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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플 점수보다 접수가 걱정!

등록 2007-04-25 00:00 수정 2020-05-03 04:24

GRE 오사카 원정과 토플 접수 대란을 겪은 어느 유학 준비생의 체험기

‘토플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가 토플 성적을 입학 전형자료로 요구하는 수요 폭증 상황 속에서, 지난해 9월 토플 시행사인 ETS가 인터넷 기반(IBT)으로 시험 방식을 바꾸면서 응시 기회가 줄어든 탓이다. 게다가 ETS의 오락가락한 시험 일정 변경으로 밤새 컴퓨터 앞에서 시험 접수에 매달리는 ‘토플 폐인’까지 등장했다. 김수현 전 기자가 자신의 토플 접수 분투기를 보내왔다. 편집자

▣ 에임스(미국)=김수현 전 기자 groove5@naver.com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2006년 8월 중순, 곰곰이 생각한 끝에 미 대학 석사 과정에 지원하기로 했다. 영어 실력이 아니 되고, 전공 실력이 아니 되며, 유학 자금이 아니 되어 유학을 갈 수 없다는 나의 ‘3불 정책’이 대학 졸업 뒤 10년 만에 폐기된 순간이었다.

영어 시험을 보려고 항공권을 끊다

그러나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당장 토플(TOEFL)과 GRE의 시험 점수를 얻는 일이 급했다. 토플은 미 대학에 가고자 하는 외국인에게 필수적인 영어 평가시험이며 GRE는 미 대학원 입학용 수학능력시험이다. 혹독한 대입에 단련된 몸이라 두 시험을 쉽게 여겼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한국에서 이 시험들을 준비하는 이라면 누구나 들른다는 한 사이트에 접속해 공부 계획을 세우던 중 두 가지 사실 앞에서 깜짝 놀랐다. 말하기 영역이 추가된 새로운 유형의 인터넷고사(IBT) 방식 토플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 어쩌면 GRE를 보러 일본 오사카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 사실들이 날 당황시켰다.

영어 시험을 보려고 항공권을 끊는다는 건 정상인의 감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주변이 알까 부끄러웠지만 도리가 없다. 매일 전세계에서 컴퓨터 기반으로 시험이 시행되는 게 GRE의 원칙이지만, 한국과 중국, 대만, 홍콩에서만 연간 2회 지필고사로 본다. 매월 판갈이가 되는 문제은행식이라 4월5일에 시험 본 이가 복각한 문제와 답을 다음번 시험 보는 이가 참고 삼는 일이 가능해졌고, 인터넷 덕분에 전국적인 공조 체제가 구성됐으며, 가끔은 인터넷 번역기의 도움으로 한·중 협력도 일어나게 됐다. 결국 시험관리기관 ETS는 지필고사를 도입했다.

일정과 점수에 목 타는 게 죄다. 결국 9월 중순, 신용카드로 11월14일 오사카 나카쓰 센터 시험 등록비 160달러, 11월13일 항공권 35만원, 비즈니스 호텔 숙박비 6만원을 지불했다. 모 연구소 계약직 연구원인 친구는 등록금 대출 갚는 일도 요원하다며 지필고사로 만족한다. 어떤 이는 오사카에 일주일간 머물며 두 번 시험을 보고 귀국하고, 압구정동의 학원 강사가 오사카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도왔다는 미담 아닌 미담도 흘러나온다. 소문으로 떠돌던 GRE의 개편은 2007년 4월 중순 ETS의 공식 발표로 취소됐고, 지금 이 시간에도 ‘오사카 같이 가요’ 게시판에서는 초행길의 두려움을 함께 나눌 ‘지알러’ 친구를 찾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GRE가 오사카 원정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씁쓸한 사약 같은 시험이라면 토플은 10대부터 40대까지 전 연령대가 우왕좌왕하는 아비규환의 장이다. 취업도 행복도 토플 점수 순이 아니지만 여기선 모두 토플 점수에 목을 맨다. 유학 지원 때 일정 점수 이상이 안 되면 원서 접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본 점수 확보가 절실하다. 그러나 2006년 9월, 한국 내 IBT의 시행과 함께 기본 점수 확보는 기본 접수 확보가 전제된 자의 배부른 고통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벽 4시 잠깐 잠든 사이…

