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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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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입속을 보다


1박2일을 올라간 3445m 고지 남체바자르에 차린 ‘일일치과’, 이중 통역을 거쳐 200명의 주민들에게 다가가
등록 2009-02-13 09:08 수정 2020-05-02 19:25

섣달 그믐날인 1월25일 일요일 아침. 남체바자르의 ‘쿰부 로지(Lodge·여관)’ 지하 1층에 치과 진료실이 열렸다. 로지의 방 하나가 하루 만에 탈바꿈한 것이다. 치과의사 석도준(36)씨는 휴대용 유니체어(치과 치료용 의자)에서 석션을 시도해본다. 해발 3445m. 제대로 작동할까 걱정이었다. 35kg이 넘는 기계를 포터가 힘들게 지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석션장치에서 물은 정상적으로 뿜어져나오지만, 무기력한 전압에 다른 전동 도구를 함께 사용하면 힘이 달린다. 그나마 남체바자르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보다 전력 사정이 좋은 편이다. 하루 10시간씩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카트만두였다면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전 10시. 로지 입구 문 밖에서 임병웅(57)씨가 번호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10시가 되자마자 이 ‘하루치과’의 단장인 이동준(41·안양 서울수치과 원장·푸르메치과 자원의사)씨는 최연소 원정대원 박창희(12)군의 흔들리던 이를 하나 뽑았다. 개시다. 1월22일 새벽 인천공항을 출발해 카트만두로, 여기에서 경비행기를 이용해 루크라로, 다시 이틀간 걸어서 남체바자르에 이른 29명 ‘엄홍길과 함께하는 푸르메재단 네팔 미소원정대’의 치과가 개장 준비를 마친 것이다.

치과의사 석도준씨가 환자의 이를 때우기 위해 장해인씨가 만들어온 미라클을 처치하고 있다.

치과의사 석도준씨가 환자의 이를 때우기 위해 장해인씨가 만들어온 미라클을 처치하고 있다.

그 전날 미소원정대 치과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인천공항에서 탑승할 때 압수당한 알코올을 카트만두에 도착한 한밤중에 부랴부랴 마련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남체바자르에 도착해 준비해온 의료 기자재 짐을 풀다가 마취제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동준 원장은 남체바자르의 유일한 치과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이곳에 오는 동안 트레킹 속도가 꼴찌에서 두 번째쯤 됐던 이 원장인데, 가파른 길을 오르는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뒤따르던 사람이 헐떡였다. 남체바자르 치과는 10개월을 열고 비수기인 12월부터 1월까지 문을 닫는다. 열쇠는 치과의사의 오빠인 쿰부 로지 사장 뱀바 카미가 갖고 있었다. 문을 열었더니 마취제는 히말라야 신이 도운 듯 기다리고 있었다. “마취제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정말 다행입니다.”

제일 먼저 한 일 ‘포기’

53종의 의료 기자재를 여러 번 개수를 세어 확인하고 짐을 쌌지만 어디선가 샜다. 진료 차트가 없는 것도 뒤늦게 발견됐다. 이곳 학생들에게 전해주려고 함께 들고 온 노트를 대신 쓰려다 찢기가 번거로워 A4용지에 환자 이름과 기록 사항을 적었다.

침상은 두 개가 마련됐다. 이동준 원장과 석도준씨가 침상 하나씩을 맡았다. 하나뿐인 유니체어는 석도준 원장의 침상 곁에 뒀다. 이렇게 되면 이 원장은 주로 발치를, 석도준씨는 신경치료·스케일링 등을 맡게 된다. 석도준씨의 부인이자 역시 치과의사인 전형복(36)씨는 병실 컨트롤을, 이금숙(34) 전남대 치내과 교수는 진단을 맡았다.

남체바자르로 올라오는 도중 치과의사 4명은 틈틈이 모여 팀워크를 맞췄다. 전형복·석도준 부부는 그렇다 치고, 다른 이들은 만나본 적도 없는 이들이다. 팀워크를 뭉쳐주는 밥풀은 ‘걱정’이었다. 하루 동안의 치과다. 치과 치료가 하루에 다 끝나는 경우는 갑작스레 떨어진 임플란트를 다시 끼우러 오는 식의 색다른 경우가 아니면 없다. 하루 만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뭘까. 이렇게 어렵게 와서 생색내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남체바자르 전경. 고도 3445m의 남체바자르는 산의 지형을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뒤로 보이는 것은 가우리 상카르산.

남체바자르 전경. 고도 3445m의 남체바자르는 산의 지형을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뒤로 보이는 것은 가우리 상카르산.

이중 통역으로 진단이 이루어졌다.

