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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방화 6개월, 답답해 열불나!

등록 2007-11-23 00:00 수정 2020-05-03 04:25

상황 증거 확실하고 그을음 신발 확보했지만 결정적 증거 유실되고 검찰은 미적미적

▣ 동두천=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아이고, 어쩌누.” 이쌍업(52)씨는 한숨을 섞어 부르며 가위질을 이어갔다. 거울 앞에는 이씨의 30년 단골이라는 ‘유일이 어머니’(63)가 반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씨의 가위가 나아갈 때마다 유일이 어머니의 ‘보글보글 파마’ 머리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지난 5월19일 갑작스런 화재 이후 영업을 접었지만, 이씨를 기억하고 집으로 찾아드는 단골들까지 내칠 순 없는 법이다. 그는 “미군부대 앞에서 머리 자르며 보낸 세월도 30년이 넘는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아주 단순한 사건이었다. 이씨가 경영하던 동두천 광암동 로얄미용실에서 불이 난 것은 5월19일 새벽 3시45분께다. 방화였다. 이 불로 미용실 내부가 잿더미가 됐고, 하루아침에 이씨도 실업자가 됐다. 거울에는 ‘fuck you’라는 영어 욕설이 서로 다른 색 매니큐어로 두 번 적혀 있었다. 현장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서 불구경을 하던 미 2사단 보병대대 소속 로퍼 더스틴 티모시(20) 이병이 이씨의 아들 최아무개(31)씨에게 붙들려 한국 경찰에 넘겨졌다.

출입 제한 상태에서 부대 밖으로

티모시는 미용실에 불을 질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날 새벽 1시50분께 미용실 맞은편 문구점 앞 화분 두 개를 도로에 던지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미용실 옆 슈퍼마켓 폐쇄회로 TV에 찍혔고, 새벽 2시 넘어서는 근처 70대 노인의 집에, 30분 지난 새벽 2시30분께는 미용실 맞은편 상가 2층 가정집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이다. 티모시를 체포했던 한국 경찰은 그가 입고 있던 겉옷과 그을음이 묻어 있던 신발 등을 증거품으로 확보했다. 그는 4월에 한국인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른 혐의로 부대 밖 출입이 제한된 상태였다. 그가 어떻게 부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국 경찰은 티모시를 미 2사단 헌병대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현행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법당국이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미군 쪽에 넘겨주지 않고 처벌할 수 있는 경우는 “살인과 방화 같은 흉악 범죄나 죄질이 나쁜 강간 범죄를 범행 현장에서 잡은 때”(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의의사록 22조 5항)밖에 없다. ‘살인’(또는 방화)과 ‘현행범’의 교집합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조항이 적용된 예는 지난 1월1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서 60대 할머니를 성폭행한 제로니모 라미레스(23) 이병밖에 없다.

사건이 터진 뒤 6개월이 지났지만 이씨의 미용실은 아직 폐허로 방치돼 있다. 이씨의 살림집은 불탄 미용실의 2층, 그 위에는 큰아들이 사용하는 조립식 건물이 있다. 미용실 앞에는 ‘티모시 이병이 저지른 방화와 강도 행위에 대해 즉시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하라’(Apologize immediately for the arson & robbery which PVT T, 2nd Div committed and pay for the damage)고 쓰인 펼침막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씨의 지난 세월은 이제는 낡고 퇴락한 기지촌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만큼이나 서늘한 느낌이 난다. 이씨의 고향은 경상도로 그의 부모는 이씨가 서너 살 때 파주군 장파리로 이사해왔다. 그곳에서 부모는 과수원 농사를 지었다. 60년대까지 파주는 한반도에서 미군이 가장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다. 나중에 ‘용주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규모 성매매 집결지가 코앞에 있었다. 그는 “그 무렵 미군들이 생명 수당으로 받은 돈을 물 쓰듯 쓰곤 했다”고 말했다. 용주골에는 미군 군표와 달러가 넘쳐났고, ‘아가씨’들은 건전지가 떨어지면 라디오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곳에서 이씨는 열다섯 살부터 용주골 여성들을 상대로 머리를 잘랐다.

미군이 전화 건 뒤 찾아온 한국 경찰[%%IMAGE4%%]

납득하기 힘든 일들이 생긴 것은 화재 뒤 사흘이 지난 5월21일부터였다. 양주경찰서 경찰들이 아침 9시30분부터 몰려와 현장 조사를 했다. 이씨와 아들 최씨는 “범인이 20개 넘는 서랍을 열었으니 지문 채취를 해달라”고 했다. 경찰은 “방화사건에서는 원래 지문이 잘 안 나온다”며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경찰이 떠난 뒤 1시간쯤 지나 미군 범죄수사대(CID)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았다.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이었다. 최씨는 “나가달라”고 말했지만, 미군들은 자신들이 미군 범죄수사대라고 말하고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최씨는 “그들이 현장에서 매니큐어, 루주 등 증거품들을 챙겨 부대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잠시 뒤 미 2사단의 통역이라고 신분을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욕설이 쓰인 거울을 가져갈 수 있냐”고 물었다. 최씨는 “가져간 것들을 돌려주느냐”고 물었고, 그는 “가져가면 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그럼 가져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잠시 뒤 미용실로 찾아온 것은 뜻밖에도 한국 경찰이었다. 양주경찰서 소속 경찰관 정아무개씨는 “티모시의 옷에서 나온 매니큐어 성분과 대조해보려 한다”며 욕설을 거울에서 지웠다.

