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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똑같은 한 잔은 없소이다

등록 2007-08-10 00:00 수정 2020-05-03 04:25

1%에 꼽히는 초고수 바리스타 임종명씨, 커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전도하다

▣ 글 정재원 인턴기자(한양대 행정학4) arsenlupin007@cyworld.com
▣ 사진·정수산 기자 jss49@hani.co.kr

문화방송 미니시리즈 이 화제다. 7월2일 방영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주간 방송 순위 앞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의 재미는 한결(공유)과 은찬(윤은혜)의 애정구도만이 아니다. 브라운관 밖으로 풍겨나오는 커피향의 매력을 빼놓을 수 없다. 꽃미남들이 옮기는 20kg짜리 원두 포대에, 감각적인 에스프레소 머신에, 멋들어지게 쓰인 메뉴에 빠짐없이 커피향이 스며 있다. 극중에서 한결은 ‘커피 프린스’를 준비하면서 벤치마킹할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에스프레소에 우유 거품으로 그림을 그리는 ‘라테아트’를 하는 곳을 찾았다(3회). ‘프린스들’의 실제 스승은 김창완이 아니라, 라테아트로 유명한 바리스타 임종명(31)씨다.

커피숍 아르바이트로 출발

바리스타는 이탈리아어로 ‘바에서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의 ‘파티시에’만큼 낯선 이 단어는 1980년대 초반 스타벅스가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를 차용하면서 널리 퍼졌다. 바리스타는 커피 만드는 전 과정을 담당한다. 우선 원두(커피콩)를 선택한다. 다음은 원두를 볶는 ‘로스팅’. 만들 커피가 드롭 커피냐 블렌드 커피냐에 따라 ‘블렌딩’ 과정이 추가된다. 블렌딩은 여러 종류의 원두를 섞어 풍부한 맛이 나도록 조합하는 과정으로, 한 종류의 원두를 사용하는 드롭 커피는 해당되지 않는다. 블렌딩을 먼저 할지 로스팅을 먼저 할지는 바리스타에게 달렸다. 볶은 원두를 그라인더를 이용해 간 뒤 에스프레소 머신에 넣어 액을 추출하면 커피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에스프레소가 완성된다. 에스프레소에 우유 등을 첨가하면 카푸치노, 카페라떼 등의 커피 메뉴가 탄생한다.

임씨는 이 과정 중 에스프레소 추출과 에스프레소에 그림을 그리는 라테아트 분야의 전문가다. 임씨의 일터는 서울 대치동에 위치한 커피숍 가배두림. 7월31일 오전 10시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라색과 빨간색이 강렬한 인테리어에 앞서 고소한 커피향이 방문객을 맞았다. 임씨의 솜씨이다.

그는 업계에서 추산하는 2천여 명의 전문 바리스타 가운데 1% 이내에 꼽히는 실력자다. 의 제작진이 기술고문을 요청했을 정도로 바리스타계에서는 유명 인물. 항간에는 ‘연봉 1억설’이 돌기도 한다. 한 유명 식품회사에서 거금을 걸고 브랜드 론칭을 제안했으니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이 ‘겁없는 청년’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좋은 원두커피를 많은 사람이 즐기게 하는 게 지금의 목표”이기 때문이란다. “세상에 똑같은 한잔은 없다”면서 한잔 한잔의 커피에 정성을 쏟는다.

그가 처음부터 전문가로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군에 다녀온 뒤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게 커피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8년 전이다. 그는 진지하게 커피 만드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여겼으나, 주변 사람들은 “남자가 다방 일을 왜 하냐”는 말을 쉽게 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이든 그림이든 한번 ‘꽂히면’ 누가 뭐래도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임씨는 2003년 처음 개최된 ‘한국 바리스타 챔피언십’(KBC)에 참가해 ‘세계 평화’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3등을 차지했다. 이듬해 2회 대회에서는 호두와 에스프레소, 아이스크림을 배합한 창작 메뉴 ‘호두 아포가또’를 선보여 1등을 했다. 바리스타를 당당한 전문직으로 알리고, 다른 바리스타의 기술을 직접 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KBC는 20분 동안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창작 메뉴를 각각 4잔씩 만드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첫 출전에서 임씨는 콜라의 검은색, 에스프레소의 갈색, 우유의 흰색을 융합시킨 작품을 내놓았다. 이를 위한 용기를 따로 만들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했다. “피부색을 초월한 화합”의 의미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가게’ 홍보·기술자문 활약

연이은 수상은 그에게 또 다른 인연을 가져다주었다. 그를 눈여겨본 ‘아름다운가게’ 쪽에서 지난 5월 그에게 홍보·기술자문을 부탁해왔다. 아름다운가게는 공정무역을 통한 커피 사업을 하고 있다. 커피 재배 외의 소득을 창출할 길이 없는 곳에서 생산한 원두를 직접 알맞은 가격에 사들이는 것이다. 유통 마진 같은 거품이 빠지니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일이다. 임씨는 “직업인으로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흔쾌히 응했고, 아름다운가게에서 판매하는 커피 ‘히말라야의 선물’을 이용해 에스프레소를 만든다. 행사 때마다 그의 에스프레소와 라테아트는 사람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한다. 그는 ‘히말라야의 선물’을 두고 “유기농 재배를 하고 있고 넓지 않은 면적에서 수작업으로 재배하므로 원두의 품질이 좋다”고 말했다. 좋은 원두야말로 바리스타에게는 좋은 ‘선물’이다.

‘봉사’의 마음 외에 다른 속셈도 있다. 원두커피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원두커피는 음료수”라고 여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는 왜곡된 면이 많다”고 지적한다. 원두커피는 보통 ‘럭셔리한 카페’에서 비싼 값에 마시는 것으로 인식돼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길거리 자판기나 손쉬운 커피믹스 문화가 만연해 있다. 이런 ‘커피 문화의 양극화’가 사람들이 커피의 진짜 맛을 즐기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특히 미국의 전투식량에서 출발한 커피믹스가 우리나라 커피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에 속이 상한다고 했다. 커피를 즐기는 인구는 많은 데 견줘, 커피를 제대로 즐기는 인구는 많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대중이 즐길 만한 고급 커피를 알리는데 열심이다. 꼭 비싸야 고급인 게 아니다. 그는 ‘스스로 만드는 원두커피’에 관해 매달 세미나를 열고, 일터에서 바리스타 양성 과정인 ‘coffee MBA’도 만들었다. 대학교를 다니며 강의도 한다. 아름다운가게 윤팔병 대표가 “이탈리아 사람 같다”고 평한 그의 ‘외모’도 이런 넓은 활동반경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여기에 직업의식과 전문성이 더해지니, 말 그대로 ‘커피 프린스’다.

파는 사람보다는 만드는 사람으로

임씨는 “바리스타는 시작하기 쉽고 그만두기도 쉬운 직업이지만 그저 폼나는 직업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바리스타는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을 서 있어야 하는 육체노동이다. 커피 만들 때 자주 쓰는 쪽의 손목과 손도 많이 상한다. 돈벌이도 그리 녹록지 않다. 그래서 유능한 바리스타들은 전업을 많이 했다. 에스프레소 기계를 팔고, 원두 도소매를 한다. 현업에 있는 이들도 자기 가게를 차려 ‘사장님’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임씨는 섣불리 자기 가게를 열지는 않을 작정이라고 한다. 커피 파는 사람보다는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 가장 오래된 현직 바리스타로 아직 할 일이 많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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