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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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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 ‘무수한 아줌마들’ 기억해야죠

등록 2007-11-23 00:00 수정 2020-05-03 04:25

의 작가 안재성을 만나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정수산 기자 jss49@hani.co.kr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에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 열사 유서 중에서)

‘어눌하다’는 표현은 옳지 않겠다. 그는 그저 말을 조심해서, 아주 부드럽게 하는 사람일 뿐이다. 척추 디스크가 만들어낸 참지 못할 두통으로 허옇게 센 머리칼을 염색약으로 쑥스럽게 가린 작가 안재성(48)씨를 11월13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9층에서 만났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해 간 지 꼭 37년째를 맞은 이날 저녁 안씨는 (돌베개 펴냄)이란 새 책의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했다.

“80년대를 우습게 회고한 책들 불쾌”

“그러게, 11월13일이네….” 책 얘기를 꺼내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로 말문을 열었다. “요즘엔 노동자들이 많이 조직화해 있지 않나. 조합 힘도 강해지고, 민주노총도 있고, 민주노동당도 있고. 하지만 그 이면에 700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청계노조가 유일한 민주노조였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재 민주노총 주력 노조 대부분은 노동운동 대상조차 아니었다.”

강원대 농대 재학 중이던 1980년 광주항쟁 관련 시위로 구속되면서 제적된 안씨는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을 노동운동가로 살았다. 제2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에 선정되면서 그에게 ‘작가’란 칭호를 안겨준 첫 장편소설 (1989)은 “직접 경험한 사실 98%와 소설적 가공 2%”의 결과물이란다. 노동운동을 접은 지 10년 세월을 훌쩍 넘겼지만, 그는 여전히 노동운동가처럼 말했다.

“출범 당시 청계노조 역시 요즘 말로 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조합이었다. 흩어진 노동자,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 그래서 상황이 매우 어려운 노동자들의 조직이었다. 그래도 당시엔 밥을 하든 경비원을 하든 정규직이었지만, 지금은 비정규직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상황이 더 나빠졌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운동은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은 지난 2002년 문단에 ‘복귀’한 이래 그가 내놓은 다섯 번째 책이다. 1993년 공안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석 달여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후 그는 느닷없이 8년여 동안 글쓰기를 멈췄다. “스스로 한계에 절감했고, 잘 써지지도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많은 이들이 노동운동판을 떠나던 시절이었고, 그 역시 “평범한 삶”을 선택했다. 생계를 위해 공장에 다녔고, 짬을 내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도 땄다. 경기도 이천으로 거처를 옮겨 직접 집을 짓고, 과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였다. 우연히 친구한테서 90년대 중반 이후 나온 책들을 얻어 읽게 됐다. 주로 1980년대를 회고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솔직히 불쾌했다. 치열하게 살아갔던 그 시절을 우습게 만들어놓은 경우가 많았고…. 다시 한 번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일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연습 삼아 앞으로 5년 동안 1년에 한 권씩 써보자”고 결심했단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베트남전으로 이어진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훑은 (삶이보이는창·2003)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어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한 (사회평론·2005), (사회평론·2006), (실천문학사· 2007)을 잇따라 내놨다. 안씨는 “청계노조사까지 꼭 5년 만에 다섯 권을 내게 됐으니, 오늘로 연습 기간은 졸업을 하는 셈”이라며 웃었다.

‘노동운동’과 ‘사실기록’ 두 가지 테마

“이런 얘기를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무식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광대 노릇을 하는 문학으로 내 인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먹고사느니 포클레인 일을 해서 먹고살겠다. 요즘도 일 나가면 하루 35만원은 받는다.” 부드러운 말투에서 단단함이 뚝뚝 뭍어났다.

안씨는 “작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읽는 데 힘들고 때로 눈물이 나더라도, 보이지 않는 역사의 힘, 인간의 힘을 보여주는 것을 쓰고 싶다”고,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오해받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을 쓸 때면 항상 ‘노동운동’과 ‘사실기록’이라는 두 가지 테마를 염두에 두는 것도 이 때문이란다.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평화시장에서 싹튼 민주노조 운동은 격동의 1980년대를 거치며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로 자리를 잡아갔다. 1998년 4월 서울의류노조로 통합되면서 그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1970년 11월13일 시작된 청계피복노조의 역사는 고스란히 우리 노동운동사의 ‘빛나는 기억’이다. 그 기억의 저편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싸우다 간 이들이 있다. 더러는 상처를 안고 떠나가, 그리워하면서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안씨가 청계노조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들로 “무수한 아줌마들”을 꼽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우리 사회의 통념상 특별히 잘나가는 사람은 없다. 아주 잘돼야 아파트 한 채 갖고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만나면 손 잡고, 반가워 헤어질 줄 모른다. 상처를 안은 채 떠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동지’들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살아간다. 책을 마감하면서 원고를 보여달라는 분들이 많았다. 자기 얘기 틀렸다고 따지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얘네들 이름은 꼭 넣어달라’며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열 명, 스무 명씩 주욱 불렀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미싱 50년, 박명옥씨에게 노동은…

그 가운데 ‘청계천의 터줏대감’으로 노조 부위원장까지 지낸 박명옥씨도 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미싱’을 타는 박씨에게 노동은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다. 그 고통과 기쁨, 슬픔이 모두 그의 삶에 하나로 녹아 있다. 은 수많은 박씨들에게 작가가 전하는 ‘사랑의 노래’인지도 모른다. 책을 갈무리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아직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56년부터 청계천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50년째 미싱을 타고 있는 그녀야말로 청계피복의 역사다. … 지긋지긋한 가난에 단련되었던 그녀는 50년 전 청계천에서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도 노동의 고통보다는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으로 열심히 일했다. 들어간 지 1년 만에 기술을 배워 보조 미싱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평생 자랑거리였다. 반세기가 지나, 남들은 눈이 어둡고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서 배우지 못한다는 컴퓨터 미싱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자랑거리다. 노동은 그녀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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