이중 통역으로 진단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포기’였다. 할 수 있는 선을 정하는 것이다. 이동준 원장은 말한다. “아는 의사에게 물으니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발치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전에 여러 번 치의료 봉사를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금숙 교수는 진단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엔도(Endodontic treatment·내부 치료)를 처치할 수 있을까? 오히려 치료하고 나서 뒤처리를 못하면 덧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죄송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많은 치료가 포기됐다. 며칠간의 신경치료가 필요한 충치는 통증이 심한 경우만 치료하고 진통제를 투약한다, 썩은 이가 여러개라면 원하는 쪽 하나만 발치한다….

오전 11시께 나부티(36)와 언니 츠링양징(40)이 딸들인 치앙발우(10)와 링마도마(8)를 데리고 왔다. 츠링양징의 두 앞니 틈에는 아말감이 일자로 박혀 있다. 그 ‘죄송하다’는 말을 이금숙 교수는 해야 했다. 진단을 끝내고 말을 건네기 전, 이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앞니를 살펴본 결과 두 개가 다 썩어 있었다. 단순히 때우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이 사이를 때워달라는 이들이 서너 명 있었다. 다 죄송할 뿐인 케이스다.”

츠링양징의 딸 링마도마의 유치는 다 썩어 있었다. 이금숙 교수는 통역에게 물었다. “여기 말한 8살이라는 나이가 우리나라식 나이인지, 미국식인지 한번 여쭤봐주시겠어요?” 유아의 치아 상태를 판단하는 데는 나이가 중요하다. 그리고 아이는 우리의 8살에 비해 덜 자라 보였다. 질문은 뉴질랜드에서 온 고등학생 김영태(19)군이 영어로 통역했고, 원정대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텐지 셰르파의 아들 라파 셰르파(20·카트만두대학 2학년)가 이 말을 다시 네팔어로 츠링양징에게 물었다. 네팔에서는 교육을 영어로 받는다. 교육받은 이들은 대부분 영어가 유창하다. 통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네팔의 문맹률은 50%를 넘고 실질 취학률 역시 50% 수준이다. 라파는 “미국식으로 나이를 센다”고 답했다.

병실에서는 이중 통역 대신 한국어를 직접 통역하는 네팔인이 있다. 라이 두르바(38)는 두 침상을 오가며 정신없이 바쁘다. 한국 방문 경험은 지난해 겨울 한 달 관광이 다지만, 1993년부터 히말라야 등반대를 돕는 셰르파 일을 하며 한국어를 익혔다. “한국 사람이랑 말은 많이 해보았지만, 이런 전문적인 통역은 처음 합니다.”

오전 진료실이 붐비지 않는 것은 바깥에서 돌려보내고 있어서였다. 11시 무렵 53개의 번호표를 나눠주고 나서 임병웅씨는 내부 사정을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40번 이후로는 어차피 오전 중에 치료를 못 받을 테니 어디서 식사를 하고 오도록 했노라고 말했다. 대기실에 들어서면 진단 전에 양치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는 영어, 네팔어, 티베트어, 셰르파어 등을 할 수 있는 파상 셰르파(40)가 붙어 있었다. 엄홍길 대장과 함께 8천m 고지 3번을 비록해 도합 7번을 등정한 실력파 셰르파다. 주옥(53)씨가 평소의 영어 실력(직업이 영어 교사)을 발휘해 영어로 설명하고 파상이 그걸 네팔어로 번역해 들려준다. 두세 번 같은 말을 반복하자 파상은 이제 주옥씨가 칫솔만 갖다대도 “옆으로 닦지 마라. 안쪽은 칫솔을 세워서 잇몸까지 닦아라. 앞쪽도 칫솔을 세워서 닦아라. 혓바닥까지 닦아라”라고 교육했다. 교육을 받는 이의 손에는 칫솔과 치약이 하나씩 쥐어졌다.

이동준 원장이 79살 할머니 로쌍의 이를 빼고 있다.

이동준 원장이 79살 할머니 로쌍의 이를 빼고 있다.

이틀을 걸어온 티베트 할머니

오후 1시께, 늦은 식사를 하고 있는 의료진을 79살의 할머니 로쌍이 찾아왔다. 티베트의 팀우쿵바에서 왔단다. 히말라야는 티베트와 네팔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해발 5716m가 넘는 낭파 라를 넘어온 것이다. 어떻게 오셨냐는 말에 로쌍은 손가락 두 개를 내보이며 걷는 시늉을 했다. 이틀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티베트어를 하는 파상이 급하게 통역하기 위해 내려왔다. 밥을 먹던 이동준 원장도 밥을 삼키며 내려왔다. 남체바자르에는 토요일마다 장이 선다. 장이 서면 반경 수십km 지역의 마을 주민들이 순전히 발만을 움직여 찾아온다. 장이 선 어제, 오늘 치과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 몇은 하루를 남체바자르에서 묵었다. 로쌍도 그랬다. 진단서에는 ‘발치를 원함’이라고 쓰여 있다. 먹는 약은 없냐고 이 원장이 물었다. 마취제를 놓을 경우 항상 확인해야 하는 사항이다. 어깨를 수그리고 걷는 폼이 불편해 보인다. 류머티즘 약을 먹다가 최근에 끊었다고 할머니는 어렵게 말했다. 이를 뽑고 난 로쌍은 연방 뒤를 돌아보며 문을 나섰다.

