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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 인사, 과거회귀 완결편


폭행·성폭행 인사도 영전하면서 ‘친한나라당 반정연주’ 노골화, 인사·조직·프로그램 등 ‘3대 개편’ 완성
등록 2009-01-08 13:38 수정 2020-05-03 04:25
지난해 10월13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의 한국방송 국정감사에 출석한 이병순 한국방송 사장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지난해 10월13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의 한국방송 국정감사에 출석한 이병순 한국방송 사장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방송법과 신문법 개정에 반대하는 전국언론노조의 총파업 투쟁이 한창이던 지난 12월29일 저녁, 한국방송이 국·실장급 인사를 단행했다. 정연주 전 사장이 2004년에 없앴던 국 단위 조직을 부활한 데 이은 후속 작업이었다. 이날 한국방송 홍보팀은 보도자료를 통해 “방송사의 핵심 보직 중 하나인 편성국장과 아나운서 실장에 국내 방송사 최초로 여성을 임명했다”고 자찬했다. 하지만 이날 인사의 핵심은 ‘친한나라당 반정연주’ 세력의 전면 부상이었다.

두 여성 국·실장 인사의 뒤편

우선 ‘강동순 녹취록’ 파문의 주역인 윤명식 PD를 편성본부 외주제작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심의위원으로 재직하던 2006년 11월9일, 강동순 당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신현덕 전 경인방송 대표 등과의 술자리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언론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지 등의 대화를 주고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언론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한국방송 PD협회에서 제명당했고 회사로부터 정직 6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그는 이후 정연주 사장 체제에서 ‘물먹은’ 간부들을 규합해 ‘한국방송 공정방송노동조합’을 결성한 뒤 정 전 사장 퇴진운동에 앞장섰다.

이병순 사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보도총괄팀장을 맡은 보수적 색채의 고대영 팀장도 보도국장으로 승진했다. 고 국장은 김인규 전 한국방송 이사를 사장으로 옹립하기 위한 비공식 조직인 ‘수요회’의 좌장 구실을 했던 인물이다. 2008년 9월 그가 보도총괄팀장을 맡은 뒤 한국방송 뉴스는 급속히 친정부화됐다. 그는 보도본부 내 ‘보복 인사’에 앞장섰다는 의혹도 받았다. 기자들에게 “2년간 유배 생활을 시키겠다”며 막말을 했고, ‘대통령과의 대화’가 생방송될 때 한 PD와 멱살잡이를 했으며, 술자리에서 후배 기자를 폭행해 구설에 올랐다. 이 밖에도 이번 인사에서는 보수 성향의 윤동찬 문화예술팀장과 이응진 드라마기획팀장이 각각 교양제작국장과 드라마제작국장에 임명됐다.

이에 대한 한국방송 사내 반응은 흉흉했다. 한 중견 PD는 윤 PD의 외주제작국장 임명에 대해 “인사를 앞두고 그의 요직 기용설이 돌았다”며 “특정 정당에 줄을 대고 음모를 꾸몄던 사람을 어떻게 보직 국장에 기용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젊은 기자는 “고 팀장을 4개월 만에 보도총괄팀장에서 보도국장으로 승진시켜 앉힌 것은 본격적인 ‘땡이뉴스’를 하겠다는 의도”라며 “중립적이지 못한 성향도 문제지만 폭력으로 잇따라 물의를 빚은 부도덕한 인물을 어떻게 보도국 수장에 앉힐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방송 기술인연합회는 공개적으로 “실·국장 인사의 원칙을 해명하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황당한 인사’는 이틀 뒤 팀장급 인사에서도 이어졌다.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정 전 사장 퇴진운동을 줄기차게 벌였던 진종철 대구방송총국 기술팀 직원을 시청자센터 KBS홀 팀장 직무대리에 앉혔고, PD협회를 맹렬히 비판했던 신경섭 편성본부 외주제작팀 PD를 대전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번 노조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기술직 조합원들에게 “PD가 노조위원장이 되면 엔지니어가 죽는다”는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던 TV제작본부 교양기술팀의 한 직원은 팀장급으로 영전했다. 노조 부위원장 시절 노조 상근 여성 2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탄핵됐던 ㄱ씨는 한 지방 총국 보도국장에 앉았다.

