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9일 밤 11시. ‘질주 2009’ 팀원들이 숙소로 모여들었다. 이날 잠자리로 삼은 곳은 서울 용산 참사 범국민대책위 사무실. 서울 구로공단의 기륭전자, 충남 서산의 동희오토, 경북 구미 코오롱 등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미디어 생산자 네트워크 ‘미행’, 불안전노동철폐연대 등에 소속된 사람들과 촛불 시민까지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알고 서로 모였을까? 르포작가 이선옥씨는 “전국의 장기투쟁 사업장을 방문해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세상을 향해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지난 4월21일 청와대 들머리에서 출발해 대구∼구미∼서산∼광주∼안산∼인천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9박10일 일정의 마지막 밤이었다.
제대로 씻고 자기 힘들었던 거친 ‘질주’ 속에서도 하루 일정을 마칠 때면 정리·평가 모임이 열렸다. 이날 하루만 해도 기륭전자와 콜트콜텍 등 해고자들의 투쟁 현장과 서울역 용산 참사 추모행사를 다녀온 터였다. “(아무리 질주라지만) 하루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사람답게 살 여유가 있어야 했다”는 누군가의 푸념 소리는 팀원들의 박장대소를 불렀다. “하도 오랫동안 같이 싸워 가족처럼 친해진 기륭언니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는 고백도 이어졌다. 금속노조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의 장동준 사무부장은 “용산에 오니 떼잡이, 전문 시위꾼 이런 말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며 “절대다수를 위한 (사회적 약자들의) 처절한 싸움을 얼마나 얕잡아보는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질주’가 가로지른 궤적은 어둡고 무거웠다. 비정규직지회 사람들을 공장문 밖으로 내몬 동희오토는 자본엔 ‘꿈의 공장’일지도 모른다. 동희오토는 기아차 ‘모닝’의 조립생산을 도맡아하는데, 생산라인 전부를 다시 사내 하청업체에 위탁하는 ‘기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자리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한 셈이다. 16개 사내 하청업체의 850여 명 노동자들은 모두 1년짜리 비정규 계약직이며, 지난해 1년차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인 3770원이었다. 5년차 노동자가 주야 10시간 노동에 주말 특근까지 ‘살인적 노동’을 해서 받는 급여는 상여금을 포함해 월 160만~170만원 안팎. 다른 완성차 업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모닝’은 지난 1~3월 단일 차종 내수판매 1위를 기록할 만큼 잘나가고 있다. 모닝은 최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서울 2009 모터쇼에서 자동차산업 비정규직들이 뿌린 선지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질주단은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르듯 높은 곳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광주의 로케트전기에서 해고된 유제휘씨와 이주석씨는 옛 전남도청 앞 교통관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철탑 위에서 50여 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1.6㎡(0.5평) 남짓한 원형 공간에서 한 사람이 새우잠을 청할라치면, 다른 한 사람은 등을 난간에 기댄 채 앉아 있어야 한다. 이선옥씨는 “질주 팀원들이 만난 로케트전기 해고자들은 2007년 9월1일 해고된 뒤 지금까지 복직투쟁을 이어온 사람들”이라며 “고공농성만 세 번째라는데 회사 쪽은 묵묵부답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정규직과의 차별 문제로 시름해온 비정규직들은 최근 경제위기 국면에서 극심한 고용 불안을 겪고 있다. 산업구조와 고용 형태에 따른 ‘온도차’는 있겠지만,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의 고용 안정을 위한 ‘안전판’ 정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전후방산업에 대한 연관 효과와 고용 규모가 큰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비정규직 밀어내기’식 전환배치 사례들이 크게 늘고 있다. 기존 공정에서 잉여 인력으로 분류된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담당하던 업무로 옮기고, 비정규직들은 희망퇴직이나 휴직을 시키는 것이다.
GM대우차 부평공장의 사내 하청업체인 대일실업에 소속된 신현장씨는 10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5월1일부터 무급휴직에 들어갔다. 젠트라의 왼쪽 앞문을 조립하던 신씨의 자리에는 GM대우 정규직이 옮겨왔다. GM대우차의 전환배치는 지난 3월 노사가 맺은 고용안정협약의 후속 조처다. 금속노조 GM대우 사내하청지회의 김지환 대외협력부장은 “사내 하청업체의 직접적인 대량 해고만 없었을 뿐, 기약 없는 무급휴직을 통해 퇴사를 유도하는 형국”이라고 하소연했다. 쌍용차의 경우 노사가 지난 2006년과 지난해 각각 정규직 420명과 350명에 대한 전환배치에 합의했다. 같은 수의 비정규직들은 사실상 해고됐다. 현대차 울산2공장은 지난해 말 에쿠스 단종에 따른 후속 조처로 정규직 498명을 울산 내 다른 공장들로 분산·배치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115명은 하청업체 폐업 등으로 해고됐다.
