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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다이아몬드, 진실이 우는 땅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금수조처 해제되고 인증제 도입해도 ‘다이아몬드 비극’ 계속되는 아프리카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내전과 소년병, 난민과 용병, 그리고 무기 밀매와 다이아몬드까지.’ 최근 국내에서 개봉돼 화제를 뿌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영화 는 아프리카 내전의 모든 ‘극적’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희귀한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으려는 노회한 용병과 소년병으로 끌려간 아들을 탈출시키려는 안타까운 부정이 어우러진 이 영화의 무대는 1999년 당시 내전이 불을 뿜던 시에라리온이다. 시에라리온 내전을 주도한 세력의 돈줄은 제목이 암시하듯 ‘핏빛 다이아몬드’였다. 앙골라·코트디부아르·라이베리아·콩고민주공화국 등지에서도 사정은 엇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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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 금수령은 풀려

지난 4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오랜 논의 끝에 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 금수조처를 해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결의안(1753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서부 아프리카 일대 무장갈등의 자금원이 돼온 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는 대표적인 ‘블러드 다이아몬드’로 꼽힌다. 앞서 유엔 안보리는 지난 2003년 결의안 제1521호를 통해 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 금수령을 내린 바 있다.

지난 2005년 11월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집권한 엘렌 존슨 서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은 빈곤에 허덕이는 라이베리아 경제 재건을 위해 다이아몬드 수출 금지령 해제가 긴요하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설득해왔다. 여기에 국제 시장에 출시되는 다이아몬드의 원산지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킴벌리 프로세스 인증제도’를 라이베리아가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준 것이 안보리가 제재를 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구촌이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주목한 것은 1990년대 말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시작돼 2002년까지 지속된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반군조직인 ‘혁명연합전선’은 조직적으로 반대 진영 주민들의 손목과 발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러 세계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혁명연합전선은 내전 기간 동안 한 해 평균 약 1억2500만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해냈고, 이를 돈줄 삼아 지속적으로 갈등을 증폭시켜나갔다.

2003년까지 내전으로 사망만 20만 명

하지만 유엔 차원의 첫 제재 대상이 된 것은 시에라리온이 아니라 앙골라였다. 1961년 시작된 앙골라 내전은 2002년 막을 내릴 때까지 5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유니타 반군 진영은 앙골라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60~70%를 장악했고, 이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이에 따라 유엔은 1998년 앙골라산 다이아몬드에 대한 금수조처를 내렸다. 유엔의 자료를 보면, 1990년대 전세계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15%가량이 무장갈등의 뒷돈으로 사용됐다.

금수조처가 풀리게 된 라이베리아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989년 시작된 라이베리아 내전 사태가 2003년 막을 내릴 때까지 적어도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 와중이던 1997년 대통령에 오른 군벌 출신 찰스 테일러는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통해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국 내는 물론 시에라리온 반군 진영에까지 무기와 군사훈련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엔 안보리는 결국 지난 2001년 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에 대한 전면 금수조처를 내렸고, 테일러는 2003년 8월 권좌에서 축출돼 나이지리아로 망명했다. 그는 2006년 3월 카메룬 국경지대에서 체포돼 현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전범재판을 받고 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폐해는 무장갈등의 종자돈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채굴을 위한 강제노역과 어린이 노동을 포함한 각종 인권유린, 무분별한 광산 개발에 따른 환경파괴 등 숱한 문제가 탐욕의 결과로 불거졌다. 이에 따라 2000년 12월1일 열린 유엔총회는 분쟁을 유발하는 다이아몬드의 폐해를 지적하고, 무장 갈등과 다이아몬드 원석 불법 유통의 연계고리를 끊는 것이 무력분쟁 예방을 위해 중요하다고 지적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당시 결의안에서 유엔은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합법적이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정부에 대항한 무장세력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유엔 안보리의 결정이나 합법 정부에 맞서기 위한 무장활동의 자금원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국제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 무력분쟁의 자금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채굴하는 다이아몬드나, 각 지역·종족별 군벌이 장악한 광산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 기타 각종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광산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도 ‘핏빛’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다국적 다이아몬드 업계를 중심으로 핏빛 다이아몬드의 생산과 유통을 차단하기 위한 ‘자정 노력’도 시작됐다. 2000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 킴벌리에서 열린 회의의 이름을 딴 ‘킴벌리 프로세스 인증 제도’(이하 킴벌리 프로세스)가 그것이다. 2003년 1월 공식 발효된 킴벌리 프로세스는 분쟁 지역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가 국제시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다이아몬드 원산지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뼈대다. 현재 킴벌리 프로세스의 공식 참여국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모두 44개국에 이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이아몬드가 전세계 각지의 다이아몬드 생산국 국민에게 얼마나 실질적 혜택을 가져다주는지를 알지 못한다. 특히 아프리카의 사례가 이를 가장 극명히 보여준다. 아프리카에선 과거 다이아몬드가 무력분쟁의 자금줄 노릇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각국 정부와 비정부기구, 세계 다이아몬드 업계가 하나가 돼 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리고 2002년 유엔의 지원 아래 킴벌리 프로세스 인증제도를 만들어냄으로써 핏빛 다이아몬드가 거래되는 것을 사실상 근절했다. 이제 전세계에서 거래되는 다이아몬드의 99% 이상은 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인증 제도 홍보만 하는 다국적 기업

