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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엽] 판화에 새긴 대추리의 뒷모습

등록 2007-10-13 00:00 수정 2020-05-03 04:25

▣ 평택=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대추리에서 판화가 이윤엽(39)씨를 처음 봤을 때 당연히 마을 청년 가운데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저런 일로 늘 바쁜 것처럼 보였다. 2006년 5월4일 무너져버린 대추초등학교 창문과 담벼락에 주민들의 얼굴을 그렸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버린 집을 단장하고 보일러를 고쳤다. 이제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대추리 노인정 옆에 있던 구멍가게 담벼락에 믿음직한 황소와 농부 가족의 벽화를 그려나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가 예술가란 사실을 알았다. 그는 “마을일 보느라 작품에 몰두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 벽화에는 ‘황새울 가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들른 대추리에서 이씨는 늘 정신없이 바빴다. 벽화를 그리고, 보일러를 고치고, 16번과 20번 버스가 쉬어가는 대추리 버스정류소 뒤편에 있던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주민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대추리 평화역사관’을 만들었다. 마을 노인들은 “우리 마을에 민속촌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그가 대추리에 처음 찾아간 것은 2005년 12월이고, 대추리 주민이 돼 살기 시작한 것은 2006년 5월, 대추초등학교가 무너지고 난 뒤다.

그는 판화도 열심히 그렸다. 평택 대추리·도두리를 지키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만든 모임 황새울의 까페(cafe.daum.net/hwangsaewool)를 방문하면, 대추리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그의 판화 수십 점을 만날 수 있다. 전경들의 버스와 방패가 막고 있는 좁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돌아나가는 꼬부랑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서글픔이 느껴진다. 작품의 제목은 ‘대추리 가는 길’이다.

10월3일 방문한 평택평화센터 사무실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가진 이씨가 나타났다. ‘평택평화센터’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무실 간판을 들고 있었다. 그는 “평화센터 문을 연다기에 인천 해장국집에서 쓰던 두꺼운 테이블로 간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고깃집 테이블은 쓸 수가 없어요. 가운데에 불판 구멍이 있거든요.” 그의 작업실은 경기도 안성에 있다. 이씨는 “대추리 형님들이 작업실 짓는 일을 많이 도와줬다”며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9월28일에서 10월4일까지 인천에서 ‘일’이라는 주제로 네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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