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세금으로 ‘유세’하고 있네

등록 2007-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대선 주자한테 줄서기 위해 개최되는 무늬만 ‘정책토론회’… 회당 1천만원 드는 비용 출처는 ‘정책개발비’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대처 리더십을 조명하는 뜻 깊은 자리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대처처럼 옳은 것에 대해 투쟁하고 끝까지 관철시킬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박처리즘’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

“대처 총리가 영국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원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원칙과 리더십을 갖는다면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습니다.”(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와~ 박근혜! 박근혜!”

“박근혜 만세!”가 터져나오는 토론회?

지난 3월12일 국회 도서관 대강당은 ‘박근혜’란 이름으로 가득 찼다. 강재섭 대표와 김형오 원내대표가 연설을 마치고 박근혜 전 대표가 연설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박근혜 만세!”라고 연방 외쳤다.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강당은 400명을 넘는 인파로 북적였고 열기는 뜨거웠다. 대다수 한나라당 의원들이 자리를 잡지 못해 강당 복도에 길게 서서 연설을 들어야 할 정도였다. 분위기만 보면 대선 주자의 유세장 같다. 그런데 유세장이 아니었다. 행사는 ‘친박근혜’ 성향의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이 주최한 ‘위기의 대한민국! 대처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정책토론회였다.

대선이 가까워오면서 무늬만 정책토론회이고 내용은 대선 주자 ‘홍보’인 각종 토론회가 유행처럼 열리고 있다. ‘친이명박’ 계열인 박승환 의원은 3월9일 ‘내륙 물류 경쟁력 향상 방안’이라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도 김형오 원내대표와 이 전 시장 캠프의 참모 격인 박형준 의원이 축사를 맡는 등 다분히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지원하는 토론회가 됐다. 3월5일엔 박근혜 캠프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서병수 의원이 개최한 ‘지방산업단지 회생 프로젝트’ 토론회가 열렸는데 박 전 대표를 비롯해 캠프 소속 의원 20명이 참석했다. 친이명박 성향의 의원들이 많이 포진돼 있는 ‘국가발전연구회’가 주관한 ‘한반도 대운하’ 토론회에는 한나라당 의원의 40%에 해당하는 52명의 의원이 모여들었다.

어쩌다가 의원들의 정책토론회가 예비 대선 주자의 ‘유세장’처럼 돼버린 걸까? 유력 대선 주자들에 줄을 선 의원들의 충성 경쟁과 각 캠프의 전략적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토론회를 개최한 한 의원의 보좌관은 “이번 토론회는 우리가 선수쳐 하겠다고 말해서 토론회를 주최할 수 있었다”며 뿌듯해했다. 반대 캠프의 또 다른 보좌관은 “영감(의원) 입장에서는 토론회를 통해 대선 주자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시그널(신호)을 보내는 것”이라며 토론회 개최 이유를 설명했다. 이 보좌관은 “캠프에서 특히 이렇다 할 역할이 없거나 주목을 받지 못한 의원들이 열성적으로 토론회를 개최하려고 한다”며 “앞으로 비슷한 주제의 토론회가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토론회가 충성심 강한 몇몇 의원들에 의해 막무가내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캠프 입장에서는 토론회를 통해 ‘한반도 대운하’나 ‘열차 페리’ 같은 대선 주자의 공약을 홍보하고, ‘대처 리더십 토론회’처럼 대선 주자의 이미지를 만드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토론회를 활용하려고 한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캠프 관계자는 “캠프에서 회의 때마다 대선 주자를 위한 각종 전략과 스케줄을 짜놓고 역할 분담을 한다”며 “토론회가 끝난 뒤 효과 등 평가를 하고 다음에는 어떤 주제로 (토론회를) 할 것인지 등에 대해 논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4, 5월에는 대선 주자 공약을 주제로 하는 토론회가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원당 기본 2012만원, 총 100억원

토론회는 또 세 과시를 통해 당내 기반을 다지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토론회를 주관하는 의원이 직접 “○○○ 후보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다른 의원이나 당 관계자들에게 전화해 토론회 참석자를 모으는 것은 기본이다. 보좌관 빌리기, 꿔주기 등을 통해 인원을 동원하기도 한다. 토론회를 준비했던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은 “토론회에서 자발적인 참석자는 20명밖에 안 된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일부 정책토론회는 의원들의 대선 주자 ‘공약 홍보 토론회’ 내지는 ‘세 과시’로 변모했다.

토론회를 할 수 있는 정책개발비 재원은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 17대 국회가 들어서면서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입법 지원 및 정책개발비’라는 항목을 국회 예산에 새로 만들었다. 일종의 의정 보조금으로, 2005년부터 지급되기 시작했다. 매년 약 100억원(2005년 94억원, 2006년 96억원)가량의 예산이 의원들의 입법 활동에 도움이 되는 공청회와 세미나 비용을 사후에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지원되고 있다. 의원 1인당 2012만원의 기본 지원비를 받을 수 있고, 670만원씩 두 차례 추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센티브(우수 사례) 경비지원 제도를 통해 600만원씩 더 지원받을 수 있다. 토론회는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비용이 500만~1천만원 정도 든다. 토론회를 개최한 한나라당 의원의 보좌관은 “토론회 비용으로 500만원 좀 넘게 돈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또 다른 한나라당 보좌관은 “약 1천만원 정도 토론회 비용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선이 9개월 남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수억, 혹은 수십억원의 재원이 대선 주자 홍보토론회용으로 지출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예산 낭비 문제뿐만 아니라 구태 정치의 전형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지도지사의 이수원 공보특보는 “정책토론회가 아니라 공천을 무기로 해서 국회의원을 하나라도 자기 편으로 두려는 낡은 정치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토론회를 통한 세 과시는 공정한 선거가 치러지는 것을 막는 등 형평성을 저해한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사조직화된 분위기에서 특정 후보를 초청해 후보의 이미지를 홍보하는데 이는 공평하지 못한 것”이라며 “줄세우기를 강행하며 세 과시를 하려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누구를 위한 정책토론회인가

그러나 이런 토론회가 긍정적인 측면도 갖는다는 반론도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페리 운하’로 정책토론회를 한 서상기 의원은 “각종 정책 토론회가 후보들의 정책과 철학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때문에 정책 중심의 선거를 치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일하는 국회를 만들겠다며 정책개발비 100억원의 예산 책정을 추진한 김원기 전 의장의 뜻도 이런 것이었을까? 정책개발비 예산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누구를 위한 정책토론회인지 헷갈린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