다이아몬드 업계의 연합체인 세계다이아몬드협회(WDC)가 홈페이지(diamondfacts.org)를 통해 밝힌 내용 가운데 일부다. 이 단체는 “다이아몬드는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단체가 내놓은 자료를 좀더 들여다보자.

협회는 우선 “다이아몬드 판매를 통해 거둬들인 수입으로 전세계에서 약 500만 인구가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이아몬드 수출국인 보츠와나에선 이를 통한 수입으로 13살 이하 어린이에게 무상 교육을 실시하고 있단다. 다이아몬드 업계의 직·간접 혜택을 입는 이들이 전세계적으로 1천만 명에 이르며, 인도에서만 약 100만 명이 다이아몬드 업계에 종사하고 있단다. 또 나미비아에선 다이아몬드 채굴 업계가 전체 연간 수출액의 4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 다이아몬드 거래량의 65%를 생산하는 아프리카 각국의 다이아몬드 수출액은 연간 84억달러에 이른다는 게 협회의 주장이다. 이 밖에도 다이아몬드 수출을 통해 얻는 수익금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예방 사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킴벌리 프로세스는 정말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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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벌리 프로세스 비웃는 ‘원산지 세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이아몬드가 전세계 각지의 다이아몬드 생산국 국민에게 얼마나 끔찍한 비극과 절망을 가져다주는지를 알지 못한다. 특히 아프리카의 사례가 이를 가장 극명히 보여준다. 아프리카에선 지금도 다이아몬드가 무력분쟁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 있으며, 극심한 인권유린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2000년 각국 정부와 비정부기구, 세계 다이아몬드 업계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긴 했다. 2002년 이들은 유엔의 지원 아래 킴벌리 프로세스를 만들어, 극히 좁은 의미의 핏빛 다이아몬드가 거래되는 것은 막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킴벌리 프로세스는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인권유린과 어린이 노동, 국가폭력, 환경파괴, 강제노역 등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위트니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국제 인권단체들은 세계다이아몬드협회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들 단체는 협회의 인터넷 사이트를 빗대 만든 ‘미러 홈페이지’(realdiamondfacts.org)를 통해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빈곤과 파괴, 불의를 부추기는 자금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지난해 말 내놓은 ‘다이아몬드의 진실’이란 자료집을 들춰보자.

이들 단체는 자료집에서 우선 지난 15년 동안 앙골라 50만 명, 시에라리온 5만 명, 콩고민주공화국 400만 명 등이 내전으로 사망했으며, 내전의 자금줄은 ‘블러드 다이아몬드’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킴벌리 프로세스 도입 이후에도 ‘블러드 다이아몬드’ 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코트디부아르에선 지금도 반군 진영이 장악한 지역에서 노예노동을 통해 한 해 30만캐럿(1캐럿=200mg) 이상의 다이아몬드가 생산되고 있다”며 “이 다이아몬드들은 가나·말리 등 킴벌리 프로세스에 동참하고 있는 이웃나라로 옮겨져 ‘원산지 세탁’ 과정을 거친 뒤 국제 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대 보석상들은 그나마도 안 지켜

다이아몬드가 가져다준다는 ‘경제적 혜택’도 의문이다. 유엔이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에서 세계 최빈국으로 꼽힌 시에라리온의 대표적 다이아몬드 생산 지역인 카노에선 그간 수십억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해냈지만, 절대빈곤의 그림자가 지구상 어느 곳보다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게다. 해마다 20억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해내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선 6천만 인구의 90%가량이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서부 아프리카 5개 다이아몬드 생산국에선 150만여 명이 다이아몬드 채굴작업에 동원되지만, 이들 절대다수가 하루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절대빈곤 인구란 통계도 있다.

킴벌리 프로세스 자체의 허점도 분명해 보인다. ‘글로벌 위트니스’가 ‘앰네스티’ 미국지부와 공동으로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미국에서 한 해 1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보석상 37곳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조사 대상의 56%가 전미보석상협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가려내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법적인 다이아몬드 생산과 유통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지난 2월4일 미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아프리카산 다이아몬드 1만1천 캐럿을 밀수한 남성 2명이 체포된 것도 우연은 아닌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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