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을 하면 3대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굶어죽는다.”
식민지배에서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동안 왜곡으로 점철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자조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누가 처음 만들어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 말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 삶 속에서 보거나 겪은 바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과연 얼마나 맞을까?
은 경술국치 99돌과 3·1운동 90돌을 맞아 실증적인 분석을 시도해봤다. 후손 전수조사는 물론 정확한 재산 파악도 어려운 만큼 기술적으로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 결과, 친일행위를 대가로 얻은 재산인 것으로 판명돼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진 토지의 소유주들에 주목했다. 지금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국가귀속 결정을 내린 땅의 소유주는 총 433명으로, 이들은 을사오적 등 매국노와 중추원 참의 이상을 지낸 골수 친일파 400여명으로부터 땅을 물려받은 후손들이다. 은 이들의 주소지 자료를 단독 입수해, 독립유공자의 주소지와 비교·분석해봤다.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들의 전국 주소지 분포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대목은 서울 지역 거주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점이다. 2008년 현재 전체 국민(4954만 명) 가운데 서울 지역에는 20.6%인 1020만 명이 사는데,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 가운데 서울 거주자의 비율은 54%에 달했다. 반면 전체 국민의 16%와 10.4%가 살고 있는 부산·울산·경남 지역과 대구·경북 지역에 거주하는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 비율은 각각 3.5%와 0.9%에 불과했다. 광주·전남 지역도 인구 비율(6.7%)에 비해 국가귀속 토지 소유자 비율(0.5%)은 현저히 낮았다.
이와 달리 독립운동 유공 연금 수혜자(당사자 또는 유족 1명)는 비교적 전국에 고르게 분포했다. 보훈처가 내놓은 전국 연금 수혜자 5483명의 주소지 자료를 보면, 서울 지역 거주 비율이 30.1%로 전체 인구 비율보다 10%포인트 가까이 높았지만, 대부분 지방에서는 전체 인구 비율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양쪽의 ‘집중도’가 높은 서울 지역에 초점을 맞춰 분석해봤다.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들은 △서초구(30명) △강남구·용산구(각 28명) △종로구(20명) 등지에 많이 살고 있었다. 부유층이 많이 살고 있는 강남권과 양반·전통 부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종로가 강세를 나타낸 것이다. 강남구에 부유층이 많은 만큼 재산을 환수당할 처지에 놓인 친일파 후손들도 많이 사는 것으로 보인다. 타워팰리스에 거주하는 등 ‘초부유층’도 상당수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 조선왕조의 지배층을 형성한 왕족과 양반 상당수가 일제시대에 고스란히 기득권층으로 옮아간 만큼 이들이 주로 거주하던 종로에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들이 많이 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눈에 띄는 것은 용산구의 존재다. 이는 전체 거주자 수와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용산구에는 2008년 현재 23만8천여 명이 살고 있으며 서초구에는 40만6천여 명이, 강남구에는 55만8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3개 구에 거주하는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가 28~30명으로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용산구의 친일 후손 거주자 비율은 강남구·서초구 등에 비해 2배 가까이 높은 셈이다.
왜 그럴까? 김정동 목원대 교수(건축공학과)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놨다. “서울에서도 종로구, 그 가운데서도 경기고(현재 정독도서관 자리)가 있던 회동 일대는 경복궁이나 조선총독부와 가까워 친일파 또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남쪽에서 경복궁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위치한 이곳이 이른바 ‘재래형 친일파’들이 살던 곳이다. 경복궁을 바라보고 왼쪽에 위치한 효자동에는 관리들이 많이 살았다. 이에 반해 용산은 ‘신흥 친일파’들의 거주지라고 할 수 있다. 개항 뒤 일본인과 친일파들이 맨 처음 남산 일대에 터를 잡았는데, 나중에 이들이 용산 청파동 쪽이나 장충동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그 자리는 요정이나 요릿집으로 바뀌었다. 장충동 쪽으로는 부유한 샐러리맨들이 주를 이뤘다면, 용산 청파동 인근으로 옮겨간 이들은 금융계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를 이뤘다. 아무래도 서울역이나 한강과 가까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빠져나가기 용이한 곳이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용산이라는 지역은 과거 일본인이나 그 뒤를 쫓아다니던 친일파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곳인 셈이다. 실제로 민씨 일가 친일파의 거두였던 민영휘의 후손이 용산구 동부이촌동과 한남동 등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는 강원 춘천시 남이섬 등 전국 각지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완용 등과 조선 제일의 부자 자리를 놓고 다퉜던 인물이다.
