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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행정공무원 하실래요?


촛불 재판 개입 논란 배경이 된 법원 관료조직화… 경력법관제·승진제·근무평정제로 구조화
등록 2009-03-20 01:08 수정 2020-05-03 04:25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논란이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사법부가 군사독재 시절 ‘권력의 시녀’라고 불릴 정도로 굴종의 세월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21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당한 개입의 주체가 법원 내부 인사라는 점에서, 또 그 내부 인사가 최고 법관인 대법관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크다. 사건 초기 여당과 대법원을 중심으로 “원론적인 이야기들이 와전됐다”거나 “대법원장도 비슷한 생각”이라며 수습을 시도했지만, 재판 외압 논란에 대한 국민 여론은 따가웠다. 이제 법원 내부 인사들로 꾸려진 대법원 진상조사단(단장 김용담 법원행정처장)이 얼마나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놓을지, 또 신 대법관이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어떤 결론을 내릴지에 관심이 모이는 분위기다.

상당수 법관들은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 논란의 배경에 법원의 관료조직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2월2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이 신임 법관들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상당수 법관들은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 논란의 배경에 법원의 관료조직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2월2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이 신임 법관들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승진 안 되면 쓸쓸하게 짐 싸는 관례

그렇다면 법원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고 신영철 대법관이 사퇴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상당수 판사들은 이런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건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신 대법관 개인의 캐릭터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겠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고도 6개월 이상 쉬쉬하며 지내올 수 있었던 바탕에는 구조적인 요인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판사들은 그 구조적인 요인으로 ‘법원의 관료조직화’를 손꼽는다.

이같은 견해는 지난 3월2일 송승용 울산지법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송 판사는 ‘사법부를 흔드는 두 가지 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제가 보기에 위와 같은 사태의 원인은 바로 법관의 계층적인 서열구조와 승진제도, 그리고 이로 인하여 비롯된 법관의 관료화”라며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동등한 동료 법관에 불과했다면 (재판에 대한 언급이) 단지 선배 법관의 조언에 불과한 것이지만,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법관에 대한 평정권자 또는 평정권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위와 같은 취지의 말은 간섭이 되고 압력이 되는 것”이라고 썼다. 법에는 재판부별로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돼 재판하도록 돼 있다지만, 사법부의 조직체계에서 엄연히 상관이 존재하기에 그런 발언이 간섭과 압력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사실 송 판사가 지적한 법관 서열구조와 승진제도는 우리나라 사법부의 고질적인 문제다. 현행 법원조직법(5조 1항)에서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을 판사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판사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일반 판사의 세 직급으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조문에 불과할 뿐, 실제는 전혀 딴판이다. 판사들은 임용 뒤 지방법원 합의부 배석판사 → 지방법원 단독판사 → 고등법원 배석판사 → 대법원 재판연구관 → 지방법원 부장판사 →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순서로 ‘단계’를 거치게 된다. 뒤로 갈수록 더 중요하고 높은 자리이기에 단계가 오르면 법관의 계급이 높아진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대부분의 법관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지방법원 부장판사까지와는 달리,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대상자 가운데 일부만 선발되기 때문에 일반 공무원 조직 못지않은 치열한 승진 경쟁까지 펼쳐진다. 그 결과 매년 2~3월 법관 인사 때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발령을 받은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에게는 동료 판사들이 앞다퉈 “영전을 축하한다”며 덕담을 건네는 반면, 승진에서 누락된 판사들 상당수는 조용히 사표를 쓴 뒤 쓸쓸하게 짐을 싸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다.

서열주의 피하려다 또 다른 관료화 불러

우리나라 사법부 인사와 조직체계가 이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 경험이나 법조 실무 경험이 없는 사람을 법원 내부에서 교육하며 완전한 법관으로 양성해가는 ‘경력법관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력법관제 아래서는 판사들이 승진과 경쟁을 피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몇 년 전부터 시행된 근무평정 제도는 결과적으로 법원 조직의 관료화를 촉진했다.

