을 봤다는 증언조차 나오지 않았다. 농성자들과 사투를 벌였던 모든 경찰특공대원들은 “그런 사실은 목격하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망루에 큰 불이 나기 직전 3층 창문 안쪽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망루가 벌어진 틈으로 불이 붙은 액체가 뚝뚝 1층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관찰됐다”며 “화염병을 던졌을 때 병 안에 담겨 있는 액체에 불이 붙어 떨어지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발화 원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보고서도 이미 제출됐지만, “불붙은 화염병 액체와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용산 참사의 책임을 농성자에게 돌려버렸다.

변호인단이 주장한 다른 화재 가능성도 모두 묵살됐다. 참사 당시 망루 안은 농성자들이 준비한 인화물질, ‘세녹스’의 유증기가 가득 찬 상황이었다. 화재 직전 망루 안에 투입된 한 경찰특공대원은 법정에서 “망루 안에 시너 냄새가 너무 심해 현기증이 나 계단을 오르기 힘들 지경이었다”며 “잠시 밖으로 나와 바람을 쏘인 다음 다시 망루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환각 증상이 아니었나 싶다”고 증언했다.

시한폭탄 같은 유증기가 가득 찬 망루 안에는 농성자들이 준비한 발전기가 놓여 있었다. 참사 뒤 현장을 조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채증 사진에는 이 발전기의 스위치가 꺼져 있었지만, 농성자들은 “캄캄한 새벽이었기 때문에 발전기를 돌려 전등을 밝혀두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변호인단은 증거 자료의 조작 가능성을 주장했지만, 재판부의 현장검증 당시 문제의 발전기는 이미 파손된 상태였다.

‘용산 참사’ 재판 선고 공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온 뒤 김형태 변호사가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용산 참사’ 재판 선고 공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온 뒤 김형태 변호사가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재분석실장은 공판에 출석해 “망루 안에 유증기가 꽉 차 있었다면, 옷깃에 스치는 정전기의 0.1%에 해당하는 전기 스파크로도 불이 붙을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같은 주장을 모두 배격했다. 재판부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던 지난 1월20일 많은 물을 살수하고 있었던 상황을 보면, 정전기에 의한 화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며 “발전기에 의한 화재 가능성도 증거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짤막하게 판단했다.

한편 박삼복 경찰특공대장은 지난 10월9일 공판에 출석해 “모든 인화물질이 망루 안에 모아져 있는 줄은 미리 몰랐으며, 현장 상황은 각 제대장이 알아서 판단했기 때문에 현장 투입 뒤에도 망루 안에 인화물질이 모여져 있는 사실을 몰랐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망루 안에 직접 들어갔던 한 경찰특공대 제대장은 “무전을 통해 경찰특공대장이 작전을 지휘했다”고 말했다. 책임자는 간데없고, 혼선은 난무한 상황이었음을 실토한 꼴이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정보과 형사는 공판에 나와 “협상을 시도해보려 노력했지만,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이런 일이 벌어져 마음이 아팠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이같은 증언과 함께 대테러 작전을 전담하는 경찰특공대가 망루 점거 하룻만에 전격 투입된 것을 들어 ‘공세적 진압’의 불법성을 제기했다. 경찰 행정이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헌법의 요구인 ‘경찰 비례의 원칙’이 근거였다. 대법원 판례는 공무집행 방해 혐의가 인정되려면 그 공무집행 자체가 ‘정당한 공무집행’일 것을 요건으로 하고 있다.

검경 수사발표 앵무새처럼 되풀이

그러나 재판부는 경찰의 진압은 적법한 것이었다고 선언했다. 한 소방대원은 공판에 나와, “망루 안의 상황을 볼 때 작전을 하지 않는 것만이 화재를 막을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경찰이 진압을 하면서 참사를 막지 못했으니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되는 동시에, 사망 가능성을 알면서도 이를 감수하겠다는 의사가 있었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도 적용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 수사 발표에서 들었던 익숙한 설명이 재판부의 입에서 되풀이됐다. “용산 한강로는 서울 남북을 잇는 주요 도로로, 도심 한복판의 고층 건물에 불법적으로 망루를 짓고 다량의 인화물질과 화염병, 골프공 등을 준비한 이들의 농성이 장기화될 경우….” 그 결과, 1명의 경찰특공대원이 숨진 것에 대해서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혐의가 있정됐고, 5명의 아버지와 이웃·동료가 숨지게 된 경찰 작전의 위험성은 면죄부를 받게 됐다.

수사기록조차 내놓지 않은 검찰의 일방적인 공소사실을 방어하느라, ‘생존권’과 ‘사회적 긴급피난’ 같은 자연법적 논점은 재판 과정 전면에 등장하지조차 못했다. 우리 형법 22조는 ‘긴급피난’이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자기 또는 타인의 이익이 침해당할 급박한 위기에 있는 경우 부득이 다른 사람의 법익을 침해해도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규정이다. 정원이 5명인 보트에 6명이 타고 있어 침몰 위기를 겪을 때, 5명이 한 사람을 물속에 밀어버리더라도 우리 형법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아수라장 속으로 떠밀린 농성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헌법적 권리인 생존권을 빼앗길 위기에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법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경우 ‘사회적 긴급피난’을 적용하자는 의견도 내고 있다. 극심한 식량난에 굶주린 사람이 상점에서 빵을 훔쳤을 때, 절도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의식인 셈이다. 지난 4월에 열렸던 ‘용산참사 법적쟁점 토론회’에 나선 김성규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우리 판례의 태도로 볼 때 긴급피난을 인정하는 범위는 매우 좁은 것이 사실이지만, 농성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찰력의 위치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고려할 때, 이 사건에서 긴급피난과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개발 현장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용역 직원들이 멀쩡히 영업을 하고 있는 상점 앞에 썩은 생선 대가리를 쌓아두고 가거나,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면 욕설과 폭행을 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이 제시한 현장의 거리에는 목이 잘린 주검, 해골, 온갖 육두문자가 선혈처럼 붉은 페인트로 그려져 있었다. 준전시 상황이던 재개발 지역 안에 철거민들을 보호해주는 공권력은 없었다. 농성자들은 밀리고 밀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그러나 현행법상 이들은 ‘호람건설’이라는 철거 전문 업체가 용역들을 동원해 관리하던 건물을 무단 점거한 위법자일 뿐이었다. “그저 살던 곳에서 장사를 하며 살게 해달라”는 헌법상 권리, 생존권의 외침은 망루 위에서나 자유로웠다.

건설 자본의 탐욕과 그 공범자들

헌법적 권리인 저항권은 국가 권력의 불법성이 명확하며 다른 구제 수단이 더 이상 없는 최후 상황에만 인정된다. 점령지를 장악한 군인처럼 용역 직원들은 철거민을 극한으로 내몰았다. 경찰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았고, 구청을 찾아가면 ‘떼잡이들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입간판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삶의 터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진압과 처벌을 각오하고 망루에 올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망루에 오른 것은 자본주의의 탐욕과 그 공범자들이 보여준 침묵에 대한 저항권의 행사였는지도 모른다.

노현웅 기자 한겨레 법조팀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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