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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빈 수레 ‘재개발 대책’

서울시 자문위 혁신안, 원주민 재정착·세입자 보상 등 핵심 쟁점 대안 제시 없어
등록 2009-06-19 16:58 수정 2020-05-03 04:25
올해 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미아리 뉴타운. 뉴타운 사업의 경우 30%대에 머무는 원주민 재정착률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으나 이번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의 혁신안에는 관련 대책이 빠졌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올해 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미아리 뉴타운. 뉴타운 사업의 경우 30%대에 머무는 원주민 재정착률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으나 이번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의 혁신안에는 관련 대책이 빠졌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태산이 떠나갈 듯이 시끄럽게 떠들더니 결국 튀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었다. 6월10일 도심 재개발 사업의 새로운 청사진으로 ‘정비사업 프로세스 혁신안’을 내놓은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 얘기다. 애초 자문위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었던 건 오세훈 서울시장이었다. 때는 지난해 4·9 총선 열하루 만인 4월21일. 오 시장은 ‘시민고객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자문위 구성을 공식화했다. 그 글에서 오 시장은 뉴타운과 관련한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자며 “뉴타운은 지정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부터 부동산 가격을 앙등시킨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이어 “그러다 보니 사업비가 높아지고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원주민들은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재정착률이 30%대에 머무르고 있는 점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오 시장은 “뉴타운 사업의 혜택은 전적으로 집 없는 서민과 실소유자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며 책임감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자문위 활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총선 당시 오 시장은 시민들에게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서울 지역에 출마한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들이 너도나도 오세훈이라는 이름과 함께 유권자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뉴타운을 팔았던 탓이다. “오 시장이 우리 지역에도 뉴타운을 지정하기로 약속했다”는 공약이 무책임하게 남발되는 동안 오 시장은 침묵을 지켰다. 뉴타운 예상지구로 언급된 지역의 땅값은 선거 기간에 미친 듯이 뛰었다. 한나라당 후보들이 금배지를 막 받아들고 희희낙락하던 즈음 오 시장은 자문위를 구성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명박 시장 시절 기존 재개발의 문제를 극복하겠다며 내놓은 뉴타운이 막상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정작 그곳에 정착해야 할 원주민들은 쫓겨나고 있다는 비판이 따갑게 일던 때다.

‘공공관리자 제도’ 기대와 우려 교차

자문위는 오 시장이 당장의 화살을 피하기 위한 ‘알리바이’였을까, 아니면 진정성 있는 뉴타운·재개발 정책을 내놓는 전초기지였을까? 답은 자문위가 열세 달 동안의 활동 결과 내놓은 ‘정비사업 프로세스 혁신안’에 들어있다.

우선 튀어나온 쥐 한 마리 얘기부터 하자면, 자문위는 재개발과 뉴타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들을 내놨다. 조합과 유착한 정비업체와 시공사 등이 검은 동맹을 맺고 조합원의 이익을 갉아먹는 행태를 이참에 손보겠다는 의지가 강력히 투영됐다.

가장 눈에 띄는 방안이 ‘공공관리자 제도’의 도입이다. 재개발 때 구청장이 정비업체를 직접 선정하고, 조합추진위원회나 정식 조합이 설계자와 시공사를 선정할 때도 ‘공공관리자’인 구청장이 이를 관리토록 했다. 관리 비용도 공공이 부담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사적인 개발의 성격이 강했던 재개발 사업에 공적인 가치를 상당 부분 강제한 것이다. 자문위는 또 조합 총회 때 주민의 직접 참석 의무 비율을 현행 10%보다 높이고 정비사업의 자료 공개를 의무화할 것을 주문했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요될 정비사업비를 자동으로 산정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대상 지역 주택 소유자들의 동의서를 받는 단계에서 그 내용을 미리 제시할 것도 제안했다. 동의서를 받고 나서 한참 지난 관리처분 단계에 이르러서야 사업비를 제시하면서 분쟁이 일어나는 폐해를 막아보자는 취지다.

이처럼 투명성 강화라는 자문위의 방향 설정은, 이제껏 불투명한 행정 속에 온갖 소송이 줄을 잇던 재개발 비리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비판이 이는 까닭은 더 중요한 알맹이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오 시장이 말한 원주민 재정착률을 높일 방안은 슬그머니 빠졌다. 낮은 재정착률의 원인인 땅값 급등 문제를 어떻게 풀지 답이 없다. 서울시에 등록된 한 정비업체 사장은 “원주민 재정착이나 뉴타운 인근 전세 대란, 아파트 위주의 획일적 개발 등 주요 쟁점에 대한 대안 제시도 없이 왜 서울시가 자문위의 혁신안을 서둘러 발표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수술이 필요하다고 진단해놓고는 빨간약만 처방하는 꼴”이라고 혹평했다.

자문위는 올 1월 용산 참사가 일어난 뒤에는 세입자 대책 마련에서도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럽다. 세입 자영업자들에게 주는 휴업보상금 지급을 기존 석 달치에서 넉 달치로 늘리는 등 근본 처방이 되기에는 너무 모자란 대책을 내놨다.

재개발 때 구청장이 직접 정비사업자를 선정하고 사업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공공관리자’의 구실을 하도록 한 대책에도 기대와 우려가 겹친다. 행정관청인 구청에 재개발과 관련한 좀더 많은 권한과 의무를 동시에 줌으로써 사업 진행 과정에서 사적 욕망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부패가 줄어들 개연성은 커졌다. 반면 단체장들의 비리가 끊이지 않는 현재 기초지방자치단체 수준을 놓고 볼 때 구청장이 그야말로 ‘선한 공공관리자’가 될 수 있을지 의문도 제기된다. 권순형 J&K부동산투자연구소 소장은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시공사의 로비와 뇌물 공여는 줄어드는 등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서도 “수백 개 정비사업체 가운데 구청장이 어떤 기준으로 사업자를 선정할지와 관련해 논란이 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한발 더 나아갈까

애초 입법 권한이 없는 서울시 자문위의 활동 자체가 이미 결정적 한계 속에서 시작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개발 대책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과 그 시행령을 뜯어고쳐야 하는 사안이다. 서울시는 7월까지 자문위 안을 토대로 시 차원의 명확한 제도개선안을 결정한 뒤 국토해양부와 협의해 정부입법 형태로 이번 대책을 소화할 방침이다. 결과는 밝지 않다. 자문위에 참여한 한 인사는 과의 통화에서 “자문위 내부 논의 때 국토해양부 관계자도 참석했는데, 자문위 안이 개발을 위축시킬 것으로 우려하더라”며 “국토해양부와의 본격적인 논의 과정에서 자문위 안마저도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용산에서 참사를 겪고도 인간의 얼굴을 한 재개발과 뉴타운 사업을 어떻게 할지 이명박 정부는 모르쇠하고 있다. 그나마 서울시가 칼을 빼들었다. 서울시는 앞으로 자체 제도개선안을 내놓고 국토해양부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문위가 빠뜨린 원주민 재정착률 제고 방안 등 근원적 문제까지 덧붙여 제기할 수도 있고, 반대로 투명성 확보라는 자문위 안의 ‘쥐 한 마리’마저 빼앗길 수도 있다. 이번 대책이 이 정부와 오 시장의 면피성 알리바이가 될지, 중요한 전환점이 될지 다시 판단하는 데는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오 시장은 내년 6월2일 치러질 지방자치선거에서 재선을 노린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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