이씨는 “용주골 생활을 버리고 동두천으로 이사온 것은 29년 전”이라고 말했다. 1971년 미 7사단이 한국을 떠난 뒤 용주골의 경기는 급속히 쇠퇴해갔다. 새로 떠오르기 시작한 곳은 미 2사단의 주력인 ‘캠프 케이시’와 ‘캠프 호비’가 자리한 동두천이었다. 이씨의 로얄 미용실이 위치한 동두천시 광암동은 캠프 호비의 정문 앞으로 사람들은 그 일대를 ‘턱거리’라 불렀다. 마을로 들어서는 언덕이 높아 고개를 넘으려면 숨이 턱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턱거리’가 미군들 사이에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언덕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차마 입으로는 옮기기 힘든 여러 ‘퇴폐쇼’가 펼쳐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씨는 “한창때에는 클럽마다 아가씨 20~30명이 들어차 왁자지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4년 미 2사단의 1개 여단 병력이 이라크로 차출되고, 턱거리의 명성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지금은 필리핀 여자들이 조금 남아 명맥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턱거리에서 이씨는 행복했을까. 그의 남편은 간경화로 17년 동안 고생하다 지난해 10월 숨을 거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병원에서 5개월 정도 산다고 했지만, 11개월 살았다. 한창 좋을 때는 중고차 가게를 했지만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GM대우에서 내놓은 ‘무이자 할부 판매’라는 초강경 마케팅 정책 탓에 중고차 업계가 된서리를 맞았다. 이씨 가족은 수억원에 이르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개인 파산 신청을 했다. 이씨는 “매달 60만원씩 8년 동안 ‘워크아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장원이 불에 탄 뒤 수입이 끊겼고, 통신비를 내지 못해 11월9일에는 휴대전화가 끊겼다. 그는 전화를 걸지 못하고 받기만 한다.

“지문 미채취”vs “네 번 채취”

경찰은 결국 티모시가 불을 질렀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폐쇄회로 TV에는 방화 장면은 담기지 않았고, 그을음이 묻어 있는 신발은 친구 ㅇ에게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씨와 최씨는 “경찰이 지문 채취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네 번이나 지문을 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경찰은 “티모시의 범행이 확실해 보인다”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지만,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증거는 루주였다. 한국 경찰에 체포될 때 티모시의 티셔츠에는 루주 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루주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장에서 물건을 가져간 것은 둘뿐이다. 하나는 한국 경찰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 범죄수사대다. 검찰은 “검찰이 확보한 증거품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씨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알려줄 수 없다”고 했고, “티모시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포기했냐”는 질문에도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알려줄 수 없는 것들은 그 밖에도 많다. 황왕택 ‘동두천 미용실 미군 강도방화사건 해결 경기북부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한국 경찰의 입회 없이 미군 수사대가 직접 증거품들을 가져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외교통상부 쪽에 SOFA 합동위원회 SOFA 운영개선안 가운데 ‘초동수사 강화 협조방안’의 정보공개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물론 “알려줄 수 없다”였다. 미 2사단 쪽에서도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참다 못한 이씨는 “갖고 있는 증거품을 돌려달라”며 의정부지검을 상대로 ‘압수물 가환부신청서’를 냈다. 황 위원장은 “미군 범죄수사대가 루주를 가져갔다”며 “이는 증거 인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1월9일 이 찾은 캠프 호비 정문 앞은 한산해 보였다. 이르면 2011년까지 의정부·동두천 일대에 흩어진 미 2사단이 평택으로 옮기고 나면 주변에 남은 클럽들도 머잖아 사라질 것이다. 생활비가 끊긴 지난 6개월이 됐고 동두천 시청은 이씨에게 3개월 동안 40만원을 지급했고, 지난 추석 때는 20kg짜리 쌀 한 포대를 지급했다. 그는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화재 현장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살기 힘들다”고 말했다. 미장원 문을 새로 열려면 먼저 화재 현장을 치워야 하고, 리모델링을 해야 하고, 미장원 집기들을 사야 한다. 그는 “돈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1심판결까지 채 2주일 안 남아

남은 문제는 티모시다. 그는 4월에 저지른 폭력 행위로 기소됐고, 11월21일 의정부 지방법원에서 1심 판결이 예정돼 있다. 1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실형이 확정되면 티모시는 천안소년교도소에 마련된 주한미군 전용 옥사에서 형기를 채워야 한다. 집행유예 판결이 나면 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의정부지검이 그를 방화와 주거 침입 등의 혐의로 다시 기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은 채 2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김상도 의정부지검 차장검사는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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