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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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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살 안, 인문학의 부활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안양교도소에서 ‘대박’난 ‘평화 인문학’ 프로그램, 재소자 24명이 1기 수료증 받던 날

▣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봄 햇살이 따사로운 3월21일 오후 경기 안양시 안양교도소. 푸른 수의를 입고 앞에 앉아 있는 ‘수용번호 21××번’의 ‘사회’에 있을 적 이름은 이아무개였다. 1955년 양띠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쉰네 살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이씨는 인접한 경북 상주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그때는 다 어렵게 살았다”는 그의 말처럼 배움도 거기서 끝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가죽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밤낮 땀 흘려 일한 끝에 자그마한 공장도 하나 갖게 됐다.

수유+너머 연구원, 문학평론가 등 참여

1997년 말 구제금융 사태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는 지금 어엿한 사장님일는지 모른다. 망한 사업을 뒤로하고 그는 노동판에 뛰어들었다. 2년여 전 경기 용인동백지구에서 ‘노가다’를 할 때였다. 인력소개소 사장이 밀린 임금 100여만원을 계속 주지 않자 홧김에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그는 ‘현주건조물 방화’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부인과는 별거한 지 오래됐고, 20대 후반인 딸과 아들은 이씨가 이곳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감옥 생활은 지루했다.

그러던 중 올해 초 교도소에서 갑자기 ‘평화 인문학’이라는 걸 강의하는데 듣고 싶은 사람은 신청하라고 했다. 강의는 3월10일부터 주말을 빼고 모두 열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그는 “처음엔 따분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수업이 진행될수록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가게 됐고, 결국 열 강좌를 다 들었다.

이씨는 “인문학이란 게 그냥 잡다한 것인 줄만 알았는데, 강사들이 철학이나 미술 같은 것을 우리 삶과 결부시켜 설명해줘 굉장히 유익했다”고 말했다. 늘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라는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에게서 긍정의 힘으로 부정의 기운을 떨치는 방법을 깨우쳤고, 막연히 어려울 것이라 여겼던 예술을 쉽게 설명해주는 윤세진 연구원(수유+너머)의 강의도 그를 사로잡았다. 얼마 전엔 문학을 주제로 강의를 한 문학평론가 이명원씨에게 “고맙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김천호 성공회대 초빙교수의 영화 강의와, 이천도립서당 훈장인 한재훈씨 강의도 그에게는 새로움이었다. 인문학을 통해 새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그는 “철학이 재미있다”고 했다.

이씨처럼 두 주에 걸쳐 ‘평화 인문학’ 강의를 들은 동기생 24명이 지난 3월21일 안양교도소 교육실에서 열린 수료식에 참석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와 함께 이번 프로그램을 마련한 성공회대 김성수 총장(주교)이 일일이 수료증을 전달하고 악수했다. 군무이탈부터 절도, 폭행, 사기,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 갇힌 이들이었으나 증서를 받으러 의자에서 일어서면서는 모두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2기부터 한홍구·김민웅·김종철 등 가세

몇 명은 앞에 나와 소감을 발표했다. 초등학교를 끝으로 학교 문을 밟아본 적이 없다는 천아무개씨는 “(교도소 내) 다른 프로그램보다 특별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많이 느꼈다”고 했고, 5년째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내 인생이 바뀌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대부분 뜻밖의 성과를 거둬 좋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동시에 프로그램 일정인 열흘은 너무 짧다며 한 달로 늘려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점심식사 직후인 오후 1시부터 강의를 시작해 졸립기도 했다며 시간을 조정해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이번 프로그램의 현장 관리를 맡은 안양교도소 직원 조동주씨는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힘든 강의였고, 강사들이 지명도도 있는데다 경험도 풍부해 수용자들이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의를 해줬다”며 “이곳을 나가서도 계속 공부를 하겠다는 이도 있는 등 반응이 생각보다 굉장히 좋다”고 말했다.