정부 수립 이후 법원에서는 사법시험 점수와 연수원 성적에 바탕한 서열을 기준으로 인사가 이뤄져왔다. 동기 사이에서 임용 성적이 좋은 판사는 아무리 게을리 일해도 좋은 보직에서 일하다가 먼저 승진하고, 임용 성적이 뒤처지면 열심히 판사 생활을 해도 보직과 승진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등산을 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서열순을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같은 비합리적인 서열 기준은 자연스레 없애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그 결과 1990년대 후반 법관 근무평정 제도가 도입됐다. 이후 2004년께부터 근무평정이 서열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법시험·연수원 성적보다는 판사로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됐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변화였다. 이후 법원에서는 일반적인 순환 인사나 각종 행사의 자리 배치, 차량 지급 등 대내외적인 의전에서 동기 가운데 연장자를 우선하도록 했고, 근무평정은 해외연수자 선발 등에서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하지만 이같은 변화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을 불러왔다. 판사들로 하여금 평정권자인 법원장이나 평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석부장판사 등의 눈치를 보게끔 만들었다는 점이다. 경력 10년차인 한 판사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성적에 의한 서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워낙에 ‘구악’이었기에 (재판의 독립을 저해하고 사법관료화를 부추길 수도 있는) 근무평정 제도를 별 문제의식 없이 도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간섭이나 압력은 비단 이번 사건에 국한되는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지방의 한 법원에 근무하는 4년차 법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사실 법원 조직의 관료성 때문에 재판 간섭은 상시적으로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구체적이고 노골적인 간섭은 아니고, 간접적이고 교묘한 간섭이다. 예를 들어 어떤 관심 사건을 찍어서 그 사건은 되도록 빨리 끝내달라, 또는 연말까지는 끝내달라고 한다. 법원행정처에서 특정 사건을 열람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면 솔직히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선 법원장도 동료 판사일 뿐
사법부도 하나의 조직이고 피라미드형의 승진구조가 자리잡고 있어 판사들은 유무형의 압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평일 낮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청사 중앙현관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사법부도 하나의 조직이고 피라미드형의 승진구조가 자리잡고 있어 판사들은 유무형의 압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평일 낮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청사 중앙현관의 모습.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여기에 최근 몇 년간 이용훈 대법원장이 시도한 사법부 운용에서의 변화도 결과적으로 법원의 관료화 논란을 부추겼다. 이 대법원장이 3~4년 전 공판중심주의와 구술중심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는데,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는 “관료적인 방식의 일 추진 아니냐”는 거부감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지난 3월8일 김형연 서울남부지법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신영철 대법관님의 용퇴를 호소하며’라는 제목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법부 조직에 행정부 문화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을 섬기는 법원’이라는 구호 아래 사법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판사는 피라미드 조직에 편입됐고, 어느덧 판사도 피라미드 조직의 조직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자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촛불 재판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는 비대하고 강력해진 사법행정 권력이 자제력을 잃은 채 판사를 순화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고 부하 직원으로 여겨온 풍토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용훈 대법원장의 변화 시도 전체를 ‘관료적’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구술중심주의와 공판중심주의에 대한 강조는 원칙적으로 당연한 말이고, 지금까지 잘못 흘러왔던 재판 방식을 바로잡는 의미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구술중심주의·공판중심주의가 방향은 맞지만 일선 판사들 상당수가 귀찮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올바른 방향으로 가자고 하는 것을 두고 법원 관료화 얘기를 하는 판사들도 있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일반적인 권고조차 재판 개입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말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추구한 변화의 방향과는 별개로 추진 방식이 지나치게 관료적이었다는 질타가 법원 내부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은 전체적인 시스템 개혁에서 찾을 수밖에 없고, 그 답은 법조일원화로 이어진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검사나 변호사로 10년 이상 활동한 경력이 있는 법조인을 판사로 충원하자는 것이다. 법원에서 오래전부터 법조일원화를 주장해온 정진경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법으로는 똑같은 판사로 규정하고 있지만, 갓 임용된 판사와 20년 재판한 판사가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경력법관제를 고수하는 한 계급화·서열화된 구조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승진 시스템을 통해 판사들을 거를 수밖에 없다”며 “예를 들어 경력 10년 이상, 나이 40살 이상인 법조인으로 기준을 정하고 그 가운데서 엄정한 절차를 거쳐 판사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사법개혁위원회에서도 “근본적으로 법관 임용 방식을 변경해 법조일원화를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꾸준히 개진했고, 그 결과 2005년부터는 매년 검사·변호사 가운데 10~20명가량이 판사로 임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법연수원 졸업과 함께 임용된 판사들의 비율과 비교해볼 때 너무 미미해 서열화와 관련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외국의 예를 살펴보자면 미국에서 연방 판사는 기존 법조 경력자 가운데 뽑히는데, 한번 뽑히면 종신직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법원장도 판사의 동료일 뿐이어서, 압력 논란이 일 이유가 없다. 정진경 부장판사는 “미국에서는 (완전 자율화의) 부작용으로 판사들마다 일처리가 한없이 늦춰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국민이 대표로 선출한 의회에서 판사로 하여금 (늦춰지는 이유를) 직접 리포트하게 한 것이 효과를 봤다”고 덧붙였다. 이는, 재판과 법관의 독립성은 최대한 보장하면서 이들에게 합리적인 업무 감시나 제재를 어떻게 가할 것인지에 대해 미국에서도 여러 논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무분담 권한을 법관회의로”