삼우정밀·타타대우상용차의 용기최근 상황들을 보면 정규직 또는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자들의 신분이 단순한 임금·복지 차별 문제를 넘어서 살생부에 오를지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기업들이 생존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세 국면에 몰린 노조가 선택할 카드가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정규직 전환배치와 맞물린 비정규직 해고 문제에는 솔직히 명쾌한 해법이 없다”며 “과도기적 임시 처방이라면 돈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정규직노조와 회사가 일자리를 잃게 된 비정규직들을 위한 추가 보상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연구위원은 “정부도 자동차산업지원금을 신차 가격을 깎아주는 데만 쏟아붓지 말고, 일자리를 잃게 될 노동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경제위기 앞에서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를 외치는 목소리는 자꾸만 작아지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희망의 불씨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구 성서공단 내 삼우정밀은 노동조합이 최근 위협받던 이주노동자의 일자리를 지켜낸 사례다. 지난 2007년 국내 최초로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하나의 노조에 가입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줬던 이 회사도 경제위기의 한파를 비껴가지는 못했다. 회사는 지난해 12월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30% 줄어드는 등 인력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통보해왔다. 노조는 “애초 약속했던 재고용 합의를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김태업 삼우정밀지회장은 “이주노동자 18명이 일차로 해고되면, 40여 명의 한국인 노동자들도 당연히 2차적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 있다”면서 “이를 막기 위해 올 초 3개월 동안 한국인 노동자들이 ‘고용유지 휴업’을 2개조로 나눠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휴직 기간에 노동자들은 평균임금의 80%를 받았는데, 이 중 70%는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으로 충당됐다. 회사로서는 월 6천만원 이상의 비용 절감 효과를 본 셈이다. 삼우정밀은 최근 수출 물량이 회복되면서 정상 근무 체제로 돌아온 상황이다.
전북 군산의 타타대우상용차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굳게 껴안은 사례다. 이 업체는 이달 초 전체 사내 하청 노동자 320명 중 42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금속노조 타타대우상용차지회는 2003년부터 단협 요구안에 사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포함시켰다. 2003년 25명, 2005년 30명, 2007년 40명, 2008년 30명 등 모두 205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지난해 교섭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매년 사내 하청 비정규직의 10%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회사 쪽과 합의했다. 이 업체도 트럭 생산 물량이 감소하면서 지난해 말부터 부분휴업 중이지만, 노조는 정규직 전환을 유예하자는 회사 쪽의 제안을 거부했다. 정규직 전환은 원칙의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속노조 전체가 일관된 연대의 대오를 이루지 못하는 게 슬픈 현실이지만, 개별 사업장들 중에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을 끌어안고 가는 사례들이 있다”며 “이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기획한 동희오토 지회장은 구속질주 팀원들의 정리모임 자리에서도 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연대’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코오롱에서 해고된 최일배 전 노조위원장은 “13년간 정규직이었다. 입사 때부터 정규직이 안 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뽑는 걸로 생각했다”며 “해고되고 5년 싸움을 벌인 뒤에야 (노동자들끼리 서로를) 비교하게 하고 분열시키는 자본의 생리를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해고될 당시만 해도 코오롱 구미공장 노동자 1700명 중 비정규직은 200명뿐이었지만 지금은 1500명”이라며 “정규직들도 비정규직 동지들과 함께할 때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비정규직 해고→정규직 해고→정규직 일자리의 비정규직화’ 공식에 저항하려면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가 절실하다는 설명이었다.
질주는 고단한 비정규직 차별과 냉소의 벽을 ‘경쾌하게’ 돌파했지만, 서로를 보듬는 자리가 수월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질주’를 처음 기획한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이백윤 지회장은 출정식 날인 4월21일 구속됐다. 지난해 12월17일 동희오토 공장 앞 집회와 관련한 공무집행방해 및 업무방해 혐의다. 민주노총 충남지역본부와 동희오토 비정규직지회 관계자 등은 영장 실질심사 뒤 유치장 입감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경찰 쪽에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산경찰서 쪽은 “(이들이) 입감을 거부했기 때문에 팔을 꺾고 바닥에 눕혀 수갑을 채운 것은 당연한 법집행”이라고 반박했다. 질주 단원들은 4월30일 천막농성 500일을 맞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를 찾았을 때는 집회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이 빚어져 4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질주 단장을 맡았던 이청우 동희오토 비정규직지회 정책부장은 “경제위기의 국면에서 비정규직들은 소리소문 없이 희생되고 있는데, 비정규직 희생을 담보로 고용보장을 받는 정규직 노조들이 있다는 점은 안따까울 따름”이라며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노동자들끼리 뭉쳐 자본과 정부의 경제위기 책임을 묻고 일자리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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