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치사사건 이후 아들의 죽음 20주기까지 운동가로 살아온 아버지…“사건 현장 견학으로 인권 가르치고 고문 은폐의 진상도 완전히 밝혀야”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 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 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오.”
선동적인 연설문처럼 읽히는 이 글은 사실 편지의 일부다. 그것도 가족들에게 보내는. 1980년대를 살아내던 한 젊은이는 ‘시국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뒤 누나와 부모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편지 안에는 “허구한 날 (면회)와서는 ‘판사님 앞에서 고개 숙여라’는 말을 하는 것은 갇혀 있는 저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간곡한 부탁도 들어 있다. “엄마, 아버지의 막내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편지글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고 박종철(사망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2학년으로 23살)씨다.
벌써 20년… “감감합니다”
1987년 1월14일 서울 용산구 갈월동 80번지에 위치한 이른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에게 물고문을 당하다 숨졌다는 사실 때문에 이름 뒤에 ‘열사’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이미 역사적 인물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여태껏 그는 ‘역사에 우연히 말려든 평범한 대학생’으로 기억돼왔다. ‘착하디착한 대학생이 부당한 권력의 손에 무참히 희생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방식은 당시 독재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대중적 호소력으로 작용했지만, 자연인 박종철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박종철출판사가 펴낸 과 이를 토대로 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다시 펴낸 (‘시대의 불꽃’ 시리즈)을 보면 그가 당시 ‘운동권 학생’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을 끔찍이 챙기면서도 작은 일에조차 원칙을 중시하는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다는 점도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다. 그는 재수를 거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1학년 때 이미 ‘이념서클’(‘팀’ 또는 ‘패밀리’라는 은어로 불렸음)에 가입해 본격적인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운동에 헌신하려는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거쳤던 세미나, MT, 합숙, 산행훈련, 농촌활동, 공장활동 등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거리시위를 하다가 붙잡혀 2번 구류를 산 데 이어 86년 4월에는 노학연대투쟁 시위로 구속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그의 면모는 그가 시대의 급류에 휩쓸려간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싸움을 앞장서 벌인 인물임을 보여준다.
오는 1월14일은 그가 떠난 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올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올해가 87년 6월항쟁 20주년이라는 점에 더해 그의 죽음이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는 의미도 다시 부각되는 까닭이다. 1월4일 오후 고인의 아버지인 박정기(78)씨를 서울 마포구의 박씨 아파트에서 만났다. 사건 당시 “철아,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말한 것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던 그는 아들의 사진을 부부 침실에 걸어놓고 있었다. 심정을 묻는 질문에 그는 “감감하다”는 형용사를 여러 번 썼다. “그는 가고 없는데 세월은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과연 그가 뭘 하다가 갔는지 손에 잡히지 않네요. 무엇을, 어떻게 기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민주화운동’이라는 고귀한 단어와 함께 (아들의 이름이) 떠올려지니…. 누가 뭐라고 해도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사라지지 않겠죠. 정말 참 담담하네요.”
“남영동 대공분실 보존 움직임 다행”
87년 당시 부산시 수도국 관리실 하위직 공무원이었던 박씨는 사건 직후 아들 죽음의 진실을 확인한 뒤부터 아들의 뜻을 대신해서 살아왔다.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 경험은 그를 사회운동가로 만들었다. 그에게 ‘인권’은 대화 도중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낱말이었다.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인권의 최후 보루 아니겠습니까. KTX 여승무원들이 아직도 그렇게 투쟁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철도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도외시할 수 있습니까. 찬찬히 살피면 다 방안이 있을 텐데….”
그는 최근 아들의 옷 몇 벌을 근처 세탁소에 맡겼다고 한다. “혹시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봐요. 20주기라고 하니까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옵니다. 생전에 쓴 편지들은 며칠 전 한 방송사에서 특집 프로그램을 만든다면서 다 가져갔습니다. 생전에 아들과 친했던 선후배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오면 참 좋으면서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한편으로 감감해집니다.”
박씨는 “그나마 경찰 쪽에서 사건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그때 그대로 보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 다행스럽다”고 했다. 경찰은 지난 2005년 7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꾼 바 있다. 박종철씨가 숨진 509호 조사실에는 지금도 4평 규모의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와 고문에 사용된 욕조와 샤워기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의 김학규 사무국장은 “509호실은 원형 보존하고, 509호실 이외의 일부 공간을 위탁받아 박종철인권기념관 또는 박종철인권센터를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경찰 쪽에 전달했다”며 “이렇게 운영된다면 자료 전시와 견학 등을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학습하는 장소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20주기 기념사업으로 의 한글판을 개정하는 한편, 영어 번역판을 만드는 작업도 벌이고 있다. 또 당시 고문 은폐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만큼 이에 대한 조사도 다시 벌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87년 당시에는 고문 은폐 기도가 경찰 차원에서 제한된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당시 안기부·검찰·청와대 등 권력기관이 참석한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 수준의 고문 은폐 기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사업회는 이를 위해 지난해 11월 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냈다.
2007년, 눈 가리고 고문실로…
오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리는 박종철 20주기 추모행사에서는 6월항쟁 기념사업의 선포식도 함께 열린다. 6월항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의 죽음의 성격을 좀더 또렷이 하려는 행사 주최 쪽의 의도가 담겨 있다. 주최 쪽은 행사 참가자들에게 특별한 체험도 하게 할 예정이다. 80년대 이곳에 끌려왔던 이들이 당했던 것처럼 1층에서 눈가리개를 한 뒤 나선형 계단을 통해 5층 고문실까지 걸어 올라가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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