법조일원화라는 거시적인 대안과 달리 상대적으로 사소하지만 곧바로 실천이 가능한 미시적인 대안도 있다. 우선, 이번 사건에서 보듯이 정치권에서 주요 이슈가 되는 사건 등을 특정 판사에게 임의로 배당할 수 있도록 한 대법원 예규를 고쳐야 한다. 또 조정(판결 선고 전 당사자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 성립률과 영장 기각률 등 과도하게 계량화된 수치로 판사의 능력을 판단하는 일도 재고가 필요하다는 게 일선 판사들의 지적이다.

표면화되고 있진 않지만, 사무분담 권한의 재조정도 중요한 이슈다. 법원재판사무 처리규칙 4조 1항에서는 “각급 법원(지원 포함)의 재판사무 등에 관한 사무분담은 해당 법원의 장이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이 추구해야 할 원래의 가치와 조직문화에 근거해 보자면, 사무분담 권한은 ‘관리자’인 법원장이 아니라 ‘당사자’인 법관회의에서 행사하는 것이 맞다. 한 고위 법관은 “내 기억으론 1990년대 대법원장이 갖고 있던 사무분담 권한을 법관회의로 넘겼던 적이 있다. 누구를 형사부로 배치할 것이냐, 민사부로 배치할 것이냐를 법관회의의 의결사항으로 명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있어 중요 사안은 법원장이 결정할 수 있도록 슬그머니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법원 관료화 논란과 관련해 가장 시급한 대목은 법관회의가 사무분담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법원행정처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말 잘 듣는 엘리트 판사?


일선 판사들이 법원의 관료화를 지적하며 가장 많이 언급하는 대목은 대법원 법원행정처다.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인사·예산·회계·시설·통계·송무 등을 담당한다. 한마디로 법원행정을 총괄하는 곳이다. 법원행정처 판사들은 재판이 아닌 기획 등 행정업무를 수행하는데, 법관들 사이에서는 요직으로 손꼽힌다. 인원도 적어 한 기수에서 기껏해야 10%가량만 법원행정처를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 평판사들은 법원행정처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인사상 혜택을 받는다며 불만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의 한 판사는 “일선에서 그런 말들이 나올까봐 법원행정처 출신들은 부장판사로 승진해도 지원장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또 지방으로 보낼 때도 광주·목포·순천·통영 등 서울에서 먼 곳으로 주로 보낸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 출신들이 되레 역차별에 시달린다는 얘기다. 비교적 유능한 이들이 발탁되는 측면도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유능한 사람들이 법원행정처에 발탁되고, 선택받은 똑똑한 사람들이 위에 충성을 다하고, 그러니까 계속 잘나가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들의 경력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들의 경력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가운데 유독 법원행정처 출신이 많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2006~2009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10명 가운데 법원행정처 출신은 7명에 달했으며, 나머지 3명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쳤다(표 참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대검 중수부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청구한 구속영장을 심사하는 만큼 이들의 구속수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큰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다. 이 자리에 법원행정을 맡았던 이들이 주로 온다는 점은 어색한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검찰에서는 대법원장의 뜻을 알아서 잘 받들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을 영장전담판사로 보내 수사에 제동을 걸도록 하는 것 아니냐며 불만스러워하기도 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목전에 둔 대상자들이 영장전담판사를 맡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승진을 앞두고 있는 만큼 인사권자의 의중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년차인 한 판사는 “무난한 사람을 영장전담판사에 앉히고 그 자리에서 별 사고가 없으면 형사합의부 부장판사로 보낸 뒤 승진시켜주는 관례에 대해 판사들 사이에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대법원장 의견을 관철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말들이 조심스레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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