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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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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세종대왕이 광화문에

현상공모지침서에 명시한 ‘표준영정’의 작가는 친일 전력의 김기창 화백,
시간상 동상 바뀔 여지 없어
등록 2009-07-01 06:00 수정 2020-05-02 19:25

새로 조성되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워질 세종대왕 동상이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서울시는 8월부터 일반에 개방되는 광화문 광장의 세종문화회관 앞쪽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오는 10월9일 한글날에 맞춰 제막하는 것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동상은 정부가 지정한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만들고 있는데, 이 표준영정이 논란의 핵심이다.

지난 4월16일 서울시가 선정한 세종대왕 동상 모형. 김영원 홍익대 교수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 모형은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제작됐다.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지난 4월16일 서울시가 선정한 세종대왕 동상 모형. 김영원 홍익대 교수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 모형은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제작됐다.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일제 찬양 그려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글 관련 단체들은 “세종대왕 표준영정을 그린 운보 김기창 화백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에 등재된 인물”이라며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동상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반발하고 있다. 김기창 화백은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던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그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해 그린 등은 1943년 8월6일치 에 실렸다.

세종대왕 동상의 친일 논란은 사업 초기인 2007년부터 있었다. 당시엔 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상을 옮겨오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2008년 새 동상을 건설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덕수궁의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경승씨가 친일 작가로 알려진데다 동상 크기도 광화문 광장에 세우기에는 작아 새로운 동상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후 서울시는 내부적으로 작가 5명을 지명해 세종대왕 동상을 공모했다. 공모 당시 서울시가 작가들에게 전달한 현상공모지침서에는 “세종대왕의 용안은 문화체육관광부 제정 세종대왕 표준영정을 참고하여야 함”이라고 적혀 있다. 지난 4월16일 서울시는 김영원 홍익대 교수의 작품을 최종 당선작으로 발표했다. ‘뿌리 깊은 나무, 세종대왕’이란 제목의 동상은 가로·세로 5m, 높이 6.2m로 왼손에 책을 들고 오른손을 쭉 뻗은 모양새다.

오는 8월 개방될 광화문 광장의 조감도. 세종대왕 동상은 세종문화회관 앞족에 들어설 예정이다.

오는 8월 개방될 광화문 광장의 조감도. 세종대왕 동상은 세종문화회관 앞족에 들어설 예정이다.

친일 논란과 관련해 김영원 교수는 “현재 동상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친일 논란에 심란하다”며 “표준영정은 회화이고 내 작품은 동상인 만큼 모방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김 교수가 동상 제작 작업을 끝내면 문화체육관광부 동상영정심의위원회가 해당 동상이 표준영정에 맞게 제작됐는지 심의하게 된다. 결국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표준영정을 따르게 돼 있는 셈이다.

동상 건립의 주체인 서울시는 “정부가 표준영정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태도다. 표준영정을 심의하는 문화체육관광부 동상영정심의위원회는 “아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에서 김기창 화백을 친일 작가로 규정하지 않았다”며 판단을 미룬다. 안휘준 동상영정심의위원회 위원장은 “명백한 친일 행위자라면 당연히 표준영정 심의 과정에서 배제돼야 한다”면서도 “아직 진상규명위의 정식 통보가 없기 때문에 일방적인 판단을 내리긴 힘들다”고 말했다.

정작 진상규명위는 오는 11월 말이면 활동이 끝난다. 2005년 시작된 진상규명위의 활동 기간은 4년으로 정해져 있다(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진상규명위 관계자는 “이제까지 1937년 이전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규명했고, 현재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추리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명단을 작성한 뒤에도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한 뒤에야 일반에 발표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상 진상규명위의 결정에 따라 표준영정이 바뀌고, 그에 따라 광화문 광장의 동상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한 상태다.

문화부 “친일 때문에 영정 재지정은 안 될 말”

문화부는 한 걸음 더 나간다. 문화부 관계자는 “작가의 친일 행적 때문에 표준영정을 재지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세종대왕 표준영정 하나를 바꾸려면 애초에 표준영정 지정을 요청한 세종대왕 기념사업회나 김기창 화백 쪽과도 협의를 해야 한다”며 “정말 잘못됐다는 논란이 있으면 모를까 재지정은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30여 년간 표준영정이 재지정된 경우는 고증 잘못이 밝혀진 유관순 열사의 경우뿐이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미술사)는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관변 화가로 전락하면서 관에서 만드는 표준영정 작업에 대거 참여해 이권을 따먹듯 돈을 벌었다”며 “더러운 손으로 그린 그림을 표준영정으로 받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대대적으로 이뤄진 ‘민족의 얼과 역사를 현창하는 사업’을 개선하려면 후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봉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도 “선현의 영정이라는 것은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표상인데 그걸 그린 사람이 민족을 배신한 부끄러운 이라면 표준영정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며 “더 늦기 전에 표준영정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곧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설 세종대왕 동상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선택할지 묻고 있다.


친일파의 표준영정
1970년대 지정 62%가 해당돼


표준영정이란 문화체육관광부 동상영정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제작한 선현들의 영정을 의미한다. 문화부는 표준영정 지정의 목적을 ‘민족적으로 추앙받는 선현들의 동상·영정이 난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1973년 4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충무공 영정을 통일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동상건립 및 영정제작에 관한 심의절차’가 만들어졌다. 현재는 문화부 동상영정심의규정을 근거 법령으로 하고 있다.
정부는 1973년 월전 장우성의 작품을 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뒤 지금까지 79명의 선현에 대해 표준영정을 지정했다. 이 중 2000년 이후 지정된 표준영정은 맹사성 등 14점에 불과하다. 대부분 1970~80년대에 제작·지정된 것이다. 70년대에 지정된 21점의 표준영정 중 62%인 13점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에 친일 화가로 등재 작가의 작품이다.
이당 김은호는 신사임당의 표준영정을, 그의 제자인 장우성은 이순신의 표준영정을, 역시 이당의 제자인 이유태는 이황의 표준영정을 그렸다. 이황 표준영정의 경우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다. 이당의 제자인 김기창 역시 세종대왕을 비롯해 을지문덕, 무열왕 등 총 6개의 표준영정을 그렸다.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이 문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7년 1만원권 화폐가 새로 발행되면서도 논란이 일었다. 당시 화폐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김기창 화백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1만원권 화폐에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을 새겨넣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다. 2005년엔 민족문제연구소가 문화부에 세종대왕 표준영정을 바꿔달라는 내용의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화부는 “화폐 도안은 우리 부 소관이 아니며 화가의 친일 의혹에 대해서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공식 발표 이후에나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2007년 새로 발행된 화폐에는 세종대왕 외에 5천원권의 율곡 이이 표준영정(김은호 작), 1천원권의 퇴계 이황 표준영정(이유태 작)도 작가의 친일 행적이 문제됐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기존에 해오던 방식대로 표준영정에 따라 화폐를 제작했다.
25년간 표준영정을 심의해온 안휘준 동상영정심의위원회 위원장은 “주로 지방자치단체나 문중의 외뢰가 있으면 위원회가 작가를 선정해 표준영정을 제작해왔다”며 “이런 방식의 표준영정 지정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표준영정 심의는 10여 명의 위원이 만장일치제로 진행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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