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서 길 가던 60대 여성 때린 뒤 끌고다니며 성폭행한 미군 이병…현행범으로 잡히고도 술 탓… 미군에 넘기지 않고 재판한 첫 사례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서울경찰청 3기동대 30중대 박성배(21) 이경은 “느닷없이 여성의 외마디 비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2007년 1월14일 새벽 6시께였다. 그때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울 마포구 동교동 사저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중이었다. 그날 아침 근무 시간은 새벽 4시30분부터 6시30분까지 2시간이었고, 근무 초소는 대통령 사저 맞은편인 학습교재 전문 출판사 지학사의 건물 뒤쪽에 설치된 5초소였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고 말했다.
소리내면 때려 눈짓으로 “살려달라”

현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박 이경은 초소 앞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이상했다. 다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동교동 183-5번지 세교빌딩과 182-1번지 ㄷ사 사이 골목 아스팔트 바닥에 여성의 위·아래 옷가지와 신발이 떨어져 있었다. 박 이경은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박 이경은 초소로 돌아왔다가, 숨죽여 다시 현장으로 접근했다. ㄷ 건물 옆 주차장에 세워진 흰색 차량 옆에서 믿기 힘든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운전석 쪽 보닛에 얼굴이 처박힌 한국 노인(67)을 갈색 피부의 미군이 뒤에서 성폭행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구타를 당한 듯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노인과 박 이경의 눈이 마주쳤다. 노인은 손짓에 작은 목소리를 섞어 “살려달라”고 말했다. 노인은 소리를 지르지 못했는데, 소리를 지를 때마다 심한 폭행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미군은 ㄷ 건물 안과 주차장 등으로 노인을 끌고 다니며 세 차례나 노인을 성폭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군은 박 이경의 모습이 보이면 ㄷ 건물 안으로 숨었다가, 그가 사라지면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 성폭행을 계속했다. 박 이경을 눈치챈 미군은 노인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미 8군 2사단 소속 제로니모 라미레스(23) 이병이 서울로 외출을 나온 것은 지난 1월13일이다. 친구 마이클 포터와 놀기 위해서였다. 밤이 늦어지자 둘은 용산 미군부대 영내에 있는 드래곤힐호텔로 갔다. 호텔 쪽에서는 “빈 방이 없다”고 했다. 둘은 부대 밖으로 빠져나가 서울 시내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홍익대 앞으로 간 둘은 근처 모텔에 방을 잡았다가 밤 10시께 밖으로 나왔다. 라미레스의 수중에는 12만원이 있었다. 그는 1월16일 오후 3시 서울서부지법 303호 법정에서 송경근 판사의 심리로 치러진 영장실질심사에서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술 냄새 났지만 의식 없진 않았다”
라미레스는 말 그대로 홍대 클럽들을 배회했다. 첫 번째 클럽에서는 럼주·레몬주스·우유·칵테일을 마셨고, 두 번째 클럽에서는 맥주 1병을 마셨다. 세 번째 클럽에서는 테킬라·칵테일·아이스티를 마셨다. 3차가 끝난 뒤 친구 포터는 “피곤하다”며 모텔방으로 돌아갔다. 라미레스는 혼자가 됐다. 네 번째 클럽에서는 칵테일과 맥주, 다섯 번째 클럽에서는 맥주를 마셨다. 그가 홍대 앞 클럽들을 방황하며 돌아다닌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는 범행 사실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네거티브(Negative)”(군대에서는 ‘no’ 대신 ‘negative’라고 말한다)라고 답했다. “60대 정도의 한국 여성을 만나 성폭행했는가?” “Negative.” “희미하게라도 기억나는 게 있는가?” “Negative.” “때린 기억도 없는가?” “Negative.” 그는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피해자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모든 피해보상을 하겠다”고 말했다. 일을 당한 노인은 경찰에서 “거리를 지나는데 갑자기 때리면서 옷을 벗겼다”고 말했다. 노인은 건물 청소를 위해 출근하던 중이었다.

