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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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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생활 1년 더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아빠 주검 곁에서 6개월 넘긴 용산 참사 유가족 상필군…
몸 약해지며 눈 실명 위기 맞고 말수도 더 줄어들어
등록 2009-07-24 13:47 수정 2020-05-03 04:25

고2 학생인 상필이는 ‘큰 집’에 산다. 건물의 4층을 다 쓰는 새 집의 넓이는 무려 155평(511㎡)이나 되고 널찍한 방이 여러 개에 화장실과 샤워실도 별도로 갖췄다.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에 찬바람도 팍팍 나오니 여간 시원한 게 아니다. 6개월 전에 옮겨온 이 집은 그 전에 살던 단칸방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다. 철거용역이 와서 집을 때려부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아빠의 주검이 아무런 부담 없이 땅에 묻힐 날은 언제일까? 학교를 다녀온 윤상필군이 7월14일 저녁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영안실에 말없이 앉아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아빠의 주검이 아무런 부담 없이 땅에 묻힐 날은 언제일까? 학교를 다녀온 윤상필군이 7월14일 저녁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영안실에 말없이 앉아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지겨운지도 몰라”

동시에 새 집은 상필이에게 더없이 낯선 공간이기도 하다. 밥 먹고 잠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소일하며 하루하루 생활을 이어나가는 곳이지만, 정 붙이고 살 수 없다. 언제 짐 싸들고 나가야 할지 모른다. 수십 명의 낯선 이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며 함께 호흡하는 것도, 소심한 성격에 말이 짧은 상필이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다.

그렇게 겨울을 지나 봄을 보내고 여름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상필이는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지금은 지겨운 것도 모르겠다”면서도 “아직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가 입던 옷의 두께는 얇아지고 소매는 짧아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빠의 따뜻한 미소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은 사흘 만에 벗는다는 상복을 어머니는 여섯 달째 입고 있고 아빠는 여전히 그 차가운 냉동고에 180일째 누워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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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필이 아빠 윤용헌씨는 지난 1월20일 네 명의 다른 철거민들과 함께 서울 용산 남일당 옥상 위 망루 화재 때 스러져갔다. 그 뒤 다섯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 4층에 둥지를 틀었다. 낮엔 투쟁을 위해 서울시청 별관 앞으로 진출하고 저녁엔 평화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남일당 화재 현장으로 발걸음을 하더라도 밤이 되면 이곳 장례식장으로 돌아온다. 죽음의 마지막 의식을 치르는 공간, 장례식장은 이렇게 남은 자들의 삶의 터전, 집이 됐다.

지리한 일상 속에 장례식장 4층은 화석화됐다. 분향실에 있는 5명의 영정 주변을 장식한 국화는 애초 생화에서 플라스틱 조화로 바뀐 지 오래다. 사나흘이면 시드는 국화를 매번 생화로 대체하기엔, 참으로 없이 사는 사람들이 모였다. 장례식장 사용 비용만 벌써 5억원을 넘었지만, 누가 다 낼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런 큰돈이 있었더라면, 애초 철거민 투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장례식장 건물 정면에는 전·의경 8명이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등의 얼굴이 새겨진 검거용 전단지를 들고 서 있다. 오래된 일이다. 건물 인근에도 정복 경찰이 삼삼오오 모여 경비를 서고 있다.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과 유가족들이 7월15일 낮 서울시청 별관 옆에서 용산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미공개 수사기록 3천여 쪽을 공개할 것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날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과 유가족들이 7월15일 낮 서울시청 별관 옆에서 용산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미공개 수사기록 3천여 쪽을 공개할 것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날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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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마저 화석화될까, 수배 중인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쪽 사람들은 장례식장 4층에서 배드민턴을 하며 몸을 움직인다. 천장 때문에 셔틀콕을 높이 쳐올릴 수는 없다. 둘이서 계속 스파이크를 때려야 한다. 운동량은 자연히 훨씬 커진다. 4층 주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암캐 ‘꽃님’이는 딱딱하게 굳은 장례식장 분위기를 깨뜨리는 구실을 한다. 짧은 다리로 발발거리며 잘도 돌아다닌다. 상필이 아빠와 함께 숨진 이상림씨가 키우던 개가 참사 뒤 낳은 새끼 가운데 한 마리다. 꽃님이도 여기서는 한 식구다.