서울 내 자치구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난한 곳인 구로구와 금천구에는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가 한 명도 살고 있지 않았다.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 분포와 관련해서는, 행정소송·행정심판 제기자 주소지 분포도 눈길을 끈다. 국가귀속 결정이 난 뒤 국가를 상대로 귀속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까지 제기한 이들은 모두 85명인데, 이 가운데 서울 거주자는 62명으로 무려 73%를 차지했다. 비수도권 거주자 가운데 행정소송을 제기한 이는 한 명에 불과했다. 이는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의 서울 거주 비율이 높지만, 그보다도 더 높은 것은 그들의 투철한 ‘권리 의식’임을 보여준다. 서울 내 자치구별로 보자면 △용산구 15명 △종로구 9명 △강남구·마포구 각 8명 △서초구 7명 순으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이들이 많았다. 여기서도 용산 지역이 높게 나온 이유는 민영휘의 후손이 집중적으로 법적인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행정심판은 행정소송보다 적은 12건이 제기됐는데 서울이 6건으로 절반을 차지했으며, 그중에서 강남구 거주자가 2명이었다. 지방 가운데는 대구 수성구 2명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서울의 자치구별 독립유공자 비율은 어떨까? 보훈처의 연금 수혜자 자료는 자치구별 거주 현황을 담고 있지 않아, 다시 서울지방보훈청의 ‘독립유공자 무료진료증 발급현황’을 살펴봤다(무료진료증은 독립유공자 전원에게 발급된다). 이 자료를 보면, 독립유공자도 부자 동네에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서울 전체 인구 가운데 강남구 거주 비율은 5.5%인데, 서울의 독립유공자 1723명 가운데 강남구 거주 비율은 7.5%였다. 서울 인구의 4%가 살고 있는 서초구에 주소지를 둔 독립유공자 비율은 5.1%였다. 서울 인구의 1.7%가 거주하는 종로구에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비율은 3.5%였다. 독립유공자들도 강남구·서초구·종로구에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 가운데 이 3개 구의 거주자 비율은 각각 12%·12.8%·8.5%로, 독립유공자에 비해 훨씬 높다. 서울 인구의 2.4%와 4.2%가 살고 있는 금천구와 중랑구에 주소지를 둔 독립유공자는 각각 1.5%와 2.7%에 그쳤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굶어죽는다’는 말은 사실과 다른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분석의 대상이 된 표본의 성격을 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우선, 생명과 재산 등 거의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경우도 적을뿐더러 대가 끊긴 경우도 상당수다. 일제 말기까지도 강경한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나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받은 상당수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연금을 받거나 무료진료증이라도 받을 후손조차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완용 등 친일 정도가 가장 높은 매국노형 친일파들 상당수는 이미 국내 재산을 처분해 해외로 이민간 경우가 대다수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국가귀속 토지 소유주들이 친일파 후손의 대표 격이라고 보는 데에도 무리가 있는 셈이다. 물론, 앞서 살펴봤듯이 그런 이들조차도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용산·종로 등 부촌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조세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은 “친일파 후손이나 독립유공자 모두 해외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친일파 후손은 대부분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지만 독립유공자는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진짜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고도 후손이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는 경우는 주변을 살펴봐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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