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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푹 썩어 보실라우?

등록 2006-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학자의 길 대신 장독과 함께 밤 지새는 ‘메주 박사’ 선택한 김영태씨
대량생산 거부하고 균과 인간의 행복한 만남인 발효의 세계에 빠져들다

▣ 강화도= 글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인간은 언제부터 충치가 심해졌을까? “칫솔질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랬을 수 있다.” 김영태(43)씨의 진단은 다소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윤정모는 그의 소설 <님>(2003)에서 “칫솔에 치약을 묻혀 닦으면서 충치가 생겼다”고 단정한다. 물론 둘 다 의사가 아니다. 김씨의 논리는 이렇다. “치약으로 이를 닦으면 이는 무주공산이 된다. 이에 있어야 할 균들이 나가고 이질균들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에게 치약은 무균 상태의 환경이 최적이라는 현대 과학에 대한 맹신의 부산물이다. 그의 치약은 소금물이다. 그에게서 치약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균과 공존하는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메주 박사’라고 부른다.

지난 2월6일 찾아갔을 때 그는 벌써 1주일째 몸앓이를 하고 있었다. ‘나쁜 균’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메주를 한 번 띄우면 방안의 거의 모든 균들이 메주로 빨려들어갑니다. 무균 상태가 되기 때문에 15일 동안은 다시 메주를 띄우지 못합니다.” 그는 발효의 환경과 조건을 달리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최근 연구 실패로 콩 80kg과 찹쌀 60kg이 버려졌다. 방 안에서 15일 이내 다시 메주를 발효시킬 수 있는 무기질의 공급 방법을 어렵게 찾아냈지만 과로가 찾아온 것이다.

발효란 원래 온 곳으로 되돌리는 것

김영태씨는 인생을 틀었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불교 신화를 공부했다. 아내가 대안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낯선 땅이었던 강화도로 들어왔다. 2001년이었다. 남쪽으로 마니산을 바라보는 진간산 밑자락에 월 7만원짜리 흙집을 한 채 구했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이다. 그의 집 구조와 환경은 “자연 발효는 기온, 습도, 햇볕, 통풍 등 집터를 변수로 하는 게 많다”는 그의 믿음에 따라 어렵게 구한 것이다. 사랑채에 소박한 연구실도 차렸다. 메주를 주로 띄우는 곳은 부엌에 딸린 방이다. 대문 안 뜰에는 커다란 찜통과 솥단지, 절구통, 가스버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는 지난해 4학기째 밟고 있던 박사 과정을 미련 없이 접었다.

그가 메주에 ‘올인’한 것은 제대로 된 발효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녹차를 오랫동안 발효시킨 보이차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발효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게 돈이 안 됩니다. 요새는 자본가치에 휩쓸리기 때문에 자본가치가 없는 제대로 된 발효나 발효 생산물을 연구할 사람이 없습니다.” 청국장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는 메주, 된장, 고추장, 간장, 막장, 밥식혜 등 거의 모든 발효식품으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엔 술을 연구 중이다.

동양철학을 해서 그런지 발효(醱酵)에 대한 그의 뜻풀이부터 예사롭지 않다. “발효란 원래 온 곳으로 되돌린다는 뜻입니다. 썩는다는 것과는 달라요. 온전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는 인간의 몸이 하나의 발효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고 믿는다. “인간의 위, 소장, 대장에 당연히 있어야 할 미생물이 있다. 인간의 몸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공생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몸의 일부다.” 그가 장을 발효시키는 과정을 인간의 몸과 분리시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게 순환한다고 본다. 똥은 퇴비로 농작물의 성장을 돕는다. 몸에서 나오는 균들은 장의 발효를 돕는다. 발효 식품은 다시 입으로 들어간다. 항생제와 방부제의 남용은 이러한 과정의 질서를 흩뜨려놓는다고 본다.

김영태씨 밑에서 발효를 배우는 이권열(36)씨는 다섯 달 가까이 술과 조미료·방부제가 첨가된 음식에 입을 대지 않고 있다. 몸은 술에 찌들어 있었다. 그는 보이차를 마시고 노동을 하면서 숙변을 빼내는 막바지 과정에 있다. 김씨는 “메주와 청국장은 사람의 기운으로 산다”라고 말했다. 김씨에게 누가 발효의 주체가 되고 어떤 몸 상태로 발효를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장을 띄울 땐 아예 외부인의 출입을 못하게 한다. 인간의 몸이 발효 과정에 중요하게 개입하듯이 장도 인간의 몸에 깊이 개입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장이 인간의 면역체계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나라에서 전염병이나 기근이 돌면 된장을 내린 것도 다 장의 면역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다.” 장은 오랫동안 인간의 삶의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돼왔다. 옛날엔 이사하기 전 장독대에 장을 갖다놨다가 맛이 변하면 그 집으로 이사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장맛의 중요성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새 집의 환경이 이사가는 사람들과 맞지 않음을 뜻한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그의 노동과 그의 균으로 만든다

그가 장을 띄우는 조건은 까다롭다. 발효의 첫 단추인 콩은 강원도 영월까지 찾아가 직접 맛본 뒤에 구입한다. 장을 대량생산하는 곳에서 3~4시간 동안 콩을 삶지만 그는 꼬박 7~8시간을 삶는다. 그리고 콩을 찧는 것도 절구통을 이용한다. 방 안에선 발효 이틀째부터 호흡하기조차 어려운데 메주와 함께 자는 것을 고집한다. 발효의 모든 과정에 그의 노동과 그의 균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의 가장 까다로운 조건은 대량생산에 대한 기피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제대로 된 발효를 할 수 없어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한테도 제대로 장을 공급하지 못한다. 아직 연구가 다 끝나지 않은 것도 공급량을 늘리지 않는 까닭이다. 현재 10여 명 정도에게만 그가 만든 장을 팔 뿐이다. 한번은 강화도에 있는 초등학교에 유기농 된장을 공급하자는 제안을 들고 영농조합에서 찾아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몇백 명이 먹을 수 있는 된장을 만든다는 것은 대량생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집으로 살림살이도 어렵다. 재료비도 빠듯할 때가 많다. 투자자들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대량생산에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의 후원자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장 발효 연구를 개인의 지적재산권으로 독점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가 터득한 노하우를 널리 전파하려고 한다. 그가 발효학교를 세우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발해의 특산물, 신라의 예물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메주와 장의 역사

“고구려인은 장 담그고 술을 빚는 솜씨가 훌륭하다.” <삼국지>(290년)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다. 메주를 쑤어 장(醬)을 담그기 시작한 것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북쪽의 만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콩의 재배는 4천 년 이전인 것으로 학계가 추정하고 있을 만큼 장의 역사도 오래됐을 것으로 보인다.
메주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에서다. 이 책에서 신라 신문왕 3년 왕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을 때 예물로 보낸 품목에 메주를 뜻하는 ‘시’를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인들은 발해의 특산물로 책성(발해의 수도)의 메주를 꼽기도 했다. <고려사> <동국이상국집>에서도 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 현종 9년과 문종 6년엔 굶주린 백성을 위한 구황식품으로 장을 배급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장에 대한 단순한 기록에서 벗어나 <구황촬요> <구황보유방> 등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간장과 된장의 제조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증보산림경제>는 오늘날까지도 된장 제조법의 고전으로 통한다.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해 장류의 공업화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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