세 철을 보내는 동안 상필이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우선 건강이다. 상필이는 1992년 엄마 뱃속에서 일곱 달을 미처 채우지 못한 채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날 때 몸무게 970g은 수분이 마르면서 780g까지 떨어졌다. 당시 의사는 상필이의 두 눈이 실명할 확률이 95%라고 했다. 결국 오른쪽 시력을 잃은 상필이는 왼쪽 눈의 시력으로 버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망막에 칼을 대는 대수술을 받은 뒤 조금씩 회복 단계에 있었다. 그런 상필이를 아빠는 끔찍이도 챙겼다. 씩씩하게 혼자서 제 할 일 찾아서 하는 큰아들과는 달리 둘째 상필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던 아빠를 잃고 병원에 들어와 산 지 두 달이 돼가던 지난 3월 말.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주워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상필이는 들어주지 못했다. “엄마, 나 요즘 눈 뜬 장님 같아.” 상필이의 말에 화들짝 놀란 엄마 유영숙씨는 상필이 손을 붙잡고 안과에 갔다. 백내장 증상에다 망막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결국 4월30일 상필이는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아빠를 잃은 데서 오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낯선 곳에서의 적응 스트레스가 상필이 몸에서 가장 약한 눈을 괴롭힌 것이다.

병원 앞 수배자 검문검색은 여전

성격도 조금 바뀌었다. 이전부터 말수가 적은 상필이의 입은 지금 사는 장례식장으로 옮긴 뒤 더 조용해졌다. “여기 온 뒤 상필이 성격이 더 내성적으로 바뀌었다”는 유영숙씨는 “나한테 얘기는 안 해도, 지 속에서 올라오는 게 왜 없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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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필이의 장래 목표는 역사 교사다. 사범대에 진학해 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원하는 걸 하기엔 성적이 많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주변 여건은 상필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아침 6시쯤이면 장례식장에서 눈을 뜨고 성당에서 보내준 반찬에 아침밥을 먹고는 학교에 간다. 친구들과 달리 야간 자율학습은 하지 않는다. 오후 6∼7시면 다시 보금자리인 장례식장으로 돌아온다. 조금만 글자를 오래 보고 있어도 쉽사리 왼쪽 눈이 피로해지는 까닭에 공부를 오래 할 수 없다. 1학년인 지난해만 해도 참가했던 자율학습을 2학년이 된 뒤 되레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잠을 이루기도 쉽잖다. 아빠 생각에….

철마다 상복 바꿔입는 엄마

상필이가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건 참사가 나기 사나흘 전쯤이었다. 저녁 무렵 아빠는 웃는 얼굴로 “잘될 거야”라며 집을 나섰다. 상필이도 그때는 자세히 몰랐다. 왜 아빠가 우리 가게도 없는 용산으로 가는지, ‘우리랑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며 남일당 건물 망루에 시너를 들고 오른 뜻이 무엇이었는지…. 서울 순화동 세입자 철거민이었던 아버지는 그렇게 용산 철거민들의 곁으로 갔다.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는 유가족의 울부짖음에 모르쇠하는 정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상필이의 말수도 줄고 있다. 상필이는 “1년 더 있으란다고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라지만, 흔들리고 있는 그의 왼쪽 눈도 같은 대답을 할지는 미지수다.