박 이경을 발견한 라미레스는 노인을 버려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대장님, 강간범!” 박 이경은 순찰본부(CP)에 있던 박관호 경위에게 무선으로 상황을 전했다. 박 경위는 비상대기조와 함께 현장으로 뛰어갔다. 라미레스는 박 이경이 근무하던 5초소 앞에서 ‘감악산 산신장군’ 점집이란 간판이 달린 골목으로 우회전해 신촌로터리와 동교삼거리를 잇는 큰길로 들어섰다. 큰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든 라미레스는 악기점 신촌 야마하 앞에서 박 경위 등 경찰 4명과의 몸싸움 끝에 검거됐다. 사건 현장에서 200m쯤 되는 거리다. 박 경위는 “몸에서 술 냄새는 좀 났지만, 의식이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서교지구대의 순찰차에 인계될 때까지 라미레스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영장실질심사에서 “경찰들이 둘러싸고 수갑을 채워 무서웠다”고 말했다.
사건이 불거지자 주한미군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상황 대처에 나섰다. 미 8군 사령관 존 모건 소장은 1월14일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인에게 큰 상처를 입힌 끔찍한 사고에 대해 사과드리고 개인적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의 성명은 ‘60대 여성에 대한 강간(rape)’을 ‘폭행’(assault)으로 표현하면서 교묘히 문제의 핵심에서 비껴나면서도, “이 끔찍한 사건은 모든 군인들의 명성에 먹칠을 했고, 한국에서 살고 일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명성과 희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우려를 잊지 않았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었을 뿐?
서울 서부지법은 라미레스 이병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발부 이유는 “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죄질이 극히 불량해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근무 기간이 끝나 2007년 2월1일 출국할 예정인데, 오산 공군비행장에서 미 군용기를 타고 ‘도망’치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라미레스는 1월15일 서울 마포경찰서 유치장에서 용서를 구하는 내용의 A4 용지 1장짜리 편지를 써 변호인을 통해 피해자에게 전달했다. 그는 편지에서 “나는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난폭한 사람이 아닌데 술에 취해 이성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1월 말 미국으로 돌아가 결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영장 발부와 함께 라미레스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미군을 미군 쪽에 인도하지 않고 재판을 받게 한 것은 2001년 개정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의의사록 22조 5항을 적용한 첫 사례다.
| ||||
1월14일 새벽에 있었던 미군의 60대 한국 여성 성폭행 사건의 사후 처리는 대체로 납득한 만한 수준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사건 직후 미 8군 사령관의 사과 성명이 있었고, 우리 법원은 일을 저지른 미군이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미군 제로니모 라미레즈(23)는 앞으로 우리나라 법 절차에 따라 처벌받고 우리 교도소에서 죗값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미군 범죄가 한국 법 절차에 따라 지극히 상식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2001년 1월18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범죄 미군의 형이 확정된 뒤에야 신병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1996년 검찰이 동두천 접대부 이기순(44)씨를 죽인 미군 무니치 에릭 스티븐 이병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지만, 미군은 이를 거부했다. 1992년 10월28일 윤금이씨를 죽인 미군 케네스 마클 이병의 경우, 천안교도소에 수감된 것은 사건이 터진 지 2년이 지난 1994년 5월17일이었다.
고유경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여전히 한-미 SOFA는 개정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 사법당국이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미군 쪽에 넘겨주지 않고 처벌할 수 있는 경우는 “살인과 같은 흉악 범죄나 죄질이 나쁜 강간 범죄를 범행 현장에서 잡은 때”(한-미 SOFA 합의의사록 22조 5항)밖에 없다. ‘살인’(또는 성폭행)과 ‘현행범’의 교집합을 찾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라미레즈는 ‘성폭행’과 ‘현행범’의 교집합에 일치해 미군 쪽에 신병이 넘어가지 않은 첫 사례로 기록됐다. 이번 사건도 경찰의 24시간 순찰이 이뤄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 주변이 아니었다면 현장에서 피의자를 체포하기는커녕, 미제 사건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사법 당국의 미온적인 태도도 문제다. 우리 정부가 1차 재판 관할권을 가진 미군의 비공무 범죄에 대해 실제 재판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전체 사건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고유경 국장은 “적극적인 재판 관할과 강한 처벌을 통해 미군 범죄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 ||||
