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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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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갤러의 마지막 ‘닥본사’

등록 2006-04-05 00:00 수정 2020-05-03 04:24

드라마 <궁>과의 이별이 아쉬운 네티즌, 극장에서 함께 웃고 울다… 짤방·뮤비 쏟아내며 ‘리봉이’와 ‘완소으네’를 완전 사랑했던 날들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지난 3월30일 밤 10시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궁>의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이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 400여 명이 ‘모처’에 모여들었다. 이들이 모인 곳은 누구네집 안방극장이 아닌 진짜 극장 서울 마포의 상암C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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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는 TV 리모컨 대신 1만5천원짜리 극장표가 들려 있었다. 짧은 탄성과 함께 마지막 회가 시작했고, 이들은 방송 내내 웃음과 눈물을 훔쳐냈다. <궁>을 좁은 TV 화면에서 드넓은 스크린으로 데리고 나온 이는 방송사인 문화방송도, 제작사인 에이트픽스도 아니다. 인터넷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의 ‘궁 갤러리’(궁갤)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궁갤러’들이다.

출첵 2500여 명, 간식 나르고 포토북 만들고

궁갤에는 하루에 수천 명이 드나든다. 그중 ‘고정닉’(고정 닉네임)을 사용하며 ‘출첵’(출석체크)에 도장 찍는 이들은 2500여 명. 지난 3개월 동안 궁갤러 ‘’(디시인사이드에서 쓰이는 호칭)들의 거주지는 사실상 궁갤이었다.

이들의 일상을 잠시 들여다보자. 궁갤러의 가장 큰 목표이자 임무는 ‘닥본사’(닥치고 본방송 사수). 닥본사하면서 ‘안습’(안구에 습기 차다)하거나 ‘캐발랄한’(매우 발랄한) 장면으로 수많은 ‘짤방’(게시판 짤림방지용 사진)과 ‘뮤비’(뮤직비디오)를 만들어낸다. 또 ‘마봉춘 공홈’(문화방송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주장미’(주요 장면 미리보기)와 ‘영스’(영상스케치)에 열광하고 ‘습호’(스포일러)를 찾아 ‘CSI’(추적·분석하는 사람)를 조직, 쏟아지는 궁금증을 해결하고 촬영현장도 찾아다닌다.

드라마가 ‘안들호메다’(어이없는 이야기 전개)로 간다 싶으면 댓글을 맞대고 고민하며 ‘인뢰옵하’(황인뢰 PD)와 ‘완소스탭’(완전 소중한 스태프)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며, 주인공인 ‘리봉이’(리본 의상을 입어 붙여진 이신 역 주지훈의 애칭)와 ‘완소으네’(완전 소중한 신채경 역의 윤은혜), ‘백합이’(백합같이 청초해 붙여진 이율 역 김정훈), ‘이쁘지효’(이쁜 민효린 역의 송지효)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전한다.

궁갤러라고 모두 같지는 않다. 커플 지지 성향에 따라 ‘신채 라인’(신-채경을 미는 사람들), ‘율채 라인’(율-채경을 미는 사람들), ‘신율 라인’(신-율을 미는 사람들) 등으로 나눠지고 활동 시간에 따라 새벽반, 아침반, 종일반 등으로 나눠진다. 궁갤러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라인과 활동시간대에 맞는 반을 찾아 궁갤러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지난달 게시판을 ‘달리던’ 궁갤러들은 제작진에 간식을 전달하는 이벤트를 열기로 의견을 모으고 통장을 개설했다. 300여 명의 자발적인 참여로 통장에는 얼추 400만원이 모아졌고, 그중 100여만원을 털어 간식을 사들고 오산 세트장으로 찾아갔다. 반응은 대단했다. 남은 돈으로는 극장 상영회를 준비하고 이미지 생산공장인 궁갤 사진을 모아 포토북을 만들어 제작진과 출연진, 궁갤러에 전달했다.

하루 평균 3시간에서 길면 20시간을 궁갤에서 보내고 <궁>이라면 몇 만원쯤 선뜻 꺼내놓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인터넷 폐인? 아니다. 궁갤에는 학원 가기 싫어하는 고등학생도 있고 직장 상사를 피해 틈날 때마다 궁갤을 열어보며 ‘직딩 궁갤사수법’을 공유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드라마 <궁>을 좋아한다는 거, 단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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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궁갤러는 이런 글을 올렸다. “어느 날 저녁 술을 마시고 닥본사를 위해 집으로 달려가는데 바로 옆에서 직장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직감했단다. ‘아, 궁갤 아구나.’ 궁갤 마지막 방송 극장상영회에 앞장선 궁갤러 백지나(24)씨는 드라마보다 궁갤이 더 재밌다. “<궁>의 뮤비와 합성사진, 가상 미니홈피 등을 만들며 놀다 보면 금세 서로를 ‘’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돼요. 궁갤에서 성별이나 나이 같은 건 중요하지 않거든요.”