주최 쪽 반응도 좋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희망자를 구했는데 25명이 신청했다. 한 명이 교도소를 옮기는 바람에 24명이 수료했다”며 “수강자들이 스스로 나와 세계와의 관계 같은 실존적 고민들을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서의 첫 프로그램 운영이 결과적으로 “대박”이라고 했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 1기 때도 강사로 뛴 이명원씨는 “인문학 교육이 가시적인 성과를 볼 수 있는 게 아닌 만큼, 교정 당국이 비가시적인 효과를 확인하려 하지 말고 예산 책정과 제도적 지원에 나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하루 강사료 15만원은 다음세대재단이 후원했다.

‘평화의 인문학’ 프로그램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에 이미 의정부교도소와 영등포교도소에서 시범실시를 벌여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안양교도소에서도 이날 갓 1기가 끝났을 뿐이다. 7월 말까지 앞으로 네 기수의 강의가 더 진행된다. 강사들의 면모는 여전히 화려하다.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한 탁월한 시각과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 문명론을 거침없이 펼칠 같은 대학의 김민웅 교수,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김종철 발행인 등이 2기부터 가세한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과 문학평론가 고영직씨도 교도소 수용자들을 감동시킬 채비를 갖췄다.

대학에서 죽은 인문학이 교도소로

이씨를 만나기 위해 거쳤던 문 10개를 도로 돌아 나오니 봄 햇볕이 여전히 따사롭다. 대학에서 죽은 인문학이 그 햇살을 받으며 새록새록 움을 틔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 안에서.



1기 강사 5인의 후일담

“그곳엔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교육 대상이 모두 편견을 갖기 쉬운 ‘범죄자’들이다 보니 ‘평화 인문학’ 강의에 나선 강사들도 처음엔 긴장했다. 그러나 막상 강단에 서자 사회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게 5명 강사의 공통된 느낌이었다. 상상을 넘어선 수형자의 뜻밖의 질문에 되레 강사가 당황한 경우도 있었다. 1기 강의를 마친 강사들에게서 후일담을 들어봤다.

한재훈 이천도립서당 훈장(동양 고전)
색다른 경험이었다. 첫 강의 끝나고 한 분이 맨 처음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구절을 놓고 “공자가 말한 배움과 지금 우리의 배움이 같은 것이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기반으로 강의를 준비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인문학이 힘없고 배울 기회조차 갖지 못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게 사명이라고 느꼈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철학)
처음엔 긴장했다. 하지만 첫인상은 (교도소 밖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 나중엔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 (감옥이 별다른 게 아니라) 개인의 생각에 한계가 있는 곳, 편견이 있는 곳이 바로 감옥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생과 이랜드 파업 노조원들에게도 강의를 해봤지만, 오히려 교도소 강의가 더 쉬웠다.

윤세진 수유+너머 연구원(예술)
질문을 하면 답변들을 적극적으로 했다. 예상 밖이었다. 그들에게서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못 만난 사람들이다. 출소를 20일 남겨두고 공부하고 싶다거나 교도소에서 책을 읽고 싶다며 추천해달라는 이도 있었다. 자신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며 “강사님은 행복하세요?”라고 묻는 이도 있더라.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영화)
실제 교도소에 가보니 보통 우리가 ‘범죄자다, 감옥이다’ 하는 이미지와는 달랐다. 질문을 들어보니 생각한 것보다 지적 수준도 높고 성찰적인 분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한국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간다고 보는지, 예술성과 상업성 가운데 어느 쪽을 지향하는지” 등의 질문도 있었다. 교도소 안은 정보가 제한돼 볼 수 있는 영화가 한정돼 있음에도, 영화를 통해 보는 세상과 실제 보는 세상의 갭이 커지는 것 같다고 말한 이도 있다. 인상적이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문학)

지난해 의정부교도소 때는 감옥의 현실에 대해 몰라 감옥과 범죄학에 관한 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이번에는 전달 방식은 평이하게 하고 실생활 사례를 곁들이는 데 많은 고민을 했다. 반응은 좋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감옥 안에서 사회적 기본권이 정지되고 재소자를 시민으로 인정하지도 않지만 유럽은 성숙한 사회적 시민으로의 재복귀를 위한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한다.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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