미제로 남은 ‘그 때 그 미군’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미군 제로니모 라미레즈가 저지른 강간 사건을 전해듣고 떠오른 것은 이제는 완전히 잊혀진 줄 알았던 2000년의 ‘그 사건’이었다. 그때 기자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캠프 스탠리’에 근무하던 헌병이었다. 투박하고 거칠기로 소문난 미 2사단 장병들의 범죄를 다루는 헌병 부대는 2사단 사령관 직속의 헌병 2중대였다. 헌병 2중대는 현장 업무를 담당하는 6개 소대와 본부소대, 지원소대 등 8개 소대로 이뤄져 있었다. 그중에 3소대는 이제는 폐쇄된 경기도 파주시의 ‘캠프 하우즈’, 4소대는 ‘캠프 스탠리’의 치안을 맡고 있었다. 캠프 스탠리 앞에는 미군들이 출입하는 클럽 10여 곳이 성업하고 있었고, 우리는 주말마다 클럽들을 돌아다니며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미군 범죄를 단속해야 했다.
부대 앞 클럽에는 흑인들이 자주 출입하는 ‘Roxy’란 클럽이 있었다. 흑인 클럽에는 시끄러운 랩 음악이, 백인 클럽에는 유치한 컨트리송이 흘러나오는데, 신기하게도 둘은 절대 섞이는 법이 없었다. 그곳에서 화장을 짙게 한 40대쯤으로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줌마를 자주 목격했는데, “저 나이에 여기서 뭐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경멸 어린 눈초리를 여러 차례 건넸던 것 같다.
그 ‘아줌마’는 그해 3월11일 부대 앞 허름한 옥탑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름은 서정만이라고 했고, 숨질 때 나이는 68살이었다(사실 아줌마가 아니라 노인이었다). 말을 여러 번 걸었는데도 대꾸가 없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청각장애인이었다고 했다. 팬티 바람으로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발견된 서씨의 주검을 바라보는 일은 난감했다. 양눈과 입가가 심하게 멍들어 있었고, 치아 두 개가 부러져 있었다. 침대 밑으로는 피가 흥건했다. 주민들은 “전날 밤 11시50분께 서씨가 키 180cm에 보통 체격인 한 흑인과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그 사건은 301호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그때 스탠리에는 ‘키 180cm에 보통 체격인 한 흑인’이 몇이나 살고 있었을까. 미군들은 범인 찾기에 별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대 미군들과 부대 인근의 쓰레기통을 몇개 뒤졌고, 부대 출입문마다 용의 선상에 오른 미군의 몽타주를 그려 붙였다. 몇 주 지나 그 사건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답답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 난 미군부대에서 눈치 보며 밥 얻어먹던 카투사였다.
제대한 뒤 한국 경찰이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한 번도 직접 심문하지 못했고, 미군범죄정보수사대(CID)가 그를 본국으로 빼돌렸다는 의혹이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2002년 11월15일 미2사단 범죄정보수사대는 “도피 의혹이 제기된 미군 용의자가 혐의점이 없다”는 입장을 한국 경찰에 공식 전달했다.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트럼프가 이겼다…대미 3500억불 투자 손해, 자동차관세 절감 효과 2배

‘소년범 의혹’ 조진웅, 배우 은퇴 선언…“질책 겸허히 수용”

박나래, 상해 등 혐의로 입건돼…매니저에 갑질 의혹

법원장들 ‘내란재판부 위헌’ 우려에 민주 “국민 겁박” 국힘 “귀기울여야”

유시민 “통화·메시지 도청된다, 조선일보에 다 들어간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바다를 달리다 보면…어느새 숲이 되는 길

서울고검, ‘쌍방울 대북송금’ 증인 안부수 구속영장 청구

‘갑질 의혹’ 박나래, 전 매니저들 공갈 혐의로 맞고소

‘쿠팡 외압 의혹’ 당사자, 상설특검 문 연 날 “폭로한 문지석 검사 처벌해달라”
![[단독] 통일교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자금 수천만원 전달” [단독] 통일교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자금 수천만원 전달”](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5/53_17649329847862_20251205502464.jpg)
[단독] 통일교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자금 수천만원 전달”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resize/test/child/2025/1205/53_17648924633017_17648924515568_2025120450403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