이런 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어머니 유영숙씨의 오른팔은 압박붕대로 칭칭 동여매졌다. 벌써 세 번째다. 팔꿈치와 팔목의 인대가 늘어난 탓이다. 전·의경들과 몸싸움을 하거나 그들의 방패를 막다 보면 어쩔 수 없다. 지금껏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큰아들 또래의 전·의경들은 유가족들이 가는 곳마다 늘 나타난다. 7월15일 장례식장에서 만난 유씨는 “4월과 6월에 이어 지난 토요일 추모대회 때 같은 자리를 또 다쳤다”며 “전·의경들이 마구 멱살을 잡고 욕까지 하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유씨의 왼쪽 팔에는 검은 멍 자국 대여섯 개가 뚜렷했다. 유씨는 기네스북 신기록에 도전이라도 하듯 여섯 달째 계속 상복을 입고 있다. 다행히 얼마 전 범대위 쪽에서 ‘겨울 상복은 너무 덥지 않느냐’며 유가족의 상복을 여름철 상복으로 바꿔줬다. 마치 유니폼 갈아입듯 상복을 철마다 바꿔 입는, 3년상까지 치르던 조선 시대 이후로는 아마도 최초일 듯한,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기이한 장례문화가 출현했다. 물론 유가족들이 기꺼이 선택한 길은 아니다.

“주검 둘러메고라도 병원문 나서겠다”

유가족들은 참사 6개월째인 7월20일 주검을 둘러메고라도 병원문을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나가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할 계획이다. 더 이상 대답 없는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며 장례식장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게 범대위 쪽의 판단이기도 하다. 참사 초기 주검을 인도받은 검찰이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강제 부검을 실시하자 유가족들은 검찰로부터 다시 주검을 인도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5명의 주감은 여전히 ‘국가 소유’다. 주검을 둘러메고 병원문을 나서는 유가족의 시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가로막힐지도 모른다.

이미 방학을 맞은 상필이도 6개월 만에 거리 구경을 나서는 아빠의 주검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빠가 그랬듯 상필이도 이를 앙다물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과 흐릿한 왼쪽 눈은 아마 비슷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금전과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눈물만큼은 평등한 것이므로.



용산참사 해결책은 없나
정부 ‘제 풀에 꺾이길 기다리는’ 태도부터 바꿔야


박래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박래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쪽은 그동안 정부에 대화할 것을 촉구해왔다. 범대위는 청와대와 총리실이 나서 △대통령의 사과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미공개 수사기록 3천 쪽 공개 등의 문제를 풀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세입자들에게 임대상가를 보장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 등의 문제는 서울시와 용산구청이 나서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범대위는 이런 조건을 내걸면서도,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반면, 정부와 서울시 등은 어떤 공식적 대화 채널도 열지 않았다. 유가족과 범대위가 시간이 지나면 제 풀에 꺾이길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올 뿐이었다. 개신교계의 한국교회봉사단 쪽이 밀린 장례식장 비용을 대신 내주는 조건으로 서울시의 전향적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시는 ‘법에 없는 예외를 만들기 어렵다’며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7월20일 범대위 쪽이 희생자 5명의 주검을 들고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문을 나서겠다고 선언한 까닭이다.
유가족과 범대위는 올 데까지 왔다고 판단하고 있다. 장례식장 안에서의 투쟁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부가 어떤 식의 접촉도 꺼려온 탓이다. 6개월이 아니라 1년이 지나도 정부의 태도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범대위 쪽의 판단이다.
하지만 7월16일 결행하려던 주검 5구 사진 공개는 일단 미뤘다. 윤리적 문제제기가 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박래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사진)은 “모든 걸 신축성 있게 얘기해보자는 것”이라며 “잘 해결되면, 희생자들의 주검을 경기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검찰이 이미 천성관 서울중앙지검장 재임 시절 철거민이 불을 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에 정부로선 법리적으로 사건의 성격 규정을 다시 하기 힘든 상황이다. 다만 철거민 9명을 기소한 사건 수사 기록 가운데 아직 내놓지 않고 있는 3천여 쪽을 공개한다면, 사건 해결의 물꼬를 트는 전환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변호인단 쪽은 현재까지 정부의 태도를 놓고 봤을 때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권영국 변호사는 “수사 기록만 공개돼도 극단적인 행동은 보류될 수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며 “수사 기록을 공개하라고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헌법소원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르면 8월께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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