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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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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과 공장에 의술이 깃들도록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민족의학연구원 열고 ‘약손문고’ 1편 출간한 윤구병 대표 </font>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두통이 찾아오면 약국을 찾기 십상이다. 광고로 익숙한 탓인지 환자들의 입에선 약 이름이 쉬이 나온다. ‘아스피린, 타이레놀, 게보린….’

재단법인 민족의학연구원(대표 윤구병)이 2월에 펴낼 ‘약손문고’ 1편 의 처방은 다르다. 우리 손을 이용하거나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면 된다. ‘지압, 찜질, 목을 앞뒤로 움직이기, 담뱃잎 치료, 물 끼얹기, 토란 껍질을 찧어 붙이기….’

“침·뜸·지압 등으로 병 다스려야”

충북대 철학과 교수인 윤구병(65) 선생이 민족의학연구원을 띄웠다. 지난해 8월 보건복지부에서 재단법인 설립 허가도 받아냈다. 연구원은 서울 서교동 481-2 태복빌딩 4층에 둥지를 틀었다. 건물 1층엔 점심 밥값을 1천원부터 형편껏 내는 ‘문턱 없는 밥집’과 변산공동체에서 생산한 유기농 제품을 판매하는 ‘기분 좋은 가게’가 있다. 바로 위층엔 공동 육아와 공동체 교육 사무국이 자리잡았다. 3층엔 오랫동안 그가 회장을 맡아온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있다. 4층엔 토박이 출판사도 있다. 맨 위층엔 노동자들이 직접 글을 쓰는 월간지 사무실이 있다. 민족의학연구원으로 가는 길에선 그동안 그가 추구해온 어린이 교육, 생태, 공동체 같은 삶의 가치와, 그 가치의 실현 흔적을 자연스럽게 더듬게 된다.

1995년부터 일군 변산공동체에 있을 거라 짐작했던 그가 요즘 일주일 중 사흘은 서울에 있다. 농한기지만 매듭지어야 할 일이 많아서다. 당최 언론 인터뷰를 꺼리는 윤 선생이 1월9일 선뜻 인터뷰에 응한 까닭은 “다른 건 몰라도, 나중에 내가 없어도 민족의학연구원에 도움이 될까 해서”란다. 연구원은 그의 남은 열정을 쏟아낼 마지막 피사체처럼 보였다.

왜 민족의학인지 물었다. 긴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날 많은 의과대학과 의료시설이 생기고 의료기구나 치료방법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그 혜택이 대중 전체에게 돌아가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실정이다. 들판에서, 탄광에서, 공장에서 이 땅의 많은 귀중한 생명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의료환경 속에서 사고로 다치거나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반생명적 사태의 궁극적 원인은 잘못된 의료정책에 있다. 보건소에 나갈 기력조차 없는 노인들에겐 첨단 의료나 용한 조제약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의료복지사나 보건복지사가 집집마다 찾아가 침, 뜸, 지압 등 맨손으로 쉽게 (웬만한) 병을 다스릴 수 있도록 의료 행위나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의료 현실과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그 나름의 문제의식과 해법이 민족의학연구원 설립의 동인이었다.

남북 의료체계 집대성 의미로 ‘민족의학’

그는 12살 때 지병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구병이가) 사람들 병 고쳐주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도 떠올렸다. 철학 교수였던 그가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의 (1934)을 재발간하면서다. 해방 뒤 월북해 북녘에서 초대 보건상을 지낸 조헌영은 책 서문에 “대중 의료가 실로 비참한 상태에 있었으며, 이 대중 의료에 관하여 가장 공헌이 많고 위대한 공효(공용)가 있는 한의학이 날로 쇠퇴해가는 것이 애석하고 우려되어 그 부흥에 미력을 보태려고 한다”고 밝혔다. 윤구병 선생 또한 저자가 소망했던 ‘의술의 대중화’를 소망했다. 그는 “적은 비용으로 누구나 손쉽게 치료할 수 있고, 치료받을 수 있는 민간 의학”의 미래를 꿈꿨다.

