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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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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이 북한 하층민에 치명적”

등록 2006-12-22 00:00 수정 2020-05-03 04:24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 1세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이용선 사무총장…“DJ도 결국 인도주의의 수혜자… 최악의 상황 맞은 북한 지원 다급해”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많은 이름이 더 큰 이름에 가린다. 이용선이란 이름도 그렇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이용선(50) 사무총장은 같은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은 서경석 목사나 좋은벗들의 법륜 스님, 유진벨 재단의 스티븐 린튼 같은 큰 이름에 언제나 가려 있다.

“난 ‘바닥 운동’ 체질이다. 얼굴도 능력도 안 된다. 한평생 바닥에서나 운동해야지.” 그의 과거뿐 아니라 각오도 그렇다. 그를 만난 지난 12월12일은 좋은벗들의 10주년 기념 감사와 후원의 밤이었다. 감사 인사를 하러 단상에 오른 법륜 스님은 경을 외우듯 중요한 참석자 이름을 하나하나 읊더니 그의 이름을 맨 마지막에 불렀다. 빼놓진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크지 않다.

하지만 그를 좀 아는 이들은 그가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의 산 역사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닳고 닳은 중국 비자엔 150번이 넘는 중국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도장이 찍혀 있다. 몇 년 전 기사를 뒤적거리다 보면 어렵지 않게 한 신문이 ‘명망가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평화적 삶의 길을 걸어온 사람’을 기준 삼아 선정했다는 ‘평화 인물 100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뽑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작은 상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의 현장에 있었다.

민족 화해? 뭘로 하지?

이용선 사무총장은 1995년부터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분야의 1세대다. 두 가지 인연이 그를 붙들었다.

94년은 남북한 대부분의 민초들이 지각할 수 없었지만 한반도에 핵 위기가 닥쳤던 때다. 그는 경실련의 통일협회 사무국장을 지내면서 그해 여름 내내 핵 문제와 관련된 토론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무력감을 느꼈다. (미국이) 이북을 폭격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한반도에서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도 도대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북 교류도 없었으니 더더욱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즈음 경실련에서 민족화해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민족 화해란 화두를 이게 된다. “민족 화해? 좋아, 그런데 뭘로 하지?” 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나눔 운동을 답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부정적이었다. “아니 얼마나 모을 수 있겠냐?“ 당시 회비로 운영되는 경실련이 60만~70만원 되는 상근 활동가의 월급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던 때니, 이같은 의문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렇게 온정적인 자선 방식으로 남북의 두터운 분단의 벽을 허물기는커녕 말랑말랑하게라도 할 수 있겠냐.” 오랫동안 통일운동을 해왔다는 이들의 입에서 주로 나왔던 근본적 회의론이었다.

개미 군단이 남과 북을 바꾸다

그런 고민을 뒤로한 채 95년이 찾아왔다. 많게는 300만이 기아로 숨졌다는 이북의 고난이 남한에 알려지기 시작한 즈음이다. 큰 물난리가 났다. ‘은둔의 왕국’이란 서구의 냉소를 받던 북이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세계식량기구(WFP) 등 국제기구가 곧바로 화답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지난해 대북 인도적 지원 10주년 행사가 많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역사성을 국제기구의 움직임에서 찾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나 좋은벗들의 지난 10년의 주요 활동 일지나 발자취를 봐도 96년에서 시작된다. 그해 바로 이북의 참상에 더 이상 눈감을 수 없던 종교 및 시민사회 단체가 나선다. 그는 당시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소장이던 서경석 목사의 “딱 석 달만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창립 과정을 돕게 된다. “그때 그렇게 코가 꿴 거야.”

어렵사리 첫 삽을 뜬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은 한동안 비포장길을 달렸다. 남과 북의 갈등과 대립에 따라 길을 닦고 포장을 내는 일은 더뎠다. 96년 9월18일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 350t급 북한 잠수정이 좌초했다. ‘북한 동포 돕기 범국민운동 선포식’을 가진 지 겨우 두 달, 북한 동포 지원 성금으로 2억원을 모아 적십자에 전달한 지 겨우 며칠 뒤의 일이었다. “여론이 확 냉각됐다. 북한 돕기의 ‘돕’ 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다.” 당시 그는 지금도 달고 다니는 ‘사무총장’이란 직함을 떠안게 된다. 문민의 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부는 군사 독재정부보다 나았지만 호의적이지 않았다. 98년까지 북과의 모든 교류는 적십자로 창구가 단일화돼 있었다. “혹시 북한 정권과 정치적으로 연계되지 않을까라는 냉전적 이념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직접적인 민간 교류는 금지됐다. 민간단체들이 대북 지원 물품을 적십자를 통해 전달한 뒤 나중에 북으로부터 적십자를 통해 잘 받았다는 인도인수증 한 장을 받는 것만이 교류의 증거였다. 정부는 인도적 지원 단체의 사단법인화 신청을 98년까지 막았다. 이즈음 모금 단체들이 대대적으로 압수수색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행정비로 모금액의 2%를 초과했는지 조사받았다. “북 동포 돕기 한다더니 제 호주머니에 넣었다”는 여론몰이도 뒤따랐다. 북 지원에 나선 기업들은 안기부의 전화 한 통에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97년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대북 지원 단체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때다. “그해에 300만~400만 명이 북 지원에 참여했다. 이 거대한 개미 군단의 작은 손길이 남과 북을 바꿨다.” 미제의 앞잡이쯤으로만 여기던 남에 대한 북의 인식이 많이 좋아졌으며 남 또한 자발적 참여를 통해 많은 이들의 냉전적 대북 인식이 수그러들었다. 그는 당시의 흥분된 기억을 “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 힘이었을까? 으레 되풀이돼왔던 것처럼, 97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북한에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총풍 사건이 일어났지만 대선의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화해 무드를 만든 게 아니라 그 수혜자라고 말한다. “총풍이 안 먹힌 것은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가 선방한 게 아니라 인도적 지원이 바꾼 세상의 덕을 DJ가 본 거야.”

북한, 쌀 100만t 이상 부족해

이후 서해 교전, 2차 북핵 위기 등 계속된 악재에도 인도적 지원사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사이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도 분화됐다. 쌀과 옥수수에서 비료, 의약품, 잠종(누에 알), 젖염소 착유 시설, 목초 종자, 경운기, 콤바인, 제약공장 설비, 수액제 공장 건설 자재 지원 등으로 다원화되고 진화해갔다.

위기는 또 한 번 찾아왔다. 지난 7월 미사일 발사와 북핵 실험으로 인도적 지원사업마저 냉각됐다. 그의 걱정이 여느 때보다 커 보였다. “북이 10년 내 최악의 상황에 있다. 530만t의 쌀이 필요한데 물난리로 쌀 생산량이 10% 이상 줄었고 전체적으로 100만t 이상이 부족하다.” 그의 말은 다급했다. “배급 체계가 무너진 곳에서 식량값마저 폭등했다. 가난한 하위 계층에게 올겨울은 치명적이다.”

이 말을 전하는 그는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의 새로운 역사를 쓰며 오늘도 바닥에서 뛴다.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자신의 업을 불평하진 않는다. 그 동력을 믿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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