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조(82) 할머니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히로시마 에바마치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히로시마엔 강제징용과 생계 때문에 찾아온 한국인들, 특히 경남 합천 사람들이 많아서 ‘제2의 합천’으로 불렸다”고 회상한다. 히로시마에 있던 합천 사람들은 1945년 8월6일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등록된 피폭자 2600여 명 중 60% 이상이 경남 합천 사람이다. 한국원폭2세환우회 진경숙 사무국장은 “합천은 경상도의 강원도예요. 산으로 둘러싸여 외지고, 물이 없어 농사도 어렵고. 옛날은 지금보다 더했죠. 그래서 강제동원으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자발적으로 일본에 돈 벌러 가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합천에 원폭 피해자들이 많은 이유를 설명했다.
원폭 피해자 1세들이 돌아와 살던 합천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의 고향이 됐다. 부모는 자식에게 본적 이외에 자신도 모르는 원폭증의 고통도 물려줬다. 현재 합천은 주민 5만3천여 명 가운데 650여 명이 원폭 피해자로 등록돼 있다. 이들이 낳은 원폭 피해자 2세는 최소 600여 명에서 1800여 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국원폭2세환우회에 등록된 사람은 고작 500여 명에 불과하다. 원폭 피해자 대부분이 합천 사람임을 감안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원폭 피해자임을 숨겼던 합천의 1세들은 2세들을 음지로 감췄다.
합천군 쌍책면에 사는 전옥람(47)·전연희(40)씨 자매는 둘 다 정신지체장애 1급이다. 언니 옥람씨는 집 근처도 다닐 수 있고 말도 얼추 알아듣지만, 동생 연희씨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손님이 와도 아는지 모르는지 집 안 구석에 앉아 연방 부채질만 한다. 자매의 아버지인 전상근(73)씨도 몸이 성치 않다. 다리가 아파 농사일은 오래전에 손을 뗐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8살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당했다. 부모의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지만 오랜 시간 원인 모를 병마에 시달렸다. 대신 부인 이길자(69)씨가 품팔이를 하며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두 딸의 입에 들어갈 밥을 챙겼다. 병수발과 생계를 혼자 책임지느라 이씨도 팔과 어깨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맨날 아프다 하면 우쩌겠노” 하며 또 일을 나간다. 여태껏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아야 하는 가난과 복지카드 하나 등록할 줄 모르는 무식만 원망하며 살았지, 그 오랜 고통의 시작이 원폭증이었단 사실은 알지 못했다. 뒤늦게 알게 된 뒤에도 건강한 다른 자식들을 생각해 모르는 척, 아닌 척했다.
합천 원폭 피해자 2세 1800여 명 추산근처에 사는 안해순(64)씨도 이길자씨와 상황이 비슷하다. 2남2녀를 둔 그도 원폭 피해자 1세인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자식들을 돌봤다. 폐암 말기였던 남편은 일본까지 치료를 받으러 갔다 왔지만 끝내 살지 못했다. 큰딸 정숙희(43)씨는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란 병명으로 양쪽 다리에 인공뼈를 넣는 수술을 정기적으로 받으며 살고 있다. 아들 정연현(42)씨는 다운증후군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동갑내기 원폭 피해자 2세 환우인 허진영씨와 29살 때 결혼을 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 어렵게 아기가 생겼지만 그만 유산됐다. 원폭증은 남편과 자식, 뱃속에 있던 손자까지 괴롭혔다. 원폭의 후유증은 그렇게 유전으로 내려갔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그가 모진 맘을 먹었던 날,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했던지 병원에서 숨이 다시 이어졌던 날, 다운증후군인 아들과 며느리는 전기밥통의 코드 하나를 꽂지 못해 하루 종일 밥을 굶고 있었다. 삶은 그렇게 모질었다. 그는 이제 원폭 피해자 2세 환우들을 위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자식에게 부모의 고통을 대물림한 것 같아 한스럽고 미안하다는 이길자씨와 안해순씨는 “병원비라도 지원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일본에서 원폭 피해자 2세들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64년이 지난 지금도 피폭자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8월6일 아침, 경남 합천군 합천읍에 있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는 원폭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위령각에서 위패를 찾는 피폭자 유가족들의 눈물은 여전히 마르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의 지루한 싸움 끝에 어렵게 원호수당을 받고 있는 원폭 피해자 1세들과 달리, 원폭 피해자 2세 환우들은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의 외면 속에 다양한 질환을 앓으며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다. 무혈성 괴사증, 다운증후군, 정신지체장애 등 병마와 평생 동안 싸우는 중이다. 혹여 2세에 나타나지 않았던 질환이 3세에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원폭2세환우회에는 2세인 자신이 또는 3세인 자녀가 왜 이렇게 아플까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진경숙 사무국장은 “갑상선 질환으로 9년 동안 고생하면서 아이는 건강하길 바랐는데, 아이마저 원인 모를 심한 피부질환을 앓아 가슴 아프다”고 말한다.
몸이 아프면 일을 하지 못했다. 전옥람씨 자매나 정연현씨 부부는 노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지 못한다. 이들처럼 장애 판정이 나는 경우면 정부에서 복지수당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 차라리 낫다. 고혈압, 협심증, 당뇨 등 각종 생활습관병으로 고생하는 원폭 피해자 2세 환우들은 원폭증에 의한 후유증을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한다.
