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신천동 29번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오랜 꿈이 담겨 있다는 8만7770.3㎡의 땅이 있다. 112층 555m 높이의 제2롯데월드를 짓겠다는 꿈. 이 ‘대역사’에 대해 롯데물산 관계자는 “앞으로 10년 동안 적자를 보겠지만, 회장님의 추진 의지가 워낙 강하다”고 설명했다. 돌아보면 회장님의 ‘꿈’은 지난 세월 부동산 투기 논란, 교통·환경 재앙에 대한 경고, 안보 위협론 등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포화 탓에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 아래 토목국가 지향의 보수 정권이 들어서자 사정은 달라졌다. 안보를 중시하는 전통 지지층을 외면하면서까지 신 회장의 꿈에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 쪽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15년째 초고층 건축을 추진해왔다고 말한다. 롯데그룹은 지난 1995년 100층 402m 높이로 제2롯데월드를 짓겠다는 도시계획안을 제출했다. 2004년 10월 지구단위계획 변경안을 제출할 때 112층 555m로 규모를 키웠다. 롯데물산 관계자는 “초고층은 평당 건축비가 일반 건물보다 3배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현재의 초고층 계획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동안 설계비와 기술검토 용역비에만 400억원 이상이 지출됐다고 한다. 롯데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돈이 안 되는 ‘오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난한 분투의 세월을 보내왔던 셈이다.
과연 그럴까. 제2롯데월드라는 ‘요지경’을 이해하기 위해 사연 많은 그 땅의 역사를 돌아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롯데에 그 땅은 져도 괜찮지만 이기면 ‘대박’인 싸움판, 그래서 지려고 해도 질 수 없는 싸움판, 바둑으로 치면 ‘꽃놀이패’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애초 서울시가 가지고 있던 땅이 롯데물산주식회사 등에 소유권이 넘어간 시점은 1988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 땅의 매입 가격은 800억원대였다. 롯데는 이곳에 호텔, 백화점, 위락시설 등을 갖춘 ‘한국의 디즈니랜드’를 세우겠다고 밝혔으나, 교통 및 환경 문제 등을 이유로 사업승인을 받지 못했다. 63빌딩의 2배 남짓한 높이까지 건물을 지어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신 회장의 꿈은 당시로선 무리였나 보다. 그리고 1990년 5월8일 롯데의 부동산 투자는 ‘핵폭탄’을 맞게 된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한국 경제는 부동산 투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86년부터 3년간 우리나라는 국제금리·기름값·원자재값의 ‘3저 시대’를 맞아 330억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냈다. 곳간이 넘치게 된 기업들은 부채 상환이나 기술개발 대신 100억달러 정도를 부동산에 쏟아부었다. 거품은 한없이 부풀어올랐고, 거품을 타고 오를 수 없었던 서민들의 좌절감은 잇따른 자살 사건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됐다. 노태우 정부의 경제 관료들은 세금으로 부동산 투자 과열을 잡겠다고 나섰다. 토지초과이득세, 종합토지세 같은 것들이 이때 도입됐다. 그리고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 조처를 취했다. 바로 1990년의 ‘5·8 부동산 조치’다.
롯데그룹은 제2롯데월드 터를 팔게 되면 400억원대의 세금에 그동안의 이자 비용까지 물어 손실이 크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1991년 당시 공시지가만 3700억원에 이르렀으니 ‘엄살’이 심했다고 할 만하다. 이후 롯데는 이 땅이 “비업무용 부동산이 아닌데도 비업무용으로 잘못 판정됐다”고 주장하며 소송전에 돌입했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엔 승소판결을 받아내게 된다. 당시 김 대통령의 둘째며느리(김현철씨 부인)가 김웅세 롯데그룹 사장의 외동딸이라는 묘한 상황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롯데는 환란 직후인 1998년 5월 36층 143m 높이까지 지어도 좋다는 건축허가를 얻게 된다.
롯데 총괄사장 된 이 대통령 대학 친구잠깐 ‘수위’가 낮아졌던 신격호 회장의 꿈은 2000년대 들어 다시 더 높은 하늘을 향한다. 롯데는 2004년 10월 지상 112층, 지하 5층의 555m짜리 건물을 짓겠다는 지구단위계획 변경안을 송파구에 제출했다. 2006년 2월엔 이 변경안이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석 달 뒤 국방부(공군)가 행정협의조정 신청을 내면서 건축허가 관련 절차는 미뤄지게 된다.
