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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타 야스시] 실연의 아픔 역사로 달래다

등록 2007-11-23 00:00 수정 2020-05-03 04:25

▣ 오사카=글·사진 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일본 오사카에서 5년째 의료복지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미야타 야스시(28)는 한때 사귀던 자이니치(재일동포) 여성과 결혼을 꿈꿨다. 그러나 그 여성의 아버지가 워낙 강하게 반대해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그는 “결혼 반대 이유가 ‘일본인에 대한 거부감’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솔직히 화도 났다”고 말했다. ‘분노’는 쉽게 ‘의문’으로 바뀌었다. “대체, 왜?”

실연의 상처가 낳은 의문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낯선 역사로 그를 이끌었다. 일본 정부와 극우파가 왜곡·찬양해온 ‘대동아전쟁’이 아닌, 가해자로서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실상과 마주했다. 천황을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것을 ‘영광’이라 가르친 ‘교육칙어’와 조선인 강제징용, 종군위안부 그리고 전후 재일조선인들이 세운 ‘민족학교’에 대해 차례로 알게 됐다. 그는 “결국 자이니치 1세대가 일본인에게 갖는 ‘거부감’의 실체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배웠으니 써먹어야 한다. 미야타는 지난 10월 말 오사카에서 열린 ‘전일본 민주의료기관 연합회’(민의련) 단합대회에서 ‘평화답사 실행위원장’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마침 한국의 녹색병원에서도 참가단을 보내온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한국 참가단과 오사카성 주변의 전쟁 관련 역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답사 책임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오사카성 천수각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동쪽 일대 40만 평은 일본 육군 직영으로 중량병기를 제조한 ‘포병공창’이 있던 곳이다. 전쟁 당시 민간인 종업원 수가 6만7천 명에 이른 이곳은 미군의 집중 공습을 당했는데, 조선인 강제징용자도 1300여 명이나 일하고 있었단다. 행사 기간에 그는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그곳에 여전히 버티고 선 ‘교육칙어비’를 소개해줬다. 칙어비 12번째 항목에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신심을 바쳐, 국가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이는 선량한 국민의 당연한 임무다”라고 적혀 있다.

그는 “전쟁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이 ‘교육칙어’를 못 외우면 2학년 진급이 안 됐다”며 “당시 일본 국민이 집단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설명을 들은 한국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뛸 듯이 기뻤다”는 미야타, 실연의 상처는 확실히 잊은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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