치과의사 전형복씨는 병실을 왔다갔다 하며 기자재와 약품을 공급하고 있었다. 각 부문에 배치된 ‘초짜’들이 오전이 넘어가자 마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환자별 기본 세트 마련과 소독, 필요할 때의 가글, 적절한 석션, 미라클(이를 때우는 물질)의 배합, 필요한 부분에 랜턴 비추기까지 지시 없이도 일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구온난화가 고마웠던 날

아래 대기실은 점점 더 혼잡해졌다. 오전에 돌아갔던 환자들이 돌아왔고 소문을 들은 마을 주민들이 몰려왔다. 아래로 상황을 보러 왔던 전형복씨는 진단 테이블을 하나 더 만들자고 했다. 곧바로 식당과 방에서 의자와 테이블이 공수됐다. 전형복씨가 진단 의자에 앉았다. 영어-네팔어 통역이 필요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로지의 사장 뱀바 카미가 얼른 통역 자리에 앉았다.

대기실을 정돈하던 황철호(47·대한항공 기장) 기장은 ‘61’을 들이밀며 ‘19’라고 주장하는 젊은이를 뒤로 가라고 했다. 번호표는 100을 넘어가고 있었다. 황철호 기장은 ‘기내 방송’을 시작했다. “제1의 원칙은 공정(Fair)이다. 하지만 다른 먼 데서 오신 분이 먼저 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 해가 지기 전에 오늘 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실의 사람들은 멀리서 온 환자들을 앞으로 밀어주었고, 번호표와는 무관하게 멀리서 온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쿰중에서 왔다며 앞으로 나오는 사람을 향해서는 칫솔 교육 중이던 파상이 나섰다. “쿰중은 멀지 않은 곳이다. 한두 시간이면 간다. 그리고 당신들을 나는 모른다.” 파상은 쿰중 출신이다. 밖에 있던 임병웅씨가 와서 “칫솔과 치약만 받으면 가겠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귀띔했다. 황철호 기장은 제2호 기내 방송을 시작했다.

히말라야산은 일찍 그늘을 드리웠다. 오후 4시가 되자 쌀쌀해졌다. 이날 최대치라고 예상해 만든 150번 번호표까지 동이 났다. 진단 차트도 동이 났다. 박용진(17)군이 부리나케 계단에 걸터앉아 글씨를 써나갔다. 오후 6시 진료가 모두 끝난 뒤 헤아려보니 총 200개의 번호표가 나갔고 162명이 진단을 받았다. 그 결과 발치는 26건, 잇몸 치료는 14건, 충치 치료는 16건, 투약만 받은 경우는 6건이 있었다. 이동준 원장은 ‘초짜’ 간호사, ‘야매’ 약사들 때문에 놀랐다. “하루에 많이 해봐야 20명 못 미치게 치료를 한다. 그렇게 되는 것도 간호사들이 필요한 조처를 해놓고 의사는 의자를 돌아가면서 치료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정말 손발이 척척 맞아돌아갔다. 무엇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을 잡아주고, 얼굴에 흩뿌려진 물을 닦아주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일을 마친 뒤 미소원정대원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을 마친 뒤 미소원정대원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세계 트레킹인들이 찾는 남체바자르는 성수기에는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관광객이 거리를 메운다. 12월부터 1월까지 비수기에 가게 주인들은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낮은 지역으로 내려간다. 로지도 거의 모두 문을 닫는다. 그래서 남체바자르의 유일한 치과도 이때 문을 닫는다. 이날 온 주민들은 겨울에도 산을 내려가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히말라야에 사는 모든 이들의 이동수단은 걷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가뭄으로 몇m씩 쌓이던 눈 대신 먼지가 산길을 덮었다. 엄홍길 대장은 이날을 이렇게 정리했다. “기후온난화를 경고해왔지만, 날씨가 따뜻한 게 오늘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히말라야 신이 맘껏 품을 내준 것 같다.” 그믐날 네팔 3445m 고지는 달이 없어 별이 유난히 밝았다. 해가 졌고 네팔 달력과는 상관없는 한국의 새해가 밝아왔다.



미소원정대 참가자: 이동준, 석도준, 전형복, 이금숙, 김우현, 임병웅, 최태섭, 전귀영, 주옥, 임정진, 황철호, 박미정, 김희영, 김계희, 전한, 장해인, 김영태, 박용진, 신경섭, 권새봄, 이제욱, 박창희, 이정훈, 김성재, 정태영, 어은경, 파상 셰르파, 텐지 셰르파, 라파 셰르파, 라이 도르바, 뱀바 카미, 엄홍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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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체바자르(네팔)=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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