성폭행 인사는 지방 총국 보도국장에

이번 인사를 두고 사내에서는 △친여·보수 성향만 발탁한 ‘편향 인사’ △정연주 전 사장 퇴진에 앞장섰던 과거 노조에 대한 ‘보은 인사’ △도덕적 결함도 따지지 않는 ‘묻지마 인사’라는 말이 돌고 있다. 한 보도국 기자는 “어처구니없는 퇴행 인사”라며 “이번에 실·국장과 팀장으로 발탁된 인사 중에는 사장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김인규 대선 언론특보와 가까운 인물들이 유난히 많다”고 꼬집었다.

‘과거 회귀’는 이병순 사장 체제가 들어선 지난해 8월 말부터 시작됐다. 이 사장은 4개월 동안 인사, 조직, 프로그램 등 ‘3대 개편’을 통해 한국방송을 급속도로 냉각시키고 있다. 그 첫 작업은 지난해 9월17일 밤 10시에 기습적으로 단행한 인사였다. 정부에 비판적인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제작한 기자와 PD, 그리고 ‘관제사장 반대 투쟁’을 주도해온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을 대거 한직으로 발령냈다.

한국형 탐사보도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김용진 탐사보도팀장은 팀원으로 강등돼 부산방송총국으로 쫓겨났다가, 한 달 뒤 또다시 울산방송총국으로 발령받았다. 이를 두고 사내에선 ‘한밤의 인사 쿠데타’라는 말까지 나왔다. 한 입사 10년차 기자는 “입사 이후 인사 때마다 희망원을 받는 것을 보면서 참 좋은 관례라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희망원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인사가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이병순 사장은 뒤이어 등을 폐지하거나 성격을 바꿔놓았다. 정연주 전 사장이 이른바 ‘기둥 뒤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끄집어내기 위해 혁신적으로 단행했던 팀제를 없애고 국·실장제를 부활시켜 ‘대국소팀제’를 만들었다.

조직과 사람과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혁명’이 진행됐지만 사내 구성원들 사이에선 “소통은 없고 상명하달만 있다”는 한숨이 나온다. 가장 큰 불만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의견 수렴’이 없다는 것이다. 한 라디오 PD는 “과거 프로그램 개편 때는 실무자들이 토론도 많이 했고 MT 가서 밤새워 격론도 벌였다”며 “하지만 지난해 10월 프로그램 개편은 일선 PD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채 윗선에서 알아서 했다”고 털어놓았다.

‘대국소팀제’로 바꾼 조직개편도 마찬가지다. 조직관리를 맡은 유광호 부사장은 지난해 9월 취임사에서 “각 본부에서 오래전부터 팀제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됐다”며 “본부별 기능을 고려해 생산성 있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게이트키핑’을 강화한다는 게 가장 큰 명분이었다. 그러나 일선 기자와 PD들은 ‘게이트키핑’은 명분에 불과하고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라며 반발했다. 특히 프로그램 제작의 자율성 침해가 우려되는 PD들의 반발이 거세다. PD 출신인 양승동 사원행동 공동대표는 “과거 정 사장 체제에서는 PD의 제작 자율성과 기자들의 편집권을 보장해줬다”며 “이번 조직개편에 따라 제작 자율성 침해를 우려하는 PD들의 경계심이 크다”고 전했다.

익명글도 사라진 사내 게시판

소통 부재는 사내 게시판에서도 나타난다. 한 경영직 사원은 “예전에는 실명으로 사장도 비판하고 정책도 꼬집었다”며 “하지만 ‘심야 보복 인사’ 이후 사내 게시판에 오르는 글이 부쩍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한 PD는 “익명으로 올린다 해도 탄로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한 입사 14년차 기자는 “소통이 없으면 갈등이 깊어지기 마련”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좌파 정권 10년 청산론’처럼 편가르기식 조직 운영은 결국 양쪽에 큰 상처를 남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여론미디어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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