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u>‘합법적 민란’</u>( 773호 표지이야기 참조)은 반쪽의 성공으로 끝났다. 지난 8월26일 치러진 ‘제주도지사 주민소환투표’는 11%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한 채 막을 내렸다. 제주도 유권자 41만9504명 중 4만6075명만이 투표에 참여했다. 광역자치단체장 가운데 처음으로 주민소환 심판대에 올랐던 김태환 도지사는 20일 만에 직무에 복귀했다.
주민소환투표는 유권자 3분의 1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야 개표를 하며, 그 결과 절반 이상이 소환에 찬성해야 소환 대상자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도지사 쪽은 투표 불참을, 주민소환운동본부 쪽은 투표 참여를 홍보해왔다. 결과적으로는 도지사 쪽의 ‘불참’ 홍보 전략이 먹혔다.
투표를 전후해 취재진이 만난 다수의 제주 시민들은 주민소환투표 참여에 유보적이거나 회의적이었다. 회사원 박성웅(32)씨는 제주 시민들이 투표의 쟁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환투표가 무엇이고 왜 하는지 주민들이 잘 몰라요.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나이 든) 농어민들은 더욱 모르지 않겠어요?” 열쇳집을 운영하는 문여만(60)씨는 내년 6월 지방선거가 마음에 걸린다. “(투표할지) 고민 중이긴 한데, 임기가 몇 달 남았다고 소환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 내년에 나오면 안 찍으면 되는 거 아닌가 말이야.”
무관심을 은근히 조장하는 것을 넘어 아예 투표 참여를 방해하는 사례들도 나타났다. 서귀포시 예래동에서는 ‘투표하지 맙시다’라고 쓴 벽보 30여 개가 투표소 인근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제주시 세화리 투표소에서는 “3명의 괴한이 운동복 차림으로 운동을 하는 척하다 투표소로 가는 사람들을 잡아 돌려보냈다”는 제보가 들어와 경찰이 출동했다. 공무원은 물론 이장·동장 등이 조직적으로 투표 불참을 종용한 사례도 많다. 제주시의 한 동장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주민소환투표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검찰에 고발됐다. 제주시 한 마을의 이장은 투표소를 찾아온 마을 사람들을 되돌려보냈다. 또 다른 마을의 부녀회원들은 “투표율이 높으면 동장님이 불이익을 받는다”며 역시 유권자를 돌려보냈다. 선거 당일에만 모두 21건의 ‘부정선거’ 사례가 적발됐다. 이영웅 주민소환운동본부 대변인은 “자유당 시절의 부정선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개탄했다.
‘자유당 시절의 부정선거’가 횡행한 데는 풀뿌리 조직의 허약함도 작용했다. 기초자치단체에서 주민소환운동이 벌어졌던 경기 하남시나 시흥시의 경우, 공동육아조합·생협·방과후학교 등 ‘풀뿌리 주민모임’이 소환운동을 이끌었다. 반면 제주에서는 제주참여환경연대·제주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가 이를 대체했다. 영향력은 크지만 마을의 곳곳을 파고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불참을 종용하는 사람들은 마을 단위로 채근하는데, 참여를 촉구하는 이들은 도심에서 목소리만 높인 형국이었다.
보수 언론 일제히 ‘주민소환제도’ 비판투표가 불발에 그치자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일제히 논평과 사설을 통해 주민소환제도 자체를 비판했다. 지자체장의 ‘소신 행정’을 방해하는 일이 자주 있어서는 안 된다며, 투표 요건을 강화하고 사유를 제한하자고 한결같이 지적했다. 이 대목에 대해선 헌법재판소가 이미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지난 3월 “주민소환제는 정치적 행위이므로 사유를 묻지 않는 게 제도 취지에 부합하고, 청구 요건과 해직 확정 요건이 외국에 견줘 지나치지 않다”고 결정했다. 결국 보수 정당·언론의 문제제기는 주민소환제도의 가치를 폄훼하는 쪽에 맞춰져 있다.
원래 지방자치는 국회와 중앙정부의 ‘대의 및 대행’ 기능을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하나다. 그래서 주민소환투표는 지방자치에 필수적이다. 선출과 소환이 주민의 직접 참여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민자치의 표상이다. 권력과 언론이 이를 욕보이고, 주민이 그 권리 위에 잠을 자는 한, 한국의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와 별 상관이 없다. 토건주의를 앞세운 지역 토호의 전횡이 주민자치를 대체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결국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나 답을 구하게 됐다.
제주=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송채경화 기자 한겨레 지역팀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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