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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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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희의 또다른 법정투쟁?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북촌 게스트하우스 운영으로 생계 꾸리며 10년 만에 무죄 판결 얻어내…옆집 위탁운영 계약 맺은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입장 바꾸자 다시 투쟁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질풍 같았던 1990년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현준희’라는 이름은 반드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는 1996년 4월8일 효산개발이 권력 실세들과 손잡고 콘도를 짓기 위해 불법으로 건축허가를 따냈고, 그에 대한 감사가 감사원 상부 지시에 의해 중단됐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그의 양심선언과 이후 드러난 추악한 정권 실세들의 뒷거래로 인해 ‘YS 정권’의 도덕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감사원은 평범한 가장이던 6급 공무원을 파면했고, 검찰과 법원은 그를 기소하고 구속했으며, 그가 이름을 거명한 감사원 간부는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1·2심 무죄, 대법원 유죄 취지 파기환송으로 이어지는 10년간의 법정투쟁이 이어졌다. 그가 최종 무죄 판결을 얻어낸 것은 불과 넉 달 전인 지난해 10월18일이다. 현씨의 ‘10년 투쟁’은 국가 기관이 내부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용기를 낸 개인에게 얼마나 무참한 보복을 가할 수 있는지 보여준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10년 전 ‘그 사건’ 이후 현씨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직업을 잃었고, 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또 건강식품, 학습지 방문 판매, 휴대전화 영업사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99년에는 모친이 사망했다.

남는 방 두개로 시작한 게스트하우스

평생 ‘가정주부’로 살아왔던 그의 부인 이미자(59)씨가 외국인들을 상대로 전통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부부의 형편이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된 2000년 4월께였다. 그 무렵 그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낀 조선 전통 사대부들의 집단 주거지 북촌 가회동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두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 방 두 개가 비었거든요.” 그렇게 처음 문을 연 ‘서울 게스트하우스’(www.seoul110.com)의 총 객실은 부부가 생활하는 안방을 뺀 두 개. 우리나라에서 처음 문을 연, 외국인을 상대로 한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인터넷 등을 통해 홍보를 시작했지만, 북촌 한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알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 달 만에 겨우 첫 손님을 받게 됐다. 네덜란드 부부였다. “당신 영어도 못하니까 거치적거리지 말고, 오늘은 찜질방에서 자고 와.” 이씨가 남편 현씨에게 말했다. 이후 현씨 부부의 게스트하우스는 외국인 여행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퍼졌고, 때마침 불어친 한류 열풍을 타고 일본 잡지사의 취재가 이어졌다. 부부의 게스트하우스는 세계 배낭여행족들의 교과서 에까지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얻는다. 그 덕에 부부는 때때로 손님들에게 안방까지 내주고 창고에서 밤을 나는 고단함을 견뎌야 했다.

첫 위기가 닥친 것은 2002년이었다. 집주인이 “방을 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현씨의 안타까운 소식이 언론을 타고 보도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북촌 가꾸기 사업을 벌이던 서울시 SH공사 쪽에서 “(공사 소유의) 종로구 계동 135-1번지 한옥집을 게스트하우스로 꾸며 운영해주면 고맙겠다”고 제의해왔다. 그해 4월 현씨는 계동으로 이사했고, 서울 게스트하우스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새는 원화 강세 때문에 손님이 뜸한 편이지만, 외국인들의 호응이 정말 좋습니다.” 서울 게스트하우스는 작은방 하나에 3만5천원, 큰방은 5만원을 받는다.

옆집과 합쳐 복원할 기회가 오다

2004년 다시 변화가 닥친다. 마침 현씨 부부의 게스트하우스와 담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 살던 노인이 해외로 이사를 하게 됐다. 서울시는 그 집을 5억원에 사들여 깨끗하게 리모델링했다. 현씨 부부는 서울시 공모에 참여해 그 집의 위탁 운영권을 따게 된다. 애초 그 집은 현씨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던 135-1과 한집이었다. 주인은 구한말 우리나라를 주름잡던 민씨 척족 가운데 한 명이었고, 135-1은 안채, 135-2는 별채, 135-3은 마당이었다고 한다. 서울시와 현씨 부부는 2004년 7월6일 노인의 집터인 계동 135-2와 그 앞의 통로 135-3을 빌려 게스트하우스로 이용하기로 협약을 맺는다. “그 집을 임차하면 현대 사회를 거치면서 조각조각 갈라졌던 한옥을 하나로 복원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집을 위탁 운영하려던 목적도 거기 있었거든요.”

하지만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2005년 6월께 현씨의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에 사는 주민이 “게스트하우스 때문에 시끄러워 살 수 없다”는 취지의 민원을 낸 것이다. 주민 민원과 언론 보도가 서울시 귀에 흘러들면서 95% 완성 단계에 다다랐던 한옥 복원 사업이 중단됐다. 그리고 대문의 위치가 변경되고 만다. 애초 대문은 안채와 별채를 하나로 이을 수 있게 골목 입구에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대문 위치가 마당 뒤편으로 크게 후퇴했다. 그리고 공문이 날아왔다. 서울시는 2005년 12월23일 현씨 부부에게 보낸 공문 ‘계동 135-2 한옥체험관 위수탁협약서 내용조정 통보 및 입주일 통보’에서 “애초 위탁하기로 한 터에서 135-3을 빼겠다”고 일방 통보한 것이다. 그리고 마당인 135-3을 “주민들과 공동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되면 집은 다시 안채와 별채로 분리되고 만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는 주민 민원을 청취한 뒤 한옥자문위원회 쪽의 자문을 받아 결정한 것”이라며 “결정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미 법적으로 체결된 계약 내용을 “바꾸겠다”고 일방 통보하는 것은 관의 지나친 횡포가 아닌가 싶다.

CCTV·펜스 철거 안하면 계약 해지?

현씨는 “그렇게 되면 손님들을 잘 돌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마당이 있으면 안채와 별채를 한집같이 드나들며 관리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집이 두 개로 분리되면 일손이 두 배가 든다는 것이다. 현씨는 결국 2006년 11월 애초 대문이 들어서기로 예정된 곳에 철망으로 임시 출입문과 모조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을 설치해놓았다. 서울시는 “CCTV와 펜스를 철거하지 않으면 위탁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공문을 내려보낸 상태다. 서울시 공무원들과 현씨 사이에는 다소간의 물리적인 충돌도 있었던 듯 양쪽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좋지 못했다. 둘의 의견은 팽팽하게 맞서 있는데, 10년 동안의 법정 싸움을 끝낸 현씨는 아무래도 또 하나의 작은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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