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근무요원인 유정호(24·가명)씨는 서울 고려대 근처 집에서 근무처까지 8km를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그의 ‘애마’는 접이식 자전거 ‘스트라이다’. 3년째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데려다주는 보물이다. 지난 5월엔 서울에서 대전까지 8시간을 함께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교통법상 ‘차’인 자전거를 타고 도로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2007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다 버스에 치였다. 버스는 그냥 지나가버렸다.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면서 무릎을 다쳤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충격은 오래갔다. 그 뒤로 차가 많은 낮 시간엔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 학교에 갈 땐 인도를 이용했다. 보행자가 많은 땐 자전거를 타지 말고 끌어야 한다. 불편하고 답답했다. 결국 차량이 적은 새벽 3시마다 도로로 나와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소리를 지르며 두 발로 만들어낸 속도를 즐겼다. 도로에서 미끄러지는 자전거는 시원한 바람으로 가슴을 뻥 뚫어줬다. 낮 시간의 도로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건 ‘스트라이다 동호회’ 사람들 덕분이다. 여럿이 함께 차도를 점령하고 자전거를 타니 덜 위험했다. 도로의 주인처럼 군림하던 자동차도 ‘떼거리 자전거’는 무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전거가 올바른 주행길에 오르려면 담력과 연대가 필요했다.
운영진도 없이 공지문만 달랑지난 8월15일, 서울 주한 미대사관 옆 시민열린마당에 ‘발바리’들이 모였다. 발바리의 본딧말은 두 ‘발’과 두 ‘바’퀴로 다니는 떼거‘리’.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이들은 ‘발바리 광장’으로 이름 붙인 이곳에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떼거리 잔차(자전거)질’에 나선다. 1999년 PC통신 참세상 ‘자전거타기 모임’이 시작이었다. 서울의 환경이 얼마나 자전거를 타기 힘든지 대화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하던 이들은 외국의 자전거타기 운동인 ‘크리티컬 매스’를 알게 된다. 자전거가 차도의 정당한 이용자로 인정받을 때까지 대중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운동이다. “우리도 해보자”며 2001년 8명으로 시작한 게 어느덧 100회를 맞았다.
발바리 모임은 여느 동호회와는 다르다. 스트라이다 동호회 같은 단체부터 개인까지 그저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전거를 즐길 뿐이다. 회장이나 총무 같은 운영진도 없다. 발바리 사이트(bike.jinbo.net)에 ‘매달 셋쨋주 토요일 4시에 광화문에서 떼잔차질이 열린다’는 공지문 하나만 올려놓고 자율에 맡긴다. 3명이 나올 때도 있고, 100명이 될 때도 있다. 개방형·참여형 모임으로 누가 나서지 않아도 잘 굴러왔다.
100회를 기념하는 이날엔 평소보다 많은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자전거의 종류도 사람들의 옷차림도 다양했다. 깃발과 스티커를 준비해 치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회 기념 티셔츠를 만들어 파는 이도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자전거 축제’를 즐기러 나온 이들은 ‘자전거면 충분하다’는 발바리 구호 그대로 행복해 보였다. 이들에게 자전거는 평등이고 평화다.
가장 많은 회원들이 모인 스트라이다 동호회는 출발 전에 참가자들에게 당부했다. “발바리는 빠르게 달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도 당당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을 알리는 행사입니다. 혼자서 마구 달리거나 자동차 사이로 끼어들기 하시면 안 돼요. 꼭 기억해주세요.”
누군가의 “출발합시다” 소리와 함께 100여 대의 자전거가 시민열린마당 옆 도로로 빠져나갔다. 발바리의 시내 코스는 늘 일정하다. 인사동~창덕궁~대학로 입구~동대문~종로5~1가~광화문~서대문~마포~여의도.
선두에 선 자전거에 꽂힌 발바리 깃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알리고 싶은, 말하고 싶은 내용을 깃발이나 스티커로 만들어와 자신의 몸과 자전거에 장식했다. 한 여성의 배낭엔 “바퀴 달린 모든 쇠붙이를 위한 길이 찻길이다”란 구호가 적혀 있었다. 누구는 “보행자와 자전거 중심의 도시 건설” “MB 삽질 안 돼, 4대강은 흘러야 한다” 같은 정부 정책 반대 깃발을 달았다. 또 다른 누구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온 발바리 홍보물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자연과 사람에 열려 있는 자전거처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혼자 탈 땐 얼굴에 철판 까는 것이 필요해
속도는 다르지만 자전거는 차와 똑같이 신호를 받고 달렸다. 오른쪽 끝 차선을 차지하고 2열 종대로 나란히 달려나갔다. 도로 주행에 익숙한 고참 발바리들이 앞뒤로 수신호를 보내며 자전거 행렬을 이끌었다. 자율적인 역할 분담을 통해 느리지만 안전하게 자전거들이 나아갔다.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탄 지 3년 됐다는 아이디 ‘뻥삼이’는 “혼자 탈 땐 얼굴에 철판을 깔고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면서 “빵빵거리는 차 속에서 교통에 방해될까봐 전속력으로 달리면 너무 힘들었는데, 발바리에 참여하면서 신이 난다”고 했다. 조용한 자전거의 행진에 비하면 자동차 문화는 폭력적이다. 자전거가 차보다 앞서나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도 발바리가 ‘도로에서 자전거 권리 찾기’를 주장한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는지 자전거를 대하는 운전자들의 태도는 이전보다 나아졌다.
