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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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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미디어밸리 투기적 개발 말썽

개발제한 고시 뒤 무더기 건축 허가… 언론사에 헐값 매각 의혹도
등록 2008-12-05 10:38 수정 2020-05-03 04:25

경기도의 한 지방자치단체가 시장의 선거공약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각종 부작용을 낳고 있다. 무소불위의 지자체 권력과 밥그릇이 필요한 공기업, 언론권력 등이 합작한 ‘권·언·공 유착’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고양시와 한국토지공사는 고양시 덕은동 일대 118만㎡(36만 평)을 수용해 방송영상시설 단지를 만드는 ‘브로맥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브로맥스 사업이란, 삼송지구(미디어힐)에 10만여 평, 덕은지구(미디어밸리)에 38만 평 등 고양시 4개 지구에 100만 평 이상의 땅을 확보해 방송영상 기업을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강현석 고양시장은 2006년 시장 선거 당시 공약의 하나로 브로맥스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고양시에 많은 방송사를 유치해 많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게 그 이유다.

경기도 고양시 덕은동 주민들이 자신들을 배제하고 밀어붙이기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지난 6월 토지공사와 고양시가 공동으로 열기로 한 공청회를 저지하고 있다. 덕은동 주민대책위원회 제공

경기도 고양시 덕은동 주민들이 자신들을 배제하고 밀어붙이기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지난 6월 토지공사와 고양시가 공동으로 열기로 한 공청회를 저지하고 있다. 덕은동 주민대책위원회 제공

덕은동은 서울 상암DMC와 붙어 있는 곳으로 △37년 동안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취락지구 △고양시 유일의 준공업지역 △이전이 예정된 국방대학 터 등이 있다.

상암 DMC와 인접한 덕은동 일대 36만평

고양시는 지난해 7월 이 일대를 미디어밸리로 개발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세운 뒤, 같은 해 12월 이 지역에서 각종 개발행위를 3년 동안 제한한다고 고시했다. 미디어밸리 개발을 위한 토지 수용을 앞두고 건물 신·증축 등 보상 비용을 높이려는 행위를 막으려는 조처였다. 하지만 개발제한 고시 뒤 무더기로 건축허가를 내줘 투기를 조장했다는 의혹도 제기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고양시가 도시계획을 확정한 뒤 5개월이 지나 개발제한을 고시한데다 고시 뒤에도 40여 건의 건축허가를 내준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해당 공무원과 건축설계사 간의 금품수수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디어밸리에 수용된 덕은지구 일대 항공 사진. 서울 상암지구와 맞붙어 있다.

미디어밸리에 수용된 덕은지구 일대 항공 사진. 서울 상암지구와 맞붙어 있다.

이 지역에는 이미 200여 채에 이르는 빌라와 창고가 들어섰다. 현지 주민들은 이 중 상당수가 보상을 노린 투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디어밸리 개발이 진행될 경우,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추가 보상비 지출이 불가피하다.

또 주민들은 강제수용에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공청회에서 잘 확인된다. 주민들은 자신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밀어붙이기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지난 6월 토지공사와 고양시가 공동으로 열기로 한 공청회를 무산시켰다. 국토해양부의 권고에 따라 주민대표들과 고양시의 토론 방식으로 진행된 3차 공청회에서 주민대표들은 “고양시가 주민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자체와 언론사의 부적절한 유착에 대한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지난 8월 매일경제미디어그룹 컨소시엄(매경컨소시엄)은 토지공사가 조성한 고양 삼송지구 내 39만2700㎡(11만9천 평)를 사들이는 계약을 체결했다. 토지공사는 매경컨소시엄에 평당 605만2천원씩 모두 6153억원에 계약을 했는데, 이 액수는 고양 삼송지구의 조성 원가인 평당 724만3천원의 83.6% 수준이다. 이 같은 결정에 대해 헐값·특혜 매각 의혹이 일었다.

예비사업자 토공 안내 공고 빈축

덕은지구의 경우, CBS가 들어올 것이라는 얘기가 벌써 나돌고 있다. 김영복 고양시의회 의원(건설교통위)은 “지난 7월 시정 질의 때 ‘덕은지구에는 어떤 방송사가 들어오냐’고 질의하자 시장이 ‘CBS가 들어오게 돼 있다’고 답변했다”며 “지자체와 언론기관이 유착해 헐값에 땅을 팔고 사면 결과적으로 고양 시민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지난 4월엔 예비사업자인 토지공사가 지역본부장 이름으로 개발제한에 대한 안내 공고를 내걸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사진). 당시 고양시와 토지공사가 정식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여서 토지공사가 안내 공고를 내걸 권한이 없다는 비판을 받자, 부랴부랴 테이프로 토지공사 이름을 지우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공기업 민영화는 토공과 주공을 통합하는 것이다. 민영화에 앞서 토공이 몸집을 더 키우기 위해 오히려 고양시를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토지공사는 “현재 고양시와 계약을 맺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안내 공고는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토지공사가 고양시 덕은동에 지역본부장 이름의 안내 공고를 내걸었다가(왼쪽) 권한 문제가 불거지자 부랴부랴 테이프로 토지공사 이름을 지웠다. 덕은동 주민대책위원회 제공