화려한 글발의‘마클’대감들 모인‘텔궁’

<궁>에 대한 열광의 가운데에는 입헌군주제라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경과 황실 로맨스, 영상미,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주연 배우나 연기에만 집중되던 관심이 드라마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시청자와 제작진의 소통 폭이 넓어지고 대중성을 갖춘 마니아 드라마로 자리잡은 것이다. 결말에 대한 단편적인 주장이 아닌 편집이나 음악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한 조언도 궁갤을 통해 제작진에 전달됐다. 혜명 공주가 황제로 오르는 파격적인 결말 역시 궁갤에서 예전부터 예견했던 내용이다.

<궁> 팬 게시판은 궁갤 외에도 마이클럽(마클)의 ‘드라마愛 빠지다’와 포털 사이트 다음의 텔레비존 ‘텔궁’, 문화방송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베스티즈 드라마방 등이 있다. 궁갤에는 포토숍 등 기술에 능한 10~30대가 모여들고, 마클에는 20~30대 여성들이 주를 이룬다. 텔궁과 문화방송 홈에는 초등학생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선영이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마클은 화려한 글발을 자랑한다. 궁갤 전공이 이미지라면 마클 전공은 리뷰. 그래서 마클은 리뷰북을 준비했다. 300여 쪽의 리뷰북 1부는 이미 제작진에게 전달됐고 2부는 4월에 나온다. 리뷰북을 만들고 있는 두 아이 엄마 김지수(가명·33)씨는 “사랑에 통달한 여자들이 드라마의 깊은 속내까지 들여다보며 써내려간 글은 드라마 인물에 빙의(동일시)된 이들의 마음을 울린다”고 말한다.

서로를 ‘대감’이라 부르고 하오체를 쓰는 다음의 텔궁도 십시일반 돈을 모아 대학로 소극장을 빌려 3월30일 마지막 방송 상영회를 열었다. 휴대전화 클리어와 컴퓨터 마우스패드도 만들어 상영회에서 판매했다. 수익금 전액은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단다. 회사원 최은정(33)씨는 텔궁 자랑에 여념이 없다. “경어를 쓰기 때문에 분위기가 따뜻해요.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에 쓰는 것도 더 좋은 이미지로 활동하고 싶은 텔궁 대감들의 의지예요.”

방송사와 드라마 제작사는 이들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문화방송은 궁갤 마지막 방송 극장상영회를 위해 중계차를 보내 실시간 상영을 도왔고, 제작사는 각 게시판의 간식 이벤트 등에 세트장 문을 활짝 열어줬다. 극장상영회에 참석한 황인뢰 PD와 송병준 에이트픽스 대표는 “극장에서 드라마를 시청하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이렇게 뜻깊고 감동적인 방송은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초고속 인터넷 전용선의 보급과 함께 <다모> <미안하다, 사랑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 <부활>에 이어 <궁>으로 오는 진화 과정을 겪으며 ‘무엇을 먹을까’에서 ‘어떻게 (맛있게) 먹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시청자는 오늘도 한 차원 더 높은 놀이의 세계로 초대해줄 드라마를 기다리며 가열차게 게시판을 달린다. 드라마라고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꼭짓점 댄스를 추며 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중화권 궁갤러도 만만치 않네

마카오 촬영장 실시간 중계에 한국 게시판 눈팅까지

마지막 회 촬영을 위해 지난 3월25일 중국 마카오로 날아간 <궁> 제작진은 현지에서 뜻밖의 팬들을 만났다. 인터넷으로 <궁>을 닥본사하고 있는 중국·대만·홍콩·싱가포르 팬들이다. 마카오 촬영 소식에 이곳으로 달려온 이들은 3박4일의 해외촬영에서 놀라운 정보력을 과시했다.
제작진과 출연진이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 등 각종 기기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영어권 한류 연예정보 사이트 ‘숨피’(www.soompi.com) 포럼 게시판에 현장사진과 동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찍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전송하면 그 사진을 받아 바로 게시판에 올리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쪽수와 광속으로 한국의 팬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켰다.
한국의 <궁> 팬 게시판의 발빠른 네티즌들은 숨피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퍼오고 중국어와 영어로 올린 글을 번역해 마카오 현지에서 촬영한 마지막 회 관련 습호와 결말을 추적해냈다. 이번 마카오 촬영이 끝나고 궁갤러를 비롯한 한국의 네티즌은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 궁갤 등 한국의 <궁> 팬 게시판에는 범아시아권 눈팅족이 이미 상당수 상주하며 사진 등을 각국의 게시판으로 퍼나르고 있다는 것. 둘째는 이들 역시 궁갤러처럼 모니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언어만 다를 뿐 똑같이 닥본사-짤방-리뷰-습호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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