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통신문 등으로 대체되는 폭력 예방교육… 폭력을 ‘남의 가정사’ 취급하는 인식 전환부터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데이트’ 하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핑크빛이에요.” “설레요. 감미로워요.” “이렇게 기분 좋은 데이트에서, 남자친구가 원하지 않는데 키스하려 하거나 가슴을 만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이들 눈빛에 고민이 살짝 스친다. 6월20일 오후 2시40분, 서울 강서구 ㅁ중학교 2학년6반 교실. 서울여성의전화 인권운동센터장 김영자 강사가 초청된 폭력 예방교육 시간이다. 이 시간의 주제는 ‘데이트 성폭력’. 김 강사는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친구라도, 원하지 않는데 만지면 폭력”임을 가르친다. “언제 뽀뽀할지, 언제 손잡을지는 내가 정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용어를 알려준다. 은아무개(15)양은 “몇 번 튕기다 들어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자세히 알게 돼 도움이 많이 된다”라고 말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다음 시간 수업 없어요. 더 이야기해요”라며 나가려는 김 강사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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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폭력 예방교육은 초·중·고등학교의 의무사항이다. 2004년 제정된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학기별로 정기적으로 실시돼야 한다. 성희롱·성폭력 및 성매매 예방교육 또한 의무시행 사항이다. 그러나 ‘데이트 성폭력’ 같은 생생한 주제를 다루며 아이들 눈을 빛나게 하는 교육은 흔치 않다. 서울 ㅎ중학교 안찬우(15)군은 “창의적 재량시간에 폭력 관련 비디오를 틀어주는데 다 뻔한 얘기라서 애들이 떠들고 잘 안 본다”라고 말했다. 서울 ㄷ고등학교 최지혜(18)양도 “지금 2학년인데 그동안 폭력 예방교육 같은 건 받아본 기억이 없다”며 “‘맞은 적 있냐, 누가 담배 피우는지 봤냐’ 등 설문조사만 했다”라고 말했다.
현재 각급 학교에 의무화된 예방교육은 산불 예방교육, 약물 금지교육 등을 포함해 약 40여 가지에 이른다. 이들과 더불어 폭력 예방교육이 이뤄지다 보니 그 중요성이 묻히고 있다. 김은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가정통신문이나 전단지 배포로 대체하거나 교장 훈시 또는 일회적 특강 등의 형태로 형식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폭력이 사회문제가 될 때만 진단, 대책이 쏟아져나오다 결국 다시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학교에서 학교폭력 교육이 제대로 시행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10월에는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가정폭력 예방교육이 의무화됐다. 6가정 중 1가정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나고 있고, 10명 중 6명의 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폭력을 당하고 있는 실정과 비교하면 출발이 늦다. 학교, 경찰 등 사회적 기관에서 ‘가정은 사적 공간으로 개입할 수 없다’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평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이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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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추석 연휴 뒤 박아무개(32) 교사는 수업시간에 왼쪽 팔에 피멍이 든 채 앉아 있는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 아이는 이미 오른쪽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왼쪽 턱과 볼도 잔뜩 부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쇠파이프로 맞았다”고 했다. 박 교사는 학생의 담임교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대책을 논의했으나, 돌아온 답변에 더 당황했다. “그 정도의 체벌은 있을 수 있다. 그 애가 맞을 짓을 한 것 같다.” 담임교사는 “남의 집안일인데 별수가 없다”면서 “빨리 졸업해서 멀리 가서 혼자 돈 벌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학교나 교사들이 가정폭력에 대해 얼마나 책임의식이 없는지를보여주는 사례다. 박 교사는 “폭력 피해 학생을 발견하면 교사에게 신고 의무가 있다는 법적 사실을 아는 교사도 드물다”고 말했다.
지역 상담소를 찾은 뒤에야 도움 받아
법이 통과된 뒤에도 학교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서울여성의전화는 법 시행 두어 달 전인 지난해 8~9월, 서울 동작구 20여 개 초·중학교에 가정폭력 예방교육을 제안하는 공문을 보냈다. 긍정적 반응을 보인 학교는 1곳밖에 없었다. 정춘숙 서울여성의전화 회장은 “직접 방문한 몇 개 학교에서 ‘우리 학교에는 그런 일(가정폭력)이 없다’ ‘학교에서는 학교폭력만 다루면 된다’ ‘자꾸 그런 걸 알려주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된다’ 등 폐쇄적인 반응을 보여 답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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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무관심 속에 가정폭력 피해 학생의 삶은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지난해 한경은(가명·20)씨는 인천의 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한씨는 7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맞았다. 배를 밟히거나 머리를 심하게 구타당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구타를 견디다 못해 가출한 상태였다. 견디다 못한 한씨는 고3이 돼서야 겨우 지역 상담소를 찾았고, 이들의 도움으로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수소문해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갔다. 한씨는 올 2월 졸업과 동시에 4년제 대학에 합격했지만 대학 대신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버지가 학교를 알고 찾아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사례를 상담했던 정애란 안양여성의전화 소장은 “10여 년을 집에서 맞으면서 컸는데도 학교에서는 끝까지 전혀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가정폭력은 제2, 제3의 폭력을 부르기 때문에 가정 못지않게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학교에서 이를 ‘남의 가정사’ 취급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지적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김아무개씨는 아이 반 친구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 아이가 교실 뒷벽으로 친구들을 불러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 “대갈통을 가만두지 않겠다” 등의 무서운 말을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내뱉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아이는 아버지와 삼촌하고만 살고 있었고, 늘상 그런 폭언을 듣고 자랐다. 이규미 아주대 교수(상담심리학)는 “폭력행동은 학습되고 집에서 당한 피해 학생들이 다시 학교에서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학교가 이를 예방하는 교육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말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가정폭력 피해 학생을 세심히 살피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필요성은 잘 알고 있다. 2005년 서울여성의전화가 서울 지역 16개 중·고등학교 교사 3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교사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75%가 “가정폭력 예방교육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가정폭력 예방교육이 어려운 이유로 △교육자료가 없기 때문(50.5%) △시간이 마련돼 있지 않음(37.4%) △학교 당국의 인식 부족(7.5%) 등을 꼽았다. 실제 교사들이 가정폭력 예방교육을 할 수 있는 지침서는 2005년 서울여성의전화가 개발한 ‘폭력쫑! 대화짱!’ 프로그램이 최초이고 마지막이다.
정부도 적극적이지 않다. 교육인적자원부에 학교폭력대책팀이 있지만 학교폭력, 성폭력과 달리 가정폭력에 관해서는 전담자가 없다. 가정폭력 예방교육을 각급 학교에서 제대로 실시하고 있는지 점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교육부 학교폭력대책팀 관계자는 “매뉴얼이나 지도지침서는 여성가족부가 만들어줘야 한다”며 “법이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담자를 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교육인적자원부에 가정폭력 전담자 없어
가정폭력 예방교육이 적극적으로 실시되려면 교육을 위한 지도 매뉴얼, 충분한 수업시간, 외부강사 초청을 위한 예산 등 시급히 필요한 게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집에서 벌어진 일은 학교가 책임질 필요 없다’라는 인식이 빨리 바뀌어야 한다. 박신연숙 서울여성의전화 지역조직국장은 “법이 시행됐지만 학교에서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피부로 느껴지는 차이가 별로 없다”며 학교 차원의 인식 개선을 강조했다. 학교나 정부가 외면하는 사이, 집에서 맞는 아이들의 멍은 더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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