토지공사가 고양시 덕은동에 지역본부장 이름의 안내 공고를 내걸었다가(왼쪽) 권한 문제가 불거지자 부랴부랴 테이프로 토지공사 이름을 지웠다. 덕은동 주민대책위원회 제공

현재 경기도에서만 10여 개 지자체들이 영상테마파크·스튜디오·영상대학·오픈세트장·방송영상시설·영화촬영소·애니메이션단지 등 방송·영상 산업 유치를 시장 공약으로 추진하고 있다. 고양시와 김포시만 합쳐도 200만 평이 넘는다. 공약을 내건 지자체들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1천만 평 규모에 이른다. 부산이나 광주에 있는 방송사까지 이전한다고 해도 남는 물량이다. 경기도 전역이 방송영상산업단지로 가득 찬 이후의 사태는 짐작이 가능하다.

고양시의 경우도 야외 촬영장을 포함하더라도 수요에 견줘 너무 넓다. 이 때문에 그동안 사업 진척이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최근 고양시는 브로맥스 사업에 급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잡음과 무리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고양시가 사업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현석 시장 공약 밀어붙이기

윤성신 고양시 국제화전략사업본부장은 “고양시엔 공장은 물론 대학교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방송이나 영상을 선택했다. 미디어밸리는 상암DMC와 바로 붙어 있어 방송영상 분야에서 연계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재수 고양시 도시주택국장도 “고양시는 인구 100만 명의 도시인데 산업시설이 없다. 먹고살 길이 있어야 한다. 100만 평도 넓지 않다. 방송사들이 줄서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영복 의원은 “현재 방송영상 기획사들이 3천 개 정도 있다. 하지만 대개 1억원 미만의 영세기업이다. 매경컨소시엄에 있는 기획사 2곳은 직원이 각각 5명, 7명이었다. 미디어밸리 바로 옆에 있는 상암DMC에도 빈 사무실이 많은 것으로 안다. 시장의 무리한 공약은 시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2년 뒤 선거를 앞두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하기 때문에 강 시장이 공약 사업을 밀어붙이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일본에선 지자체들의 ‘붕어빵’ 테마파크 열풍으로 지자체가 파산하기도 했다. 일본의 선례를 볼 때 경기도 지자체들의 무리한 방송·영상 사업 진출은 우려를 낳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민선 자치제 출범 뒤 단체장들의 선심성·업적 과시용 사업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2006년 감사원은 지자체장들이 다가오는 선거를 의식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면서 4200억원을 낭비했다고 지적했다. 자치단체 권한은 강화됐으나 효율적인 조정·통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주된 이유다.


파산한 일 지자체 유바리시가 주는 교훈
‘묻지마 개발’ 거품 꺼지자 주민만 고통


한때 일본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테마파크’가 열병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국내에서도 200만 관객을 동원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의 무대도 일본의 거품 경제를 상징하던 몰락한 테마파크였다. 테마파크의 파산은 그만큼 일본인에겐 일상적인 소재였다.
1980년대 일본은 전국적으로 1천 개가 넘는 테마파크로 넘쳐났다. 테마파크 조성은 모든 지자체장들의 공약이었다. 90년대 부동산 거품 붕괴 뒤 테마파크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은 지자체들은 자산 가치 하락과 불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일본의 대표적 테마파크 관광지였던 유바리시가 일본 지자체로선 처음으로 파산했다. 유바리시는 탄광이 밀집했던 홋카이도의 소도시였다. 60년대부터 석탄사업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이에 유바리시는 중앙정부의 지원금과 시 자체 재원 등을 동원해 80년대부터 관광도시로 변신을 시도한다. 호텔과 리조트 인수, 석탄박물관 건설 등 관광정비 사업에 무려 230억엔을 퍼부었다. 12개에 이르는 유바리 관광테마파크를 만드는 데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관광객이 연 200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지방 교부세가 삭감되면서 재무상태가 악화되자 시는 적자를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하고 차입금을 끌어다 썼다. 나카타 데쓰지 전 유바리 시장은 시를 관광도시로 변모시키는 데 주력했지만 지금 와서 남는 것은 거액의 빚과 시민들의 분노뿐이다.
잘못은 지자체에 있지만 책임과 부담은 고스란히 주민의 몫이었다. 주민들은 빚 때문에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지만, 공공서비스는 일본 전역에서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못 견디고 유바리시를 떠나고 있다. 세금으로 빚을 메워야 하는데, 관광시설의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주민들이 떠나면서 고령자만 남게 돼 어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다.
파산 뒤 유바리시는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파산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호텔과 리조트, 석탄박물관 등의 운영을 민간 기업에 위탁했다. 공무원 수를 269명에서 166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이기로 했다. 공무원들의 급여도 기본급 평균 30%가 삭감되고 각종 수당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18년 동안 353억엔을 갚아야 하는 점은 시와 주민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시의 주요 업무도 정부와 상위 지자체에 넘겨야 했다. 지난해 파산 이후 상위 지자체인 홋카이도에서 8명, 도쿄도에서 2명, 나고야 아이치현의 가스카이시에서 1명, 정부에서 1명 등이 파견됐다. 하지만 시가 파산에가지 이른 데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질 인사가 없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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