자전거 권리 찾기는 도로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학교나 공공기관에서도 발바리들은 수시로 싸워야 했다. 창립멤버 격인 아이디 ‘말랴’는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는데 직원 외에는 국회 안으로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당황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부모님과 함께 8년째 발바리에 참여하고 있는 고교 3학년 장한군도 “교직원들은 교문 안으로 자전거를 들고 가도 되지만 학생들은 안 된다고 해서 학교에 따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과 시민, 교직원과 학생의 자전거는 평등하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발바리 떼잔차질은 자전거가 도로로 다녀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사회운동”이라고 배워왔다는 장군은 “문턱 없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생활 자전거인들이 늘 수 있다”고 말했다.
자전거떼가 지나가는 도로에선 운전자들이, 인도에선 보행자들이 이들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어느 운전자는 여전히 경적을 울리며 자전거를 향해 욕을 했다. 어느 나이 지긋한 남성은 길을 지나다 말고 자전거 행렬이 사라질 때까지 박수를 쳤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는 교통체증이 심하다. 도로 곳곳에 차선 하나를 잡고 늘어선 경찰버스 때문에 더 복잡해 보인다. 집회가 많은 광복절이어서인지 경찰버스는 주행 코스마다 늘어서 있었다. 길이 꽉 막혀 있으면 차 속에 갇힌 사람들은 무작정 기다려야 하지만 자전거들은 유유히 빠져나갔다. 유정호씨는 “자전거가 차보다 느린 게 아니라 차가 자전거를 느리게 하는 것”이라며 “자전거를 위협하는 운전과 끼어들기가 자전거의 속도를 늦추게 할 뿐 자전거는 빠르다”고 말했다.
자전거로 세상을 바꾸는 아나키스트
이렇게 자전거의 빠른 속도를 믿는 아이디 ‘지음’은 ‘자전거 메신저’가 됐다. 자전거 메신저란 자전거를 이동수단으로 삼은 배달꾼이다. 우리에겐 아직 낯선데 외국에서는 꽤 알려져 있다. 매연도 없고, 교통 정체도 없고, 차체에 갇혀 고립되지도 않는 자전거의 매력에 빠졌던 그가 자전거를 생계수단으로 삼아겠다고 결심한 건 지난해 10월. 지음은 “자전거를 타면 탈수록 자전거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복잡한 서울에 살면서 차에 의존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자전거 메신저 일은 그에게 생활이 아닌 신념과 같은 것이다. 애초에 수익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좋아하는 자전거의 페달을 구르며 더 많은 인생의 고민을 해보자고 시작했으니 그저 계속 달릴 뿐이다. “자전거면 충분하다”는 그는 “자전거가 더 많이 도로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자전거 메신저로 불리지만 지음은 자전거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자전거가 도로를 달리지 못하는 건 차 때문이에요. 차를 줄이고 자전거를 보호하도록 도로교통법도 바꾼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탈 수 있어요.”
발바리들의 떼잔차질은 출발 3시간 만에 목적지인 여의도에 도착했다. 100회째 발바리 떼잔차질은 이번에도 유쾌했다. 햇수로 9년. 발바리가 쉼없이 자전거의 바퀴를 굴려온 그 세월 동안 자전거는 늘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주목받으며 사회적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관심만큼 정책이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여전히 도로에서 자전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로교통법에서도 자전거는 보도와 인도에서 모두 불리한 천덕꾸러기 신세다. 발바리 내에서도 각종 정책이나 규율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넘친다. 자전거의 권리 찾기를 주장한다면 헬멧의 의무 사용, 주행시 음주 금지 같은 의무와 책임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뜨겁다.
자전거 관련 실태를 연구해온 양흠모 대전충남녹색연합 생태도시국장은 “자전거 타기는 오래된 환경운동으로 만만해 보이지만, 실상 자동차 중심의 교통정책을 건드려야 하는 일로 쉽지 않다”면서 “자동차 타는 것을 억제하고 대중교통과 자전거 이용 확산을 유도하는 한편, 자전거와 사람의 소통을 다시 보는 인문학적인 자전거 인식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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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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