그런데 롯데는 제2롯데월드의 좌절 속에서도 적지 않은 전리품을 챙겼다. 토지대장을 떼어보면, 2004년 1월 ㎡당 1200만원이던 해당 부지의 공시지가는 2006년 1월엔 1580만원, 현 정부가 들어선 2008년 1월엔 2600만원이 된다. 신 회장의 꿈이 좌절을 거듭하는 동안, 땅값은 현기증 나게 치솟은 셈이다.
롯데그룹의 ‘꽃놀이패’는 올해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초고층 제2롯데월드를 짓는 데 최대 걸림돌이었던 군이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징후는 지난해부터 나타났다. 지난해 4월28일 열린 1차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확대를 위한 민관합동회의’ 자리로 돌아가보자. 당시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사돈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2롯데월드 건설을 허용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112층짜리 건물이 서면 외국 귀빈을 태운 대형 항공기가 서울공항을 이용할 때 위험할 수 있다”고 반대론을 폈지만, 이 대통령은 “인천이나 김포공항을 이용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명쾌한 해법’을 제시했다.
국방부도 움직였다. 국방부는 지난 1월7일 조중표 국무총리실장 주재로 열린 행정협의조정위원회 실무위원회에서 서울공항 활주로 방향을 3도 조절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롯데와 공군이 활주로 재포장, 항법 장비 보강 등 필요한 실무기술 협의 결과를 문서로 작성하면, 행정협의조정위 본회의에서 최종안을 작성할 계획”이라며 “협의가 잘 풀리면 앞으로 한 달 안에 최종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이재명 민주당 부대변인은 “제2롯데월드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이 대통령의 대학 친구 장격작씨가 롯데 총괄사장이 되면서 사실상 확정된 것이었다”는 논평을 냈다.
불똥은 두 갈래로 튀었다. 첫 번째는 군과 보수 진영 내부의 반발이다. 성우회를 비롯한 예비역 단체들은 제2롯데월드를 허용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서울공항은 유사시 수많은 전투기들이 긴급 발진하는 곳인데, 거대한 말뚝을 세워놓으면 전쟁 대응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걱정이다. 두 번째는 인근 성남시 주민들과의 형평성 논란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제2롯데월드 신축을 둘러싼 찬반론이 무성하고, 이참에 수도권 군사규제를 풀어버리자는 ‘과격한’ 제안도 나온다.
“이참에 수도권 군사규제를 풀어버리자”롯데는 제2롯데월드의 건축 비용과 주변 교통 개선 비용을 포함한 총공사비를 1조7천억∼2조원으로 추산하면서, 공사 중에 연인원 250만 명, 완공 뒤에는 2만3천 명의 상시 고용이 이뤄질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런 경제효과는 아직 미지수지만 제2롯데월드가 부르는 땅값의 마술은 지금도 ‘약발’이 통하고 있다. 한동안 급락하던 인근 송파구 재건축 아파트의 3.3㎡당 매매가는 최근 2700만원 선을 회복했다. 정부가 최근 강남3권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해제를 비롯한 부동산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쉬 결론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제2롯데월드 주변 집값이 들썩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롯데가 15년 동안 터닦이를 진행하면서 주변의 땅값을 끌어올렸지만, 정작 자신은 ‘절세 효과’를 누렸다는 점이다. 한 롯데그룹 관계자는 “재산세나 종부세를 매길 때 텅 빈 나대지는 비업무용토지이지만, 터닦이를 진행하면 업무용으로 인정돼 세금부담이 줄어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제2롯데월드 건축이 몇 년 미뤄진다해도 지금 같은 땅값 오름세만 계속되면 롯데로서는 손해볼 것 없는 장사인 것이다. 또 초고층 건축의 길이 뚫린다면, 강북과 강남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에다 좋은 상권까지 갖춘 랜드마크 건물을 갖게 될 것이다. 윤순철 경실련 시민감시국장은 “개발이익 환수 장치나 도시 전체에 끼칠 파장에 대한 논의는 사라진 채 재벌에 특혜를 주고 있다”면서 “정부가 기업들의 이익을 챙기다 보니 이젠 국가안보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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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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