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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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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자의 투쟁, 아들의 이름으로…

등록 2006-08-09 00:00 수정 2020-05-02 04:24

원폭 후유증 앓다 비명에 간 김형률씨의 뜻을 잇는 아버지 김봉대씨… 생전에 못다한 ‘원폭 피해자 특별법’ 통과 위해 오늘도 전국을 뛴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그의 아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곁에 그가 있었다. 한두 시간씩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는 말참견 한 번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가 안고 있는 가방 속에는 그의 아들이 목숨보다 아끼는 각종 서류 뭉치와 아들의 목숨을 부지해주는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과 약봉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결같이 곁에 앉아 말없이 아들의 삶을 보듬고 있었다.

“형률이가 남겨놓은 자료에 탄복했어요”

훤칠한 키에 깡마른 체구인 김봉대(70)씨의 얼굴에선 지난해 5월29일 서른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그의 아들 김형률 ‘한국원폭2세환우회’ 초대회장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선청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에 따른 각종 합병증을 앓았던 형률씨는 숨질 당시 163cm의 키에 몸무게가 32kg에 불과했다. 숨지기 몇 년 전부터 그의 폐는 이미 70% 이상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이 때문에 조금만 무리를 하면 연방 마른 기침을 뱉어내며 괴로워했다. 그럴 때마다 김봉대씨는 묵묵히 보온병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 아들에게 내밀곤 했다.

“형률이가 가고 난 뒤 남겨놓은 자료를 들춰봤다. 내가 모르는 일을 정말 많이 했더라. 그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아픈 몸을 이끌고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했는지…. 그냥 따라만 다녔지 아비로서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꼭 61년 전인 1945년 8월6일 ‘어린 소년’(리틀 보이)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42만여 명이 피폭당했고, 이 가운데 약 1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 ‘뚱보’(팻 맨)가 투하됐다. 27만여 명이 피폭당했고, 약 7만4천 명이 숨졌다. 원폭 피해자들 가운데 히로시마에선 5만여 명, 나가사키에선 2만여 명의 재일 한국인도 끼어 있었다. 전체 피폭 피해자의 10%에 이르는 규모다.

형률씨의 어머니 이곡지(67)씨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당시 6살 나이에 방사능 피폭을 당했다. 피폭 1세대인 이씨는 한평생 악성 종양과 피부병에 시달렸고, 피폭 2세대인 형률씨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은 생후 1년6개월 만에 폐렴으로 숨졌다. 중학교 시절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렸던 형률씨는 철이 들어 어머니의 피폭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의 질병과 방사능 피폭의 함수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무너져가는 육신을 이끌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일본 정부는 1957년 피폭자 의료법을 제정했다. 또 68년엔 관련 특별조치법을, 94년엔 피폭자 원호법을 내놨다. 의료법 제정 이래 98년까지 40여 년 동안 일본 정부는 자국민 35만여 명에게 모두 2조5천억엔을 지원했다. 매년 관련 예산만 2천억엔을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겐 91년과 93년 17억엔과 23억엔씩 ‘민간기금’을 지급한 게 고작이다. 똑같이 원폭 피해를 입었는데, 자국민과 타국민을 차별 대우하는 건 횡포다.”

8월3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5층 자료실에서 만난 김봉대씨 입에선 뜻밖에도 각종 수치가 물 흐르듯 쏟아졌다. 뭔가 말을 하려다 생전에 아들이 하던 것처럼 가방에서 관련 서류 뭉치를 꺼내들고 한장한장 넘겨가며 설명을 하기도 했다. 아들이 비명에 간 뒤 한동안 텅 빈 아들 방에서 유품을 매만지는 일로 소일했다는 김씨는 어느새 ‘투사’가 돼 있었다.

드디어 국가기관의 조사가 시작되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존재는 그동안 철저히 무시돼왔다. 일본 정부와 히로시마·나가사키시는 30여 차례나 피폭자 실태 조사를 했지만, 한국인 피폭자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한국 원폭 피해자는 식민지 시대 징용으로 끌려가 겪은 고통과 원폭 피해, 그리고 역사와 사회로부터 방치된 채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은 지난 61년 세월이라는 ‘3중고’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하기는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해방둥이가 환갑을 맞을 때까지 정부 차원에서 피폭자 지원대책 마련은커녕 변변한 실태 조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률씨가 지난 2003년 여름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기 전까지 나온 자료라고는 199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한국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 보고서 정도가 고작이다. 당시 조사 결과, 원폭 피해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피폭 2세대는 23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망연자실해 하던 김봉대씨를 일으켜세운 것은 ‘의무감’이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형률씨는 원폭 피해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태 조사와 그에 따른 지원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와 조승수 전 국회의원(민주노동당)이 주축이 돼 마련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진상 규명과 인권 및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안)’은 지난해 말 국회에 상정된 이후 아직까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아들이 생전에 매듭짓지 못한 특별법 통과는 늙은 아버지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새로운 목표가 됐다.

김씨는 요절한 아들을 가슴에 묻은 뒤 지난해 여름부터 ‘아들의 이름’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와 합천 등지를 오가며 ‘활동’을 시작했다. 피폭자 증언대회와 각종 공청회에 아들 대신 연단에 앉았다. 지난 5월엔 아들의 1주기 추모행사와 추모문집을 만들어냈고, 그즈음부터 그는 ‘명함’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수줍은 듯 내민 명함에는 ‘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형률이가 하던 거 끝맺음은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야 죽은 놈이 눈이라도 제대로 감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형률씨의 진정에 따라 국가기관 최초로 원폭 피해자 2세의 기초 현황과 건강실태 조사 결과를 내놨다. 1092가구 4080명 피폭자 자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원폭 피해 2세들은 같은 연령대의 다른 이들에 비해 △빈혈(남성 88배, 여성 21배) △심근경색·협심증(남성 81배, 여성 89배) △우울증(남성 65배, 여성 71배) △천식(남성 26배, 여성 23배) 등 각종 만성질환 발병률이 큰 폭으로 높게 나타났다. 또 전체 조사 대상의 7.3%인 299명이 이미 사망했으며, 이 가운데 52.2%는 10살 이전에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인권위는 지난 6월과 7월 관련 시민단체와 전문가, 유관 부처 공무원 등을 불러 간담회를 두 차례 열고, 올해 안에 원폭 피해자를 위한 정책 권고안을 내놓을 방침이다. 생전에 형률씨가 뿌려놓은 ‘밀알’이 썩어 하나둘씩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아버지

김씨는 지난 4월부터 넉 달 동안 동네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컴퓨터 강좌에 다녔다. 부인 이씨가 “방에서 아들 생각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등을 떠밀기도 했지만, ‘활동’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칠순 나이에 워드프로세서를 배웠고, 전자우편 활용법과 홈페이지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했지만, 이제 전자우편을 보내고 첨부파일을 내려받는 것쯤은 거뜬히 해낸단다.

“요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형률이 방에 가서 기도를 한다. 형률이가 못다 한 특별법 통과를 나라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래서 김형률 이름 석 자라도 잊혀지지 않게 해달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김씨의 눈가에 아스라이 이슬이 맺혔다. “원폭 피해자 문제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역사다.” 잠시 숨을 고른 그의 입에서 형률씨가 생전에 강조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던 그의 유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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