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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의 위치와 연쇄살인은 상관관계”

국내 프로파일러 원조 격 김원배 연구관, 20년 강력범죄 수사 경험 DB로 구축
등록 2009-02-12 13:36 수정 2020-05-03 04:25

그의 책상 위에는 최근 각 지방경찰청에서 올라온 사건 관련 보고서가 어른 키높이만큼 쌓여 있다. 서랍 속에는 그동안 연구한 살인·실종 사건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CD 수백 장이 빼곡하다. 김원배(61) 수사연구관. 그는 현재 경찰청에서 유일한 민간인 신분의 상임 연구관이다.
지난 2월3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 안 사무실에서 만난 김 연구관은 “난 프로파일러 아냐. 심리학도 모르고 사회학도 잘 몰라. 그냥 개인적으로 연구할 뿐이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수사 경찰과 현직 범죄심리분석 요원들 사이에서 그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흉악범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1세대 프로파일러”로 꼽힌다. 그가 갖고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방대함과 분석 자료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김원배 연구관이 2월3일 미근동 경찰청사 안 연구실에서 연쇄살인 사건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경찰 사이에서 ‘한국형 프로파일러의 원조’로 인정받는다.

김원배 연구관이 2월3일 미근동 경찰청사 안 연구실에서 연쇄살인 사건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경찰 사이에서 ‘한국형 프로파일러의 원조’로 인정받는다.

2005년 6월 서울경찰청 사건분석반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한 김 연구관은 1973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해 주로 강력반 형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1985년부터 퇴임 전까지 20년 동안 경찰청과 서울경찰청 강력계를 오가며 살인사건 등 강력범죄 분석에 매달렸다. 전국에서 일어난 강력사건 현장에 달려가는 게 그의 주임무였다. 사건 현장 사진을 찍고 서류 작업을 하는 한편,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했다.

살인범죄 101가지 유형으로 분류

이런 결과물을 모아 탄생한 게 그가 퇴임 전에 내놓은 5권짜리 ‘한국의 살인범죄 실태와 수사’ 보고서다. 경찰 내부용으로 만든 이 보고서에서 그는 스스로 수집하고 연구한 1960년대 이후 살인사건 1750여 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살인범죄를 모두 101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사건 발생 장소가 어디인지, 범죄에 이용된 물건들은 무엇인지, 토막·암매장·방화 등 범인이 주검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등의 기준에 따른 분류다. 사건별 현장 사진까지 담고 있다. 일반인들은 몇 장을 넘기기조차 힘든 끔찍한 장면들이 그의 보고서에는 고스란히 실려 있다.

프로파일링(범죄심리분석)이라는 낯선 외래 학문이 국내에 소개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더구나 총기와 마약 등 한국과는 문화가 다른 서구 사회의 강력범죄 통계만 넘쳐나는 상황에서, 한국의 범죄만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그의 노력은 후배 프로파일러들에게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런 방대한 자료와 지식을 토대로, 중요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해당 수사본부나 정식 프로파일러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김 연구관은 중앙대 연극영화과 중퇴(67학번으로 방송인 송도순씨가 그의 대학 입학 동기다)가 학력의 전부이지만, 범죄심리학 관련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 어느 누구도 그의 성과를 무시하지 못한다. 경찰청 범죄정보지원계의 강은경 주임은 “어떻게 보면, 김 연구관이야말로 과학적인 프로파일링을 한 대한민국 최초의 경찰”이라고 평가했다.

김 연구관은 자신의 분석물이 워낙 사례를 중심으로 작성된 탓에 바깥에 공개되면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서 구체적인 수치가 알려지길 꺼린다. 그래서 자세한 분석 결과를 전해들을 수는 없었지만, 피해자의 주검이 놓인 형태를 중심으로 살짝 들여다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연쇄살인범의 경우, 범행 초반엔 대체로 주검을 땅속에 묻기보다는 땅 위에 버리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비면식 범죄다. 그러다 범행이 지속될수록 주검을 깊이 묻으려 한다. 피해자와 면식이 있을수록 땅속 깊이 묻으려는 경향성이 강하며, 친족 간의 살인사건일수록 주검은 하늘을 향해 가지런히 놓이는 경향성이 있다(흉악범들이 이런 정보를 비틀어 범죄에 활용할 것이란 우려는 기우다. 김 연구관에게는 이런 일반적인 경향과 어긋나는 다양한 사례에 대한 분석도 충분히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사진작가 죽음 연출 사건 단서 찾아내

이번에 붙잡힌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 강아무개씨의 범죄에 그가 주목한 이유도 이런 분석에서 비롯됐다. 밝혀진 최초 희생자가 땅속에 묻힌 걸로 봐서는, 연쇄살인 범죄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7건 가운데 3건의 납치가 대낮에 이뤄졌는데, 이 또한 범행의 대담성에 비춰 연쇄범죄가 상당 부분 진척된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연구관은 “유영철과 정남규도 대낮에 범행을 저지른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주검을 묻은 곳들이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숲 속이 아니라 논두렁 근처 등 대체로 사방이 트인 곳이라는 점도 강씨의 추가 범죄를 의심케 하는 주요 근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실관계다. 확률로 범행을 단정할 수는 없다. 증거를 찾아내는 작업은 초기 수사를 담당한 경찰과 이후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이 해야 할 일이다.

그에게 32년의 형사 생활 동안 기억나는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대답은 1982년에 일어난 ‘사진작가 죽음 연출 살인사건’이었다. 그해 12월14일 서울 금천구(당시 구로구) 호압산 중턱에서 이발소 여종업원 김아무개(당시 24살)씨의 주검이 발견됐다. 경찰은 김씨가 일하던 이발소에 단골로 다니던 사진작가 이아무개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붙잡았다. 이씨의 집에서는 김씨가 죽어가는 장면을 찍은 사진 1장이 발견됐지만, 이씨는 “장난 삼아 연출해 찍은 것일 뿐 김씨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사팀은 해당 사진이 담긴 필름을 이씨의 직장 숙직실 벽 속에서 찾아냈는데, 거기에는 이씨가 건네준 청산가리가 든 감기약을 먹고 피해자 김씨가 숨져가는 장면을 찍은 장면 21컷이 담겨 있었다. 당시 수사를 맡은 서울 남부경찰서 강력반에 김 연구관이 소속해 있었는데, 그는 이씨 집에서 발견된 사진을 전문가에게 들고 가 피해자 몸의 솜털이 서 있지 않고 누워 있는데다 추운 환경에서 땀구멍이 열린 것으로 보아 숨진 상태에서 찍힌 사진이라는 감정 결과를 받아냈다. 그가 보여준 당시 사진들은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였다. 결국 범인 이씨는 피해자에게 독약을 먹인 뒤 죽어가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며 희열을 느낀 엽기적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는 법원에서 유죄를 인정받아 얼마 뒤 사형당했다고 한다. 김 연구관은 “그 사건도 이번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과 같은 쾌락성 범죄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김 연구관은 지난해 인천 강화도 모녀 피살사건 당시 “비면식 범죄로, 범인의 수는 3∼4명일 것”이라는 중요한 단서를 수사본부에 제시했고 이 공로로 7월에 어청수 경찰청장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본인은 프로파일러라는 직함을 얻지 못했지만, 후배 프로파일러들을 교육하거나 함께 심포지엄을 여는 등 후진 양성 작업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김 연구관은 “이번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프로파일러들이 범인의 마음을 읽고 설득하는 등 일을 잘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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