토플 접수 대란은 이미 시작됐지만 이 대란의 초기엔 밑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건 토플 접수였던가. GRE 접수 뒤 어떻게 말하기 시험에 대비할까 고민을 거듭하다 9월 중순에 막상 토플 접수를 하려니 12월 말까지 시험 볼 장소가 동이 난 상태였다. 장소가 추가될 것이라는 말은 항상 있지만 몇 명이 언제 어디서 시험을 볼 수 있게 될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다급한 준비’라는 결정적 치부로 인해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래도 시험 장소가 추가되려니 생각하며 조바심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숙명여대 몇 자리가 뜬 걸 발견하고 느리디느린 접수 화면을 뚫고 신용카드 결제창까지 왔는데, 결제에 실패하는 바람에 새벽 4시에 아침을 기약하며 잠들었다. 아침 10시에 보니 한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으면서 나는 이 시험이 접수부터 대란이라는 걸 배울 수 있었다. 토플 점수가 없어서 유학을 못 갔다는 게 말이 되나. 보름 넘게 가슴앓이를 하다가 10월3일에, 서울 지역 수험장을 포기하고 12월15일 오후 6시에 치르는 아산 선문대 자리를 170달러로 잡았다. 배급 줄에서 언제 저 쌀이 떨어질까 떨면서 기다리는 일에 지쳐 있었다. 그냥 공부가 하고 싶었다.

12월15일 아산의 공기는 맑았다. 대기실 밖 복도에서 서성이는 학부모들이 수학능력시험 고사장의 애틋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러고 보니 말하기 영역 기출 문제를 정리해서 올려준 이의 아이디도 ‘외고 준비생’이다. 그는 시험 잘 봤나. 종이 상자로 칸막이를 만든 교실에 앉아 컴퓨터 화면이 읽기 시험에서 듣기 시험으로 넘어가길 기다리다가 앞사람이 떠드는 말하기 시험 답안을 듣고 오늘의 문제 중 하나가 ‘당신네 동네의 편리한 교통기관이 뭐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속버스, 시내버스, 전철, 심야택시를 갈아타는 대장정은 새벽 1시의 귀가로 끝났다.

춘추전국시대의 접수 대란도 대오를 갖추는 모양이다. 요즘은 새벽에 1시간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문자동맹’이 유행이란다. 시험 접수 자리가 뜨는 즉시 망을 보던 이가 동맹 내 동료들에게 알려주는 품앗이다.

이 토플 대란 앞에서 ETS도 망연자실했는지 2007년 6월3일 PBT 토플을 한국에서 특별히 1회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PBT 토플은 지필고사를 의미한다. ETS에서는 컴퓨터 시험 방식과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고 말하지만 미국 대학들이 ‘말하기’가 배제된 종이시험 점수를 얼마나 환영할지는 의문이다. “저 이번에 CBT도 인정해주지 않는 학교 때문에 고생했어요”라는 어느 유학 준비생의 말을 듣자면, 이 PBT는 국내 대학입시용인가?

미국 대통령의 일생을 묻는 시험

접수에서 문제가 많지만, 내신·수능·본고사·텝스·토익 등 온갖 영어 시험을 섭렵한 점수 영어 전문가의 처지에서 볼 때 새로운 유형의 토플 시험은 분명 좋은 시험이다. 기존의 CBT 유형도 문제은행식이라 많은 이들이 기출 문제에 의존했다. 말하기와 통합형 문제의 도입, 노트테이킹(공책 필기)과 패러프레이징(바꾸어 표현하기)의 강조는 내게 필요한 쓴 약이다. 다만 수강 신청하는 법이나 기숙사 소음에 항의하는 법, 혹은 미국 대통령의 일생이나 미국 대공황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 시험이 모든 영어 수요자에게 적당한 내용인지는 의문이다. 주머니를 털어 학원에 가보니 어떤 청년들은 학원 출석이 곧 영어 공부의 전부인 듯 혼동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사교육 영어 시장은 계속 번창할 듯하고, 나는 말하기의 공포를 이리 강조했으니 5년 뒤 영어회화가 유창해지면 회화책 한 권을 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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