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5일, 두 번째 만난 ㅇ씨의 얼굴은 한 달 열흘여 만에 많이 지쳐 보였다. 원래 마른 몸에 살이 더 빠져 이제는 40kg을 겨우 넘는다. 이날 오전 두 개의 신문지면을 통해 “민주노총 간부가 여조합원을 성폭행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ㅇ씨는 기사에 등장하는 피해자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2월24일이다. 거리는 들떴지만, ㅇ씨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잠긴 목소리로, 그는 말하기 힘든 내용을 꺼내놓았다.
사건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12월1일이다. ㅇ씨는 전날 수배 중이던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을 숨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8년 넘게 알아온 지인의 부탁이었다. 간곡한 부탁이었고 잠깐 있다가 거처를 옮길 거라고 생각했기에 걱정하는 마음을 안고 받아들였다. 가해자 ㄱ씨와 부딪친 것은 이 과정에서다. 그는 민주노총 간부로 이석행 위원장이 피해자의 집으로 올 때 함께 왔다. 이날 처음 20여 분 만났다. 이석행 위원장은 나흘 만에 검거됐고 피해자는 다시 ㄱ씨를 만나게 됐다. ‘수배자 은닉’과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게 됐고,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 법률원 등에서 조사와 관련한 상담을 받기 위해서다. 상담 뒤 가볍게 술을 마시게 됐고, ㅇ씨가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타는데 ㄱ씨가 바래다주겠다며 다짜고짜 올라탔다. 잠시 잠든 사이, ㄱ씨가 피해자를 성추행했다. 집에 도착해 ㅇ씨가 집으로 들어간 뒤 ㄱ씨는 문을 두드리고 ㅇ씨의 이름을 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 이웃의 시선을 염려해 ㅇ씨가 문을 열어주자 집 안으로 들어간 ㄱ씨는 강제로 여러 차례 성행위를 시도했다.
ㅇ씨는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이상한 얘기를 하고, 양말을 벗고, 소파에 턱 눕더니 그런 짓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이후에도 그의 뻔뻔함은 계속됐다. “ㄱ씨는 사건이 있은 뒤 나를 보면 싱글싱글 웃으며 ‘술에 취해서 기억이 안 나네. 내가 그랬으면 내가 미안한 거네’라고 얘기할 뿐이었다. 하지 않느니만 못한 사과였다.” ㅇ씨는 고민 끝에 민주노총 산하 연맹 한 가부에게 문제를 상담했지만 그는 “사건화하기보다 민주노총의 내부 징계 절차를 우선 따르자”고 말할 뿐이었다. 단 한마디의 공감도, 위로도 없었다.
가해자인 ㄱ씨가 속한 민주노총 역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ㅇ씨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줬다. 이용식 민주노총 사무총장이 사건을 알게 된 것은 12월26일인데,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진 건 열흘 뒤인 1월6일이다. 이날 임원회의가 열렸고 이용식 사무총장이 회의에서 사건을 보고했다. 임원회의에 참석했던 한 간부는 “‘왜 이렇게 보고가 늦어졌냐’고 묻자 ‘(피해자를) 설득하느라 힘들었다’고 대답을 듣고 순간 아찔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중심에 둔 돌봄과 치료, 가해자 징계 조처 등이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대신 ‘조직 차원에서 해결하자’ ‘고발은 하지 말자’ 등의 설득만 한 것으로 이는 엄연한 2차 가해다.
민주노총은 2003년 ‘성폭력·폭언·폭행에 관한 처벌 규정’을 규약에 만들었다. 규정은 5조에서 “사건을 접수한 즉시 진상조사위원회를 소집하여 조사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2차 가해도 금지하고 있다. 피해자 보호 및 비밀 유지도 의무 사항이다. 민주노총은 이 모든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ㅇ씨를 대리하고 있는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민주노총은 계속해서 징계 수위에 대한 조정을 해왔다”며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니라 사건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거래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오 국장은 “민주노총은 술자리 등에서 기자들에게 여과 없이 사건 내용을 말했고 소문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이 역시 피해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조직 내부의 여러 가지 고려가 우선된 결과다.
ㅇ씨는 지난해 12월 인터뷰 뒤 고소·고발 여부를 확실하게 결심하지 못했다. 은 ㅇ씨의 결심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ㅇ씨의 상담을 맡았던 임태훈씨도 “피해자가 결심할 때까지 시간을 갖고 기다리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이 ㅇ씨의 ‘상위 소속 단체’나 ‘간부’ 등이 여러 차례 조정을 시도하며 그에게 상처를 줬다. 그는 이후 계속된 수면장애, 섭식장애 등에 시달렸다. 그러다 결국 민주노총에서 언론으로 사건이 흘러나갔고, ㅇ씨는 스스로 결심이 서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이 공개되는 또 한 번의 상처를 입었다.
진보적 노동운동 단체라는 민주노총은 개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배려 없이 ‘조직 안위’ ‘조직 논리’에 매몰돼 있는 듯하다. 사건이 언론을 통해 기사화된 뒤에야 ‘대국민 사과’를 하는 민주노총의 태도는 그래서 더욱 불편하다. 민주노총은 대국민 사과는 할지언정 한 번도 ㅇ씨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조직도 잔인했고, 취재를 위해 두 번째로 ㅇ씨를 만난 기자 역시 잔인했다. “지난 두 달간 조직에 대해 드는 생각은 어땠습니까?” “민주노총의 부도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노총이 피해자의 승낙 없이 소식을 여기저기 흘렸다는 소문이 도는데 어떠십니까?” 그는 기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한숨 속에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도 한국의 ‘진보’는 도덕과 등가를 이루지 못한다. 조직의 논리, 조직의 안정을 위해 피해자는 여전히 참아야 한다. 분노보다는 우울에 지쳐있던 ㅇ씨는 가해자 ㄱ씨를 형사고발하고, 민주노총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수사 의뢰를 하기로 결심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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