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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수의사가 막는다

등록 2006-11-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진료권 확보를 넘어 국민 건강을 위해 싸우는 ‘수의사 연대’ 박상표 국장…소의 치아를 통한 연령 측정법에 이의 제기, 약물 오남용 사례와도 맞서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광우병 파동으로 수입 중단됐던 미국산 쇠고기가 10월30일 인천공항을 통해 반입된 뒤 수입 쇠고기를 둘러싼 안전성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민주노동당은 수입된 미국산 쇠고기를 전량 구매해 폐기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을 유발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앞으로 수입될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안전성 시비도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척 램버트 미국 농림부 부차관보가 11월16일 방한해 쇠고기 수입 조건의 완화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 정부도 인정한 허술한 검역체계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논쟁에서 정부 쪽과 날카롭게 대립해온 시민사회 대열의 맨 앞줄에는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박상표(38) 편집국장이 서 있다. 박 국장은 연대의 인터넷 사이트(vetnews.or.kr)를 관리하면서 전문적인 식견을 담은 글을 통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광우병 예방을 위한 미국의 사료 정책이 미국 정부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후진적이고 미국의 검역 체계가 매우 허술하다는 점을 선도적으로 제기한 게 그였다. 또 광우병 전파에 관한 최근의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두고 ‘30개월 미만’이나 ‘살코기’라는 요건을 광우병의 안전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점도 앞장서 제기했다.

박 국장과, 연대 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하일(44) 한국동물임상연구소 원장 주도의 수의사 연대가 꾸려진 건 지난해 9월. 애초 연대 활동의 초점은 수의사의 진료권 확보였다. 현행 수의사법에서 ‘자가진료’(동물을 키우는 주인 마음대로 처방하는)를 허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부작용을 없애는 데 수의사들의 힘을 모으자는 취지였다. 수의사들은 이미 2003년 수의권쟁취위원회를 출범시켜 활동을 해오고 있던 터였다. 위원회를 연대로 바꾼 것은 ‘쟁취’라는 단어 때문에 국민 건강과는 동떨어진 이익단체의 활동으로만 비쳐지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항생제의 절반 정도가 동물에게 쓰이는데 수의사 처방에 따라 사용되는 비율은 6%밖에 안 됩니다. 6%! 나머지 94%는 (동물 주인이) 임의로 사다 씁니다.”(박상표 국장). 박 국장은 “축·수산물 생산 과정에서 항생제 오·남용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자가 진료’는 본래 ‘수의사가 없는 도서 벽지’에 국한돼 허용되다가 차츰 확대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의사법상 수의사의 진료 영역에서 어패류를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해 수의사들을 격분시켰다. 농림수산부가 농림부와 해양수산부로 분리될 때(1996년) 수산대생에게 ‘어류질병관리사’를 허용한 것 때문에 수의사들은 이미 정부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수의사들의 모임을 꾸릴 정서적 토대가 든든하게 마련돼 있었던 셈이다. 연대 활동에 참여한 주축은 수의권쟁취위 시절부터 활동해온 전국의 수의사단체들이었다. 현재 연대에는 강원도수의사회를 비롯한 15개 지역단체와 한국동물병원협의회 등 8개 직능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 단체에 소속된 1500명 안팎의 수의사들 성금이 연대 활동의 물적 기반을 이룬다.

98년 4월생 이전 소만 피해라?

초창기부터 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하일 원장은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대에서 의료경영 석사 학위를 땄다. 박상표 국장 역시 서울대 수의학과 출신이며, 참여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수의사의 본업은 잠시 제쳐둔 채 연대 활동에 매달리고 있는 홍 원장, 박 국장 외에 주병구(대외협력국장), 김영철(재무국장), 이광수(교육국장), 하동종(홍보국장), 권태억(상황실장), 오용관(정책1국장), 박혁(정책2국장) 수의사가 연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밖에 한영도 수의사를 비롯한 10여 명의 운영위원이 있다.

수의사연대의 전문성이 빛을 발한 건 지난 10월 중국산 장어에서 발암의심 물질인 ‘말라카이트그린’이 검출됐다는 소식으로 파문이 인 때였다. 당시 정부는 우리나라의 장어 양식에선 말라카이트그린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부인하다 나중에 번복했는데, 이는 수의사연대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해양수산부가 말라카이트그린을 양식업에 쓰라고 지침을 내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수의사연대가 밝혀냈던 것이다. 정부가 국내산 장어에서도 말라카이트그린이 검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말라카이트그린으로 파문이 일고 있던 즈음 이번엔 쌀시장 개방과 얽힌 미국산 쇠고기 재수입이 쟁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는 연대 활동의 초점이 광우병으로 옮아간 계기가 됐다. 당시 정부는 광우병에 걸린 미국 소의 치아 조사(dental examination)를 한 결과 8살 이상으로 판명돼 2006년부터 수입을 재개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다. 한·미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서 1998년 4월 이전에 출생한 소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경우에는 쇠고기 수입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합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반추동물에게는 육식 사료를 먹이지 않는 방향으로 미국의 사료 정책이 바뀐 1998년 4월 이후에 태어난 소는 광우병의 안전지대에 있다는 논리다.

미국·캐나다도 "치아로 소 나이 몰라"

박 국장을 중심으로 한 수의사연대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소의 치열(dentition)은 품종, 지역적 위치, 유전적 특성, 먹이 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광우병 감염 소의 나이는 전문가라도 쉽게 알 수 없다는 게 연대의 주장이었다. 박 국장은 당시의 문제 제기 뒤에도 치아 조사를 파고들어 각종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두 나라 정부를 궁지로 몰았다. 캐나다식품검사국이 2005년 4월28일에 작성한 ‘국가 광우병 감시 프로그램’, 2005년 8월 미국 농림부 산하 동식물검역소(APHIS)가 발행한 ‘텍사스주 광우병(BSE)에 대한 최종 역학보고서’가 그런 근거의 예다. 캐나다식품검사국의 문서는 “소의 나이를 확증할 때 품종등록 문서와 같은 추가적인 문서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치아 조사만으로 30개월령 미만(수입 허용 대상)인지 그 이상인지를 증명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 정부 또한 텍사스의 광우병 감염 소가 낳은 송아지들의 나이 판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겨우 농장주의 진술에 의존해 송아지 나이를 보고서에 기록한 것으로 드러났다. 치아 조사와 관련한 논란은 아직까지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다.

수의사 연대는 당분간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알리는 데 주력하되, 앞으로 벌일 활동 방향의 초점은 식품안전 기준을 정하는 쪽으로 맞추고 있다.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는 식품안전기본법 개정안은 국무총리 산하에 식품안전정책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행정적인 효율성만 고려하고 있을 뿐 식품 안전성을 높이는 고민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연대의 활동이 자칫 영역 지키기 다툼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홍하일 원장은 “수의사의 관리 없이 항생제나 호르몬제, 마취제를 취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이는 수의사의 권익 문제를 넘어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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