그렇다고 원폭 피해자 2세들이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 세대가 겪은 아픔을 인정하고, 고통을 대물림하고 있는 상황을 국가에 함께 따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1세들의 모임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멀쩡한 2세들까지 ‘환우’로 만든다며 협회명부터 트집을 잡고 있다. 그들이 겪었던 사회적 차별이 자녀들에게 대물림될까봐 두려워서다. 일본이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2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이유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었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심진태 합천지부장은 “협회에서 2세들을 껴안지 않는 상황이 안타깝다”면서 “일본 정부가 부정하고 국가가 방치하는 상황에서 2세 환우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아프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민간 차원에서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원폭 피해자 및 원폭 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는 “선 지원, 후 규명으로 자활 능력이 없는 원폭 피해자 2세들에게 당장 생계 및 의료비 지원이 시급하다”며 이들의 문제를 알릴 수 있는 반핵평화자료관과 쉼터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공동대책위의 강제숙 공동대표는 “17대 국회에서 발의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이 18대 국회에서 입법 예고되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상정돼있지만 이 법안이 통과되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며 “민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선 것”이라고 말한다.
올 연말 합천군에 세우려고 준비 중인 반핵평화자료관과 쉼터는 원폭 피해의 실상을 알리는 평화 교육관이면서 2세를 포함한 원폭 피해자들을 돕는 각종 사회 지원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곳으로 쓰일 전망이다. 현재 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자료관과 쉼터로 쓸 부지까지 골라놓은 상태다. 합천군에서도 특별법이 올가을 국회에서 통과되면 400억원의 예산이 드는 세계평화공원을 군내에 조성할 계획이다.
자활 능력 없는 이들에 생계·의료 지원이라도64주년이 되는 올해,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지난 8월6일 일본 정부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 중인 일본 내 원폭 피해자들을 모두 구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재외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소송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심진태 합천지부장은 “늦은 감이 있지만 당연한 결과”라면서 “일본 쪽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진 않겠지만, 국회에 계류 중인 특별법을 통과시켜 일본을 더욱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원폭2세환우회 한정순 회장도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면서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피해자 실태를 조사하고 하루빨리 보상 지원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히로시마에서 만난 인의협 주영수 공동대표
<font size="3"><font color="#006699">“피폭 2세들 ‘매우 건강하다’는 일본 자료에 경악”</font></font>
원폭 사망자 위령식이 열린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한국에서 온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 주영수(45·한림대 교수·사진) 공동대표를 만났다. 인의협의 ‘한국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에 관심을 가진 일본 ‘민주주의의료기관연합’의 초청으로 히로시마에 온 주 대표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본 원폭 피해 실상도 충격이었지만, 히로시마 소재 방사선영향연구소(RERF·이하 방영연)의 조사 결과에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2004년 인의협을 찾은 원폭 피해자 2세 고 김형률씨와의 인연으로,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생존 피폭자 1세 1256명과 2세 1226명을 조사해 1·2세 모두에게서 일반인과 비교해 상당한 수준의 악성 종양 위험과 각종 질환 위험을 직접 확인한 바 있는 그에게 원폭 피해자 2세에 대한 일본 현지의 연구 결과를 확인하는 것은 주요한 과제였다.
그가 방문한 방영연은 1947년 발족된 원폭상해조사위원회(ABCC)를 모태로 1975년에 만들어진 일-미 공동조사 연구기관이다. 원폭 투하의 주범인 미국이 인간을 대상으로 원폭 생체 실험을 감행한 뒤, 피폭자의 건강상태를 연구하는 곳인 셈이다. 여하튼 전세계에서 ‘방사선의 건강영향 평가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피폭자와 그 가족들의 조사를 전담하는 곳이므로, 주 대표는 피폭자 자녀의 건강 실태에 관한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린 기대로 이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2001년부터 7년간 원폭 피해자 2세를 조사했다는 결과에서 생존자 2세의 생활습관병이 방사선에 피폭되지 않은 집단에 비해 질병 위험도가 오히려 낮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었습니다. 전문가라면 한 번만 봐도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도 말이죠.”
일본 내 원폭 피해자 2세는 최소한 30만~4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거나 혹은 유전적으로 방사선에 저항성이 커서 장기 생존했을 1만2천 명을 조사해놓고, 그걸 마치 ‘원폭 피해자 2세 전체’의 결과로 일반화한 점이 큰 문제라는 게 주 대표의 지적이다. 이러한 ‘선택적 오류’는 단순한 오류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일본 정치인들이 이를 근거로 원폭 피해자 2세들이 ‘매우 건강하므로’ 보건학적 지원이 확대될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이즈미 전 총리 집권 당시에 있었던 원폭 피해자 2세들의 ‘암 무료 검진’ 요구는 방영연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무시됐다.
주 대표는 히로시마 공립병원 전 원장이었던 히로시마 공립병원 건강검진센터 아오키 가쓰아키(61) 센터장을 찾았다. 원폭 피해자 2세로서 폐암 투병 중이기도 한 그는, 재외국인의 ‘도일 원폭 치료’를 의료 현장에서 실천해온 한-일 원폭의료 교류의 선두주자다. “고령의 원폭 피해자 1세들이 일본에 직접 오기 힘든 상황에서, 한국 의사의 소견서와 자국에서의 신청만으로도 원폭증 인정이 현실화되도록 해야 한다”는 아오키 센터장의 말에 주 대표는 “지난 64년간 양국에서 철저하게 외면돼온 원폭 피해자 2세들에 대해서도 정확한 실태 파악과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촉구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도쿄(일본)=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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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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