민족의학연구원 설립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보건복지부와 2년 반 동안이나 지루한 힘겨루기를 벌여야 했다. 현재 재단법인의 이사로 등재한 김근태 의원과 유시민 의원이 연달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던 시기였지만, 허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법인 설립 허가가 지연된 까닭을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다만 “현 의료체계나 의대에서 침술이나 뜸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민간요법과 치료를 전부 불법 의료행위로 몰아가는 판에, 가장 손쉽고 돈 안 드는 이런 치료법들을 모아 소개하는 일이 양의사나 한의사 업계엔 그리 썩 반길 일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가 연구원 이름 앞에 ‘민족’을 쓴 건 남과 북 각각의 의료체계를 하나로 집대성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편적 의료체계가 아닌 특수한 의료체계로 한정돼 인식되거나, 자칫 이념적 색채를 띠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우려에도 ‘민족’이란 단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실천의학을 목표로 하는 연구원이 30~40년이 걸리더라도 민족의학 백과대사전을 종합해 묶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에 자생하는 1천여 종의 약초를 모두 세밀화로 옮겨놓는 동의학 ‘본초도감’도 펴낼 계획을 갖고 있다. 당장 2월에 약손문고 맛보기 한 권을 펴낼 계획이다. 현대인은 대부분 가정에 의약품 상자가 하나씩 있다. 조선시대 등 옛날 가정엔 이나 의학편이 실린 이 있었다고 한다. 윤 선생은 세종 때 방대한 임상체험을 집대성한 와 선조 때 허준의 이 나온 지 400년이 지나는 동안 국가 단위에서 의료백과사전을 펴낸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국가가 국민들의 의료 문제를 소홀히 생각했다고도 볼 수 있다”며 “불행하게도 남녘에서 임상체험이나 의료체계가 밥벌이 수단이 돼 처방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5층 건물 가득 변산공동체 목표 느껴져

첫 약손문고는 191쪽 분량인 북녘의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을 곽노규 강남 동일한의원 원장의 감수를 받아 3분의 2로 압축했다. 복잡한 기구 등을 활용하는 치료법 등이 빠졌다. 북녘과 저작권 계약을 하고 책을 남녘에 맞게 재편집한 것이다. 연구원엔 옌볜에서 출판사를 한 송춘남(56·재중동포)씨와 한문에 조예가 깊은 편찬실장 전호근(46)씨 등 편찬실 및 편집 인원 8명과 세밀화를 그리는 10여 명의 일꾼들이 있다. 펴낸 책은 ‘뜻’에 맞게 일반 책값의 절반에 판매할 계획이다.

그가 하려는 건 동서양 의학 간 우열 논쟁이 아니다. 연구원의 이사진 구성을 살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서양의학에선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와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가, 동양의학에선 박석준 동의과학연구소 소장, 안규석 경희대 한의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나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물리학) 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사들도 뜻을 보탰다.

그를 요즘 가장 바쁘게 내모는 건 2월 말 출판할 계획인 교열 일감이다. 지난 2000년 남북 어린이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초등용 사전을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자꾸 미루다 최근에야 정리할 시간을 갖게 됐다. 그는 또 다른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월24일이면 충북대 교수로서도 정년퇴임을 맞는다. 자신이 없어도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변산공동체도 새 책임자에게 맡겼다. 어린이 도서 출판사인 (주)보리의 지분 44%도 모두 정리했다. 처분한 지분은 전액 농사에 뜻이 있는 교사 10명과 학생 30명이 변산공동체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할 참이다. 윤 선생은 변산공동체학교의 목표가 두 가지라고 말했다. “하나는 생명체가 자기 스스로 앞가림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불어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윤구병의 가치’를 품은 5층짜리 건물을 나오면서, 민족의학연구원을 만든 동력